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문을 탈출하여 소민을 안전지에 피신시킨 위백의 가슴속 깊은 구양의 영맥에서 청운검파의 비장이 가물거리며 돌연 붉은 피가 역류해 목구멍을 채운다.

"커흑……!"

울컥 쏟아진 선혈이 황량한 고찰의 흙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낙양의 추격대를 따돌리고 청운산 자락의 퇴락한 불당으로 숨어든 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사방을 에워싼 어둠은 칠흑처럼 무거웠고, 깨진 불상 사이로 스며드는 야풍은 뼈를 깎을 듯이 차가웠다.

그러나 위백의 체내에서 휘몰아치는 기운은 빙하가 아니라 용암이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 통제되지 않은 채 날뛰는 극양지독(極陽之毒)이 심장을 옥죄어 올 때마다, 기경팔맥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팽창했다. 제 살을 태우는 듯한 극통 속에서도 위백의 입꼬리는 기괴하게 치켜올라갔다. 가문의 조소 섞인 배신이 남긴 비틀린 냉소가 그의 안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깟 독기로 나를 꺾겠다고…… 위헌, 네놈이 끊어놓은 내 명줄이 이리도 끈질기게 요동치는구나."

위백이 거칠게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불당 안쪽, 희미하게 타오르는 화로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소철의 누이, 소민이었다. 뇌향루의 지옥 같은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진 그녀는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위백은 품속에서 흙먼지가 묻은 자그마한 비단 주머니를 꺼내 놓았다. 소철이 마지막 숨을 거두며 위백의 단전 속에 영혼으로 깃들기 직전, 누이에게 전해 달라며 피눈물로 애원했던 유산이었다. 주머니가 열리자 그 안에서 빛바랜 나무 빗 하나와 이가 빠진 흙인형이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소민의 메마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기어가듯 다가와 흙인형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어릴 적, 가난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낙양의 뒷골목을 누비던 시절 오라비 소철이 손수 깎아 선물해 주었던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어찌하여 이 물건을……."

"소철은 죽었소."

위백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기에는 그의 영혼이 이미 너무 많은 가식과 배신으로 문드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위씨 가문의 방계 무인들에게 속아 기루에 팔렸고, 그대의 오라비는 누명을 쓴 채 망향곡의 시체 구덩이에 던져졌소. 이 물건은 그가 저승의 길목에 서서도 품에 안고 있던 마지막 미련이오."

"아아……!"

소민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억울하게 떠난 오라비에 대한 사무치는 슬픔이자,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정을 파탄 냈다는 참회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흙인형을 가슴에 품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제가 미련했습니다. 가문의 감언이설에 속아 오라버니를 사지로 몰아넣고, 이 모진 목숨만을 부지하려 했다니…… 오라버니, 소민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통곡하는 소민의 모습 위로, 위백의 단전 속에 웅크리고 있던 소철의 원혼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쥐 한 마리에도 비명을 지르며 숨던 겁쟁이 원혼이, 누이의 참회 섞인 오열을 마주하자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피눈물로 얼룩졌던 원혼의 얼굴이 서서히 맑은 백색의 빛으로 화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위백의 단전에서 뇌성벽력 같은 진동이 일어났다.

쿵―!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고동과 함께, 위백의 기경팔맥을 가로막고 있던 가느다란 가시도 독기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자(死者)의 한이 풀리고 인과가 완성되는 찰나, 구양신공의 봉인이 한 꺼풀 벗겨진 것이다.

[기경인과(奇經因果)의 법도가 성취되어, 첫 번째 인과의 쇠사슬이 풀리도다.]

