[시스템 셧다운 10초 전…….]
붉은 암전이 시야를 삼켰다.
결전에 가까운 대수술실에 올라선 강지훈의 귀에 장부 시스템이 전례 없던 시스템 작동 이상을 암시하는 불길한 적조 경고음을 울리며 시야가 붉게 점멸하는 순간이었다. 망막을 찌르는 적색 노이즈 너머로 송태호의 흉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급성 상행 대동맥 박리(Type A Aortic Dissection).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행 대동맥의 얇은 외막이 심장박동에 맞춰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9초…….]
"선배! 강지훈!"
정신을 차리라며 어깨를 흔드는 백서진의 외침이 수중을 뚫고 들어오듯 둔탁하게 굴절되어 들렸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고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속눈썹에 걸려 붉은 시야를 더 뿌옇게 흐려 놓았다.
"비켜봐, 강지훈. 정신 못 차릴 거면 메스 넘겨!"
한예준이 지훈의 손에서 미끄러지기 직전인 메스 자루를 낚아채듯 고정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예준의 손바닥을 통해 지훈의 굳어버린 손가락 끝으로 전달되었다. 예준의 매서운 눈빛이 지훈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대동맥 궁(Aortic arch)까지 찢어지기 직전이야. 네가 길을 열지 않으면 이 환자는 여기서 즉사해. 내 어시스트를 이정표로 삼아. 억지로라도 눈을 부릅뜨란 말이다!"
예준의 거친 다그침과 함께, 그의 손가락이 지훈의 손등을 덮었다. 예준은 지훈이 떨어뜨리려던 메스의 각도를 강제로 유지한 채, 박리된 대동맥 벽 주위를 압박 지혈하기 시작했다.
"석션! 시야 확보해! 백서진, 넌 상행 대동맥 원위부(Distal) 잡아!"
"예, 예준 선생님!"
예준의 실시간 손 봉합 서포트가 지훈의 마비된 감각을 강제로 일깨웠다. 뇌 신경망에 각인된 생사장부의 깨진 인과율 공식들이 예준의 손놀림에 반응하여 극적인 재정렬을 시작했다.
[시스템 동기화 복구 시도 중…….] [현재 시야 확보율: 45%] [대동맥 캐뉼라(Cannula) 삽입 경로 재수정.]
"하아…… 하아……."
지훈은 턱 끝까지 차오른 신음을 삼키며 메스를 다시 움켜쥐었다. 심장 근육이 쥐어짜이듯 비명을 질렀지만, 눈앞의 붉은 노이즈 사이로 마침내 환자의 대동맥 벽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혈류의 궤적이 숫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인조혈관(Graft) 준비해. 예준아, 네 손끝 그대로 고정해라. 0.5밀리미터라도 흔들리면 외막이 터진다."
"걱정 말고 집도나 해. 내 손가락은 기계보다 정확하니까."
예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훈은 예준이 고정해 놓은 대동맥의 경계선을 따라 메스 끝을 밀어 넣었다. 절개선이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찢어진 혈관 벽을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이이-.
수술실 천장의 가스 공급기 라인에서 미세하지만 날카로운 마찰음이 발생했다. 마취 가스와 산소를 공급하는 가스 밸브의 압력계 바늘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어? 마취기 압력 센서가 왜 이러죠? 산소 포화도 수치가 흔들려요!"
마취과 레지던트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데이터가 있었다. 생사장부의 구석진 프레임, 과거 오만식이 리베이트 비리로 들여왔던 불량 의료 소모품 품목 리스트가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해외 수입 불량 의료 가스 밸브. 미세 누출 발생 시리얼 넘버: A-9982-X.'
"마취기 공급 밸브 확인해!"
지훈이 수술대에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갑게 함성을 질렀다.
"밸브 좌측 하단에 각인된 일련번호 읽어!"
"예? 아, 예! 어…… 'A-9982-X'입니다!"
"오만식 그 개자식이 결국 쓰레기를 꽂아 넣었군."
