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마저 질식할 듯한 무거운 침묵이 뇌향루(雷香樓)의 기와지붕 위를 짓눌렀다.
붉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피비린내 속에서, 조여경이 소리 없이 몸을 날려 위백의 등 뒤로 가볍게 밀착했다. 뱀처럼 매끄럽고 서늘한 기운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여인의 붉은 입술이 귓가에 닿을 듯 다가왔다.
"어머, 위백 도련님. 저기 넋이 나간 청련(靑蓮)의 후기지수를 좀 보셔요. 명문가의 대의를 부르짖던 검끝이 저리도 처량하게 꺾였으니, 지금 저 가슴팍에 뜨거운 양강의 진기를 박아 넣는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핏빛 꽃이 피어나지 않겠어요? 저 맑은 눈망울이 절망으로 물드는 꼴을 받아들이셔요."
잔혹한 조소가 섞인 속삭임은 귀를 간지럽히는 유혹이었으나, 위백의 심장은 그보다 더한 지옥의 불길로 요동치고 있었다.
"으윽……!"
소민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지체된 대가, 기경인과(奇經因果)의 가혹한 족쇄인 극양지독(極陽之毒)이 이미 그의 맥로를 타고 잔혹하게 날뛰는 중이었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검은 양염(陽炎)의 무늬가 턱끝을 지나 뺨까지 타올랐다. 뼈와 살이 끓는 물에 녹아내리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엄습했으나, 위백은 이빨을 악물며 기괴한 조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의 시선이 가로막힌 검망 너머,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소천우에게 닿았다.
소천우는 한 줄기 선혈을 입가로 흘리면서도,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낙락장송처럼 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청청한 의기를 증명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백검(白劍)의 검기가 흔들리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투지를 불태웠다. 맹의 배신이라는 처절한 절망 앞에서도, 그는 명문가 청운검파의 자존심을 꺾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사파의 마녀여, 혓바닥이 참으로 길구나."
위백이 차갑게 읊조렸다. 조여경은 제 뜻대로 위백이 움직이리라 믿고 요염한 미소를 더 깊게 지었으나, 다음 순간 그녀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
위백이 거칠게 어깨를 털어내며 조여경을 짐짝처럼 밀쳐낸 까닭이었다.
"엇……!"
무방비하게 밀려난 조여경의 신형이 기와 위를 몇 걸음 어지럽게 굴렀다. 그녀의 고결하고 오만한 흑색 비단 자락이 흙먼지에 더러워졌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타래가 보기 좋게 흐트러졌다. 언제나 남의 머리 위에서 장난질을 치던 흑월맹의 마녀가 받아본 적 없는 노골적인 멸시였다.
"요망한 년. 네년의 얄팍한 사술에 놀아날 위백이 아니다. 정파의 위선이 가증스럽다면, 그것을 내 손으로 부수면 그뿐. 사파의 썩은 동아줄을 잡고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위백의 음성은 쇠가 부딪치는 듯 냉혹했다. 조여경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벼락 같은 살기가 스쳤으나, 이내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하, 참으로 재미없는 사내로군요. 이 호의를 이리도 무참히 짓밟으시다니."
그 순간, 무림맹 묵영대의 수석, 장 한필이 검을 치켜들었다.
" 허튼수작은 거기까지다! 맹의 엄포를 어긴 자들에게는 오직 참수만이 있을 뿐!"
장 한필의 청강검이 허공을 가르자, 사방을 메우고 있던 수십 명의 살수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멸절의 검풍이 뇌향루의 지붕을 통째로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쏟아졌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검은 그림자들은 마치 굶주린 아귀떼와 같았다.
위백은 품에 안긴 소민의 체온을 느꼈다. 기절한 아이의 숨소리가 그의 가슴팍에 닿을 때마다, 기경에 새겨진 소철의 원한이 마지막 요동을 치고 있었다. 누이를 구원하라는 죽은 자의 절규가 구양신공의 진기를 공명시켰다.
"소천우!"
위백이 도약하기 직전, 소천우를 향해 가차 없는 일침을 내던졌다.