귓가를 때리는 환청과 함께, 위백의 전신에서 찬란한 황금빛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구양신공 제2경(第二境)의 해금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위백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체내에 잔류해 있던 차가운 가사도 독기와 가문 무인들이 심어놓았던 음습한 기운들이, 새로이 해금된 구양진기의 맹렬한 불꽃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연소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피부의 모공을 통해 검은 진액과 함께 탁한 독기가 수증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단전 아래 막혀 있던 기맥들이 대로(大路)처럼 넓어지고, 뼈와 근육이 황금빛 진기로 채워지며 강인하게 재구성되었다. 끊어졌던 영맥의 일부가 완전히 융합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성장이 아니었다. 인과를 대속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천도를 참칭하는 자들을 징벌할 절대적 양강(陽剛)의 성취였다.

"후우……."

위백이 길게 숨을 내쉬자, 입안에서 붉은 피 대신 맑은 백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을 짓누르던 피로와 독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손끝 하나하나에 대지를 부술 듯한 폭발적인 힘이 깃들었다.

오열을 멈춘 소민은 넋을 잃은 눈으로 위백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 갚을 필요 없소. 나는 그저 내 계약을 이행했을 뿐이니."

위백은 차갑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절의 주지 스님에게 내 가솔들이 매달 시주를 올리도록 조치해 두었소. 이곳에 머무는 한, 위씨 가문의 마수는 닿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살아남으시오. 죽은 자의 한을 짊어진 채 구차하게라도 연명하는 것이, 그대가 오라비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요."

냉혹한 조언을 남긴 채, 위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소민이 다시금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 *

고찰을 벗어나 밤의 장막이 깊게 내려앉은 낙양의 외곽 거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사방은 고요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로 적막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나지막한 콧노래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흐흥, 흥……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위백의 눈동자가 가느다라해졌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가시덤불 위, 흑의를 걸친 여인이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흑월맹의 여장(女掌), 조여경이었다. 그녀는 발밑에 뒹구는 이름 모를 들고양이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가죽신 굽으로 짓밟아 뭉개면서도,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네년이군."

위백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자루로 향했다. 그러나 조여경은 개의치 않고 허공을 사뿐히 걸어 내리듯 위백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정체불명의 매혹적인 분향과 비린내 나는 혈향이 위백의 코끝을 자극했다.

"어찌 그리 차갑게 대하십니까? 저는 도련님이 사자의 한을 풀고 구양의 두 번째 경지에 오르는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이 터질 듯한 희열을 느꼈는걸요."

그녀의 손가락이 위백의 가슴팍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스스로를 불사르는 그 파멸적인 기질, 정파 놈들의 가식적인 군자연(君子然)과는 궤를 달리하는 그 비틀린 고결함…… 정말이지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군요."

"손치워라. 더러운 사파의 기운이 닿으면 당장 베어버리겠다."

"어머나, 무서워라."

조여경은 생긋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 서린 광기 어린 집착은 더욱 짙어졌다.

"도련님의 그 타오르는 심장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도련님을 갉아먹는 독이기도 하지요. 인과의 고리를 완성할 때마다 강해지겠지만, 그 기한을 채우지 못하면 구양의 극양지독이 도련님의 영혼까지 태워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준비했답니다."

그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툭 던졌다.

탁.

위백이 반사적으로 받아쥔 것은 푸른빛이 감도는 기이한 옥고리였다. 한옥 마정고리(寒玉魔晶環).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전신을 불태우던 구양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진정되며 머리가 맑아지는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흑월맹의 비보이자 극음의 기운을 담은 영물이었다.

"그것이 도련님의 이성을 붙들어 매어 줄 훌륭한 흡열의 도구가 될지, 아니면 도련님을 더 깊은 마도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지옥의 밧줄이 될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부디 쉽게 죽지 마셔요, 위백 도련님."

조여경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남긴 채, 신형을 흐트러뜨리며 소리 없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서늘한 음기와 한옥 마정고리만이 남아 위백의 손바닥을 식혀주고 있었다.

위백은 마정고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파의 물건이라 하여 버리기에는, 그의 체내에서 날뛰는 극양의 독기를 제어하는 데 이보다 더한 명약이 없었다.