지훈의 이가 갈렸다. 가스 누출로 인해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환자는 뇌사 상태에 빠지고, 미세 누출된 마취 가스가 전기 스파크와 만나면 수술실 전체가 폭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예준아, 봉합사 넘겨받아. 내가 가스 배관 우회 밸브를 수동으로 제어한다. 백서진, 넌 환자 바이탈 유지해."
지훈의 손가락이 수술대 하단의 전원 제어 장치와 가스 차단 밸브로 향했다. 시리얼 넘버 'A-9982-X' 불량 밸브의 압력을 우회하는 수동 바이패스 라인을 가동해야 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지만, 머릿속 장부가 지시하는 최적의 우회 경로를 따라 밸브를 꺾었다.
철컥!
"가스 압력 정상 수치로 하강합니다! 산소 포화도 다시 안정세로 돌아왔습니다!"
"봉합 계속해. 오만식 이 새끼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지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술실 내부의 위기는 넘겼으나, 진정한 음모는 이 수술실 외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세인트 미카엘 병원 본관 지하 2층의 전력 제어실.
"지금 당장 제4외과 수술실 라인의 가압 전력을 내려."
오만식 행정처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기 설비 주임의 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경비 용역업체에서 차출한 덩치 큰 사내들이 험악한 기세로 통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처, 처장님! 수술 중에 전력을 끊는 건 살인 행위입니다! 아무리 비상 발전기가 돌아간다고 해도 일시적인 전압 강하로 인공심폐기가 멈추면 환자는……!"
"시끄러워! 단순한 변전실 노후화로 인한 순간 정전 사고로 처리하면 돼! 강지훈 그 새끼가 불법 집도를 강행하다 사고를 낸 걸로 만들면 끝나는 일이야!"
오만식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지훈이 기어이 송태호의 수술을 성공시키고 병원의 비리를 폭로하려 든다면, 자신의 파멸은 불 보듯 뻔했다. 차라리 수술 중 사망 사고를 유도해 지훈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편이 안전했다.
"비켜, 내가 직접 내린다!"
오만식이 설비 주임을 밀치고 메인 전력 차단기 레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고압 전류 레버에 닿기 직전이었다.
쿵-!
전력 제어실의 두꺼운 철문이 굉음을 내며 열려 젖혀졌다.
"거기까지 하세요, 오만식 처장님."
하얀 의사 가운을 휘날리며 들어선 것은 백서진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 가죽으로 마감된 낡은 장부 한 권과 실시간 스트리밍 화면이 켜진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백서진……? 네년이 치료실에 안 있고 왜 여기 있는 거야!"
오만식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백서진은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가압 전력 레버 앞을 가로막아 서며 장부를 높이 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뭐……?"
"저희 아버지가 세인트 미카엘 재단 VIP 비밀 회계 장부를 어디에 숨겨두셨는지, 매번 가족 모임 때마다 술 취해 자랑하시던 곳이 있거든요. 안방 침대 밑 금고가 아니라, 서재 책장 뒤 비밀 벽 수납장."
서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은 지훈의 그것만큼이나 차갑고 단호했다.
"이 안에는 오만식 당신이 저품질 수입 가스 밸브와 의료 기기를 들여오며 제약사로부터 받아 챙긴 리베이트 이중 장부, 그리고 송원필 이사장 일가의 정관계 로비 자금 세탁 내역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시리얼 넘버 'A-9982-X' 불량 가스 밸브 수입 원장까지 전부 다요."
"이, 이년이 미쳤나! 그거 당장 내놔!"
오만식이 손을 뻗어 장부를 빼앗으려 하자, 서진이 태블릿 화면을 그가 볼 수 있도록 돌려 세웠다.
"늦었어요. 이 장부의 모든 페이지는 지금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법원 기소과로 실시간 전송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이 상황, 병원 내부 방송망과 뉴스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뭐라고……?"