"네놈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그 붉은 인장의 서찰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문파를 살리겠다는 구차한 명분 아래, 무림맹의 가당치도 않은 '독식 전령서'를 품고 맹목적으로 기어 다니는 꼴이라니! 그것은 충의가 아니라, 주인이 던져준 독이 든 뼈다귀를 빠는 맹견의 짓거리에 불과하다!"
소천우의 눈동자가 대번에 크게 흔들렸다.
그의 품속, 겉장마저 붉은 주사로 봉인된 무림맹의 극비 전령서. 그것은 무림맹 본회가 낙양 위가 뒤편에 숨겨진 추악한 영맥 갈취와 이권 사업을 은폐하기 위해, 일개 약소 문파에 불과한 청운검파를 고기방패이자 소모품으로 내던지겠다는 잔인한 음모의 증거였다. 청운검파의 존립을 위해 온갖 더러운 청탁을 짊어져 온 소천우였으나, 자신이 지키려 했던 맹의 대의가 결국 제 문파의 피를 짜내어 위가의 배를 불리는 도구였음을 깨닫는 순간, 그의 영혼은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네놈들이 말하는 군자의 도리란, 결국 약자의 고혈을 짜내어 강자의 가식을 치장하는 비단옷일 뿐이다! 이리도 썩어문드러진 판에서 무슨 검을 논하고 의를 바란단 말이냐!"
위백의 일갈은 대지를 짓누르는 천둥과 같았다.
"크윽……!"
소천우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위백의 비정하고도 정확한 폭로는 그의 심장에 박히는 비수보다 더 아프게 폐부를 찔렀다.
"모두 비켜라!"
위백이 포효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잠자던 구양의 극양진기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것은 단순한 내력의 분출이 아니었다. 동해의 붉은 해가 대지를 불사르며 솟구치듯, 장엄하고 파멸적인 열기가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구궁!
위백이 양손을 뻗어 허공을 내리치자, 뇌향루의 기와지붕이 붉은 화염의 장막에 휩싸이며 통째로 뜯겨 나갔다. 검붉은 열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묵영대 살수들의 검망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살수들의 비명과 함께 타오르는 기와 파편들이 폭포수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고수낙엽(枯樹落葉)이 따로 없구나! 이 위선의 잔치판은 너희끼리 더럽게 치러라!"
위백은 소민을 단단히 안아 올린 채, 대기를 딛고 도약했다. 그의 신형은 붉은 유성처럼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포위망을 돌파해 나갔다.
"추적하라!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장 한필이 격분하여 소리쳤으나, 소천우의 백검이 돌연 청청한 검기를 뿜으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가지 못합니다."
소천우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듯한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비록 맹의 배신에 심장이 찢어질지언정, 무고한 아이를 데리고 탈출하는 위백의 뒤를 쫓게 둘 수는 없다는, 그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의협의 편편(碎片)이었다.
"이놈이 미쳤구나! 청운검파를 멸문지화로 이끌 셈이냐!"
장 한필의 노효와 함께 묵영대의 검날이 소천우를 향해 쏟아졌고, 소천우는 한 자루 백검으로 그 무시무시한 폭풍을 홀로 받아내기 시작했다.
* * *
쉬이익!
낙양 외곽을 둘러싼 울창한 대나무 숲. 자욱한 밤안개를 가르며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대나무 우듬지를 밟고 번개처럼 하강했다.
쿵.
위백은 땅을 딛자마자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품에 안긴 소민은 깊은 혼절 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다행히 외상은 없었다. 주위의 인적 없는 음침한 천연 동굴을 발견한 위백은 신속하게 안으로 들어가 소민을 마른 짚단 위에 눕혔다.
"……소철, 네놈의 누이는 구했다."
위백이 가슴을 움켜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단전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소철의 영혼이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깊은 안식으로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억울한 원한의 인과가 해소되는 순간, 위백의 기경을 떠돌던 구양진기의 첫 번째 단계가 비로소 온전하게 해금되며 그의 부러진 영맥들이 기적처럼 결합하기 시작했다. 끊어졌던 기맥이 이어지고, 대자연의 정양이 단전으로 흡수되는 감각은 가히 천지를 개벽할 만한 성취였다.