"이율배반(二律背反)이군. 사파의 독물(毒物)로 정파의 독기를 누른다라……."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위백은 마정고리를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청운검파(靑雲劍派)가 있는 청운산이었다.

* * *

청운산으로 향하는 가도에 위치한 작은 주막.

위백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주막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막 안은 무림맹의 표식을 단 무인들과 행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위백의 귀를 자극하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쯧쯧, 청운검파의 소천우 그 젊은 천재도 결국 무림맹의 개가 될 팔자인가 보더군."

"무슨 소린가? 청운검파라면 낙양 인근에서 가장 의기 있는 문파가 아니었나?"

"의기가 밥 먹여 주나? 무림맹 순찰사들이 낙양 위가의 사주를 받아 청운검파의 목줄을 죄고 있네. 문파의 존립을 빌미로 온갖 불합리한 세금을 부과하고, 이번에는 사파의 흑월맹과의 분쟁 지역인 야수곡(野獸谷)으로 청운검파의 정예들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더군."

"허어, 그것은 사지로 가라는 소리가 아닌가?"

"사실상 토사구팽이지. 소천우가 제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한들, 문파의 존립을 위해 맹의 추악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검을 쥐고 있다네."

위백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림맹. 겉으로는 강호의 평화와 대의를 부르짖으며 약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낙양 위가와 같은 거대 가문의 사주를 받아 약소 문파의 고혈을 짜내고 사지로 내모는 위선자들의 집단에 불과했다. 소천우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정파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고작 저들의 더러운 구두굽 아래서 짓밟히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소를 자아냈다.

"소천우, 네놈이 짊어진 그 의기라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깃털이었는지 똑똑히 보아라."

위백은 차갑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과의 실타래가 청운검파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곳에 도사린 무림맹의 위선을 분쇄하는 것 역시 그가 걸어야 할 구양의 길이었다.

* * *

터벅, 터벅.

청운산 초입으로 향하는 호젓한 산길. 장마가 시작되려는 듯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워 대낮임에도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숲속에서는 기분 나쁜 산새들의 울음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철썩!

"으아악! 살려주십시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닥쳐라, 이 천한 것들이! 최근 이 길을 지나간 독행무사(獨行武士)가 없었단 말이냐! 위백이라는 놈의 행방을 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네놈들의 목을 쳐서 나무에 걸겠다!"

위백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길목에는 낙양 위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백의를 입은 무인들과, 무림맹 소속 가문의 추적대 수십 명이 평범한 행상인들과 약초꾼들을 무릎 꿇려 놓고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이미 몇몇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공무(公務)를 방해하는 자는 사파의 첩자로 간주해 즉참(卽斬)하겠다! 어서 말해라!"

추적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흉터 많은 무인이 시퍼런 칼날을 치켜들며 어린 약초꾼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약초꾼은 공포에 질려 눈물콧물을 쏟아내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정파의 무인들이, 자신을 잡겠다는 명분 하에 무고한 민초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듯 가볍게 여기는 현장.

위백의 눈동자 속에 들불 같은 구양의 진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봉인 해제된 제2경의 기운이 요동치며, 위선자들의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위백은 모자를 벗어 던지며 천천히 숲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입가에는 세상을 향한 지독한 조소와 함께, 자멸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냉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개의 무리가 주인을 찾아 짖어대더니, 결국 엉뚱한 양을 물어뜯고 있었군."

그의 목소리가 산울림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추적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백을 향해 쏠렸다.

"누구냐!"

"위백이다."

위백이 검자루를 잡은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챙― 하는 맑은 검명이 고요한 산길을 흔들었다.

과연 위백은 무림맹의 가면을 쓴 추적자들을 참살하고 청운검파의 비장한 소용돌이 속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신형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며, 황금빛 구양의 신광이 어두운 숲을 대낮처럼 밝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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