오만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태블릿 화면 속에는 실시간 스트리밍 시청자 수가 수십만 명을 돌파하며 올라가는 댓글창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서도 전력 제어실 내부의 모습이 그대로 송출되는 중이었다.
"오만식 처장님, 당신의 의료 권력 놀이는 오늘로 끝입니다."
타다닥!
제어실 복도 너머로 무거운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장을 입은 검찰 기동 수사 요원들과 수사관들이 제어실 내부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이 들려 있었다.
"오만식 씨, 리베이트 수수, 업무상 배임, 그리고 의료기기 불법 반입 및 살인 예비 음모 혐의로 체포합니다."
수사관이 오만식의 팔목을 꺾어 올리며 금속 수갑을 채웠다.
찰칵-!
차가운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제어실 벽면에 부딪쳐 흩어졌다.
"이거 놓아! 내가 누군지 알아? 송원필 이사장님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놔, 이 새끼들아!"
오만식이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으나, 기동 수사 요원들의 완력 앞에서는 종이 인형처럼 무력했다. 수갑을 찬 채 바닥에 질질 끌려 나가는 오만식의 모습은 병원 전역의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수술 도중 가압 전력까지 내려 지훈을 살해하고 비리를 덮으려던 병원 행정의 거두가,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 속에서 스스로 파멸하는 장엄한 인과응보의 순간이었다.
***
그 시각, 수술방 내부.
"가스 압력 완전히 안정화되었습니다. 인공심폐기 가동 상태 정상입니다."
예준의 보고에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의 붉은 노이즈가 서서히 걷히며 푸른빛의 생사장부 인터페이스가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환자: 송태호] [급성 상행 대동맥 박리 수술 성공률: 100% 도달.] [인과율 개변 완료.]
"인조혈관 문합 완료했다. 클램프(Clamp) 해제한다."
지훈이 대동맥을 조여 잡고 있던 클램프를 천천히 풀었다. 새로운 인조혈관을 통해 붉은 선혈이 힘차게 뿜어져 나가며 송태호의 전신을 돌기 시작했다. 단 한 방울의 미세 누출도 없었다. 완벽한 집도 공식의 결과물이었다.
"하아……."
지훈은 메스를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신을 덮쳐오던 심부전의 통증이 사그라지며, 그의 남은 수명이 머릿속 장부 구석에 표시되었다.
[계약자의 남은 수명: 11시간 12분.]
수술은 성공했으나, 그가 지불한 대가는 뼈아팠다. 하지만 지훈의 입가에는 옅은 냉소가 걸려 있었다. 눈앞의 환자를 살렸고, 그들을 가로막던 거대한 바위 하나를 완벽하게 부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
한편, 세인트 미카엘 의료재단 이사장실.
방 안에는 오직 대형 벽걸이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세인트 미카엘 병원 오만식 행정처장, 리베이트 및 살인 음모 혐의로 현장 체포…….] [-백서진 전공의가 폭로한 VIP 비밀 장부, 정관계 로비 자금의 실체 드러나나…….]
"이…… 이럴 수가……."
가죽 소파에 앉아 방송을 지켜보던 송원필 이사장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화면 속에서 수갑을 찬 채 끌려 나가는 오만식의 뒤편으로, 당당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백서진과 수술실을 지키고 있는 강지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세인트 미카엘의 거대한 자본 제국이, 일개 외과의와 전공의의 손끝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강지훈…… 백서진…… 네놈들이 감히 내 손을……!"
송원필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기괴한 파열음이 울렸다.
쩌적-.
9화에서 지훈의 장부가 간접적으로 시각화했던 붉은색 혈 역행 마크. 송원필의 뇌하수체 부근 미세 혈류 역행성 박리(Retrograde Dissection)가, 격노와 공포로 인한 급격한 혈압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폭발적으로 찢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꺼윽……! 흑……!"
송원필이 목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며 산소가 차단된 허파가 비명을 질렀다. 비서관을 부르려 손을 뻗었으나, 입술 사이로는 붉은 피거품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동자 너머로, 이사장실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