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洛陽)의 밤하늘은 이미 칠흑의 어둠 대신 피비린내 나는 자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나무 숲길의 타버린 재를 밟고 성을 향해 질주하는 위백의 가슴팍에는 붉은 낙인 같은 화독(火毒)이 살아 움직이는 지네처럼 꿈틀거리며 심장을 옥죄어 왔다. 철검우의 원혼이 남긴 피맺힌 한이 뇌리를 사정없이 후벼 파는 환청이 이명처럼 울렸다. 머리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양의 열감이 안구를 붉게 물들였으나, 그의 입가에 걸린 조소는 오히려 더 깊고 푸르게 가라앉았다.
가당치도 않은 천도(天道)를 부르짖는 자들의 위선이 저 도심 한복판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위헌의 첫째 애제자이자 위가의 차기 돌격대장인 기우성이 청운검파의 무고한 가솔들을 인질로 잡고 백성들 앞에서 처형을 시작했다는 비보. 그것은 위백의 끊어진 기맥을 다시금 분노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한 불씨였다.
반각이 채 지나지 않아 당도한 낙양 중앙 광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도가니였다.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석조 기둥들마다 밧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끝에 목이 매달린 채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이들은 장성한 무인이 아니었다. 철검우의 이름을 성으로 쓰는 청운검파의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의 발밑에는 마른 장작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횃불을 든 위가의 사수들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무림의 대의를 배신하고 사파와 내통한 역적 철검우의 말로다!"
단상 위에 우뚝 선 기우성이 우렁찬 목소리로 사방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의 백색 장포는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으나, 그 장포 아래 숨겨진 살기는 뱀의 혓바닥처럼 음습했다.
"정파의 명예를 더럽히고 흑월맹의 끄나풀이 되어 낙양의 평화를 깨뜨리려 한 청운검파의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다! 오늘 본가는 무림맹의 권한을 위임받아, 이 추악한 배신자들의 씨를 말려 천하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한다!"
그의 목소리가 광장에 웅성거리는 백성들과 하급 무인들의 귀를 때렸다. 정파의 명분이라는 거대한 방패막이 앞에, 사람들은 감히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억울한 눈물이 부녀자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마른 장작을 적셨으나, 기우성의 얼굴에는 오직 잔인한 만족감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가소롭구나."
광장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군중의 뒤편에서 들려온 차디찬 비웃음이었다.
사방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홍포를 휘날리며 걸어 나오는 청년의 전신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극양의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백이었다. 그의 두 눈은 붉은 신광을 뿜어내며 기우성의 위선적인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기우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위백! 가문의 수치이자 배신자 놈이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네놈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모습을 드러내느냐!"
"정의를 입에 담는 주둥이에서 썩은 송장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기우성."
위백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품속에서 검게 그을린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붉은 낙인이 찍힌 서찰 한 장을 꺼내 허공에 펼쳐 보였다. 그것은 청풍오결의 품에서 회수한, 소천우와 무림맹 사이의 추악한 거래가 적힌 '피의 부채' 서찰 사본이었다.
"이것이 너희가 말하는 대의의 실체더냐? 청운검파를 빚더미에 앉혀 숨통을 조이고, 사파와의 밀약을 은폐하기 위해 무고한 가솔들의 목을 매다는 것. 그것이 위헌 늙은이가 가르친 정파의 도리더냐?"
서찰의 실체를 알아본 기우성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 헛소리로 군중을 현혹하려 들지 마라! 역적의 손에 들린 종이쪼가리가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여봐라, 당장 저 배신자 놈과 역적 무리들을 한꺼번에 불태워라!"
기우성의 명령과 동시에 사수들이 일제히 횃불을 장작더미로 던지려 했다. 그와 동시에 기우성이 소매를 휘두르자, 석조 기둥을 감싸고 있던 기운이 폭발하며 거대한 돌풍이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석풍(石風)과 함께 주위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음공의 여파였다.
쿠구구구둥―!
무너져 내리는 석조 기둥의 파편과 맹렬한 불길이 공황에 빠진 청운검파 가솔들을 덮치려 했다. 비명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 순간, 위백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피를 흘리는 가솔들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무형의 기검을 펼쳐 기우성을 베어 넘기는 대신, 자신의 온몸을 방패로 삼아 날아드는 파편과 폭풍을 받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앙!
날카로운 돌 파편들이 위백의 어깨와 가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의 기경팔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입가에서 뜨거운 양강의 선혈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적색의 피가 대리석 바닥을 붉게 적셨으나, 위백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기괴할 정도로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크하하핫! 고작 이 정도의 위선에 무릎을 꿇을 성싶으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위백이 토해내는 극양의 진기는 거대한 장막이 되어 청운검파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온전히 감싸 안았다. 광풍이 그의 육체를 때릴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의 눈동자에 깃든 아집은 더욱 단단해질 뿐이었다.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무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저 자는 가문의 배신자가 아니던가……?" "어찌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역적이라 불리는 자들을 지키려 한단 말인가……."
정파의 무인이라 자처하며 칼자루를 쥐고 있던 자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사악한 마두라 낙인찍힌 위백이 보여주는 불굴의 의기 앞에서, 무림맹의 깃발 아래 숨어 있던 자신들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침묵은 이내 가슴을 찌르는 무언의 참회로 변해 광장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위백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흐느낌과 가솔들의 억울한 숨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내부에서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단순히 단전에 공력을 쌓아 올리고 경지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구양신공의 진정한 심오함에 닿을 수 없었다. 기경인과(奇經因果). 그것은 세상의 가장 어둡고 부조리한 구석에서 짓밟히는 자들의 '부서진 마음'을 자신의 부서진 심장과 완전히 동조시키는 일이었다. 저들의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살아남고자 하는 처절한 열망이 위백의 가슴속에 새겨진 철검우의 원혼과 격동하며 흐트러진 기맥을 하나로 꿰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군. 인과란 단순히 원한을 갚아주는 대행이 아니다. 저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삼아, 천하의 불합리함을 온몸으로 부수어 내는 도리다.'
우우웅―!
위백의 단전 깊은 곳에서 정양화된 극양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가슴을 짓누르던 화독의 낙인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식어 내리며, 기경팔맥의 모든 봉인이 완전히 풀려나갔다. 구양진기 제3경의 힘이 온전하게 그의 주먹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기우성은 위백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신광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위기감을 느낀 기우성이 다급히 손을 뻗어 비장의 마공을 펼치려 했다. 그의 손끝에서 검붉은 음공의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위헌이 위백에게서 빼앗은 영맥을 바탕으로 완성하려던 불완전한 마공의 편린이었다. 그러나 그 기운의 밑바닥에는 불안정한 주화입마의 징후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슴팍에 남은 조소 섞인 불완전함이 그의 기운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 위백!"
기우성이 광포하게 마공을 내뿜으려는 찰나였다.
위백은 단 한 걸음만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스스슥―.
공간을 접어 달리는 듯한 무형의 신법이 펼쳐졌고, 기우성의 눈앞에 위백의 붉은 눈동자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기우성이 비장의 마공을 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너의 정의는 이 주먹 하나만큼의 무게도 되지 않는다."
콰아아앙!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위백의 붉디붉은 주먹이 기우성의 명치를 그대로 관통했다.
"억……!"
기우성의 비명이 목구멍 안에서 턱 하고 막혔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위백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극양의 진기가 기우성의 전신을 안에서부터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뼈와 살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양염(陽炎)의 불꽃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가, 가주님…… 어찌하여……."
기우성은 자신이 그토록 숭상하던 가문의 허구적인 힘이 구양의 불꽃 앞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끝내 말을 맺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굳어버렸다. 주먹을 거두자, 그의 시체는 바닥에 고꾸라지기도 전에 허무하게 바스러져 광장의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지독한 침묵이 광장을 지배했다. 위가의 차기 돌격대장이 단 한 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광경은, 모여 있던 모든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경악을 안겨주었다. 위백은 붉게 물든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쓰디쓴 냉소를 지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음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타다다닥!
광장 사방의 지붕과 골목에서 서슬 퍼런 검기를 뿜어내는 무인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다. 청색의 장포를 입고 차가운 철검을 쥔 자들. 무림맹 소속의 정예 집행단인 묵영대와 청운검파의 검진이 광장을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검진의 선두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소천우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청련검은 밤하늘의 달빛을 받아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고 있었으나, 검을 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에는 차마 흘리지 못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위백."
소천우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쇳소리처럼 무거웠다. 문파의 생존을 위해 온갖 수치와 굴종을 견뎌왔던 그였으나, 자신의 눈앞에서 가문의 가솔들이 인질이 되고, 끝내 무림맹의 이름 아래 동문들이 참살당하는 비극을 막지 못한 자괴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림맹의 집행단을 이끄는 선두에 서서 위백을 향해 검끝을 겨누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짊어진 청운검파라는 무거운 족쇄의 운명이었다.
"너를 베지 않으면, 청운검파의 남은 이들은 모두 무림맹의 칼날 아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소천우의 충혈된 눈에서 마침내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검끝이 위백의 목을 정확히 가리켰다.
"나의 검을 받아라, 위백."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천우의 푸른 검기와, 전신에 붉은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위백의 극양진기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또 다른 비장한 은원의 서막이 낙양의 밤하늘 아래 거칠게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