그러나 기연의 대가는 이토록 빠르고 가혹하게 찾아오는 법인가.
"끄으윽……!"
돌연 위백의 전신이 격렬하게 떨렸다.
뇌향루에서 마주했던 소천우의 비장한 눈빛, 그리고 그가 품고 있던 무림맹의 더러운 음모의 편린들이 위백의 뇌리를 사정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기경인과의 구양신공이 가진 잔인한 제약—타인의 고통과 심마를 고스란히 뇌리로 분담해야 하는 영적 충격이 그의 이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멸문 위기에 처한 청운검파의 비장무참한 기운이, 마치 실타래처럼 위백의 영맥을 감싸 안으며 억지로 새로운 인과의 고리를 엮으려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가슴속 깊은 곳, 새로이 통로를 넓힌 구양의 영맥에서 청운검파의 푸른 비장(悲壯)이 가물거리며 공명했다. 그와 동시에 혈관을 타고 흐르던 뜨거운 극양의 진기가 순식간에 역류했다.
"화, 활……!"
위백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억누를 길 없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찢고 올라왔다. 그의 목구멍을 타고 검붉은 선혈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타오르는 피가 동굴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의 눈앞이 붉은 핏빛으로 번져가는 가운데,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양염의 무늬가 마치 살아 숨 쉬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심장을 향해 한 걸음 더 조여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과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극양지독이 영혼까지 태워버릴 것이라는, 가혹한 죽음의 경고였다.
"우, 우윽……! 흐윽……!"
단전의 심연에서 겁에 질린 소철의 영혼이 쥐새끼처럼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누이를 구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위백의 육신을 덮친 미증유의 고통에 혼비백산하여 울부짖는 꼴이었다.
위백은 으스러져라 어금니를 맞물렸다. 잇새로 흘러나온 붉은 침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짚단을 적셨다. 가문의 추악한 배신으로 기맥이 한 차례 끊겼을 때의 절망에 비한다면, 이까짓 육신의 불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머릿속을 사정없이 헤집는 소천우의 비장한 심상과 청운검파의 피맺힌 채무의 고통은 영혼을 도끼로 찍어 내리는 듯한 참혹한 자극이었다.
"하…… 하하! 고작…… 이 정도로 나를 꺾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위백은 기괴한 조소를 터뜨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손끝이 피로 물들었으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광기로 번뜩였다. 스스로를 불사르는 양강(陽剛)의 아집이 고통을 집어삼키며 억지로 구양의 진기를 진정시키려 요동쳤다.
스스스스―.
그 비장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동굴 입구를 가득 메운 밤안개 사이로 들려오는 극히 미세한 옷자락 스치는 소리였다.
위백의 고개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젖은 안개 속에서 한 서린 음영을 드리우며 걸어 나오는 자가 있었다. 검은 장포의 자락을 가볍게 휘날리며, 입가에 잔혹하고도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여인.
조여경이었다.
"어머나, 위백 도련님. 뇌향루에서는 그리도 당당하게 저를 밀쳐내시더니, 이 음침한 굴 속에 처박혀 피를 토하는 꼴이 제법 볼만하군요."
그녀는 발밑에 뒹구는 썩은 나뭇가지를 가죽 구두 굽으로 잔인하게 짓밟아 뭉개며 다가왔다. 입으로는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으나, 그녀의 흑색 눈동자는 위백의 목덜미에 피어오른 검은 양염의 무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정파 놈들의 가식적인 위선에 구역질이 나신다더니, 정작 도련님 본인의 몸뚱이도 그 위선자들의 한 맺힌 은원에 묶여 타들어 가고 있군요. 참으로 기형적이고도 아름다운 모순이에요."
"……꺼져라."
위백이 살기를 띤 음성으로 뱉어냈다. 당장이라도 구양진기를 끌어올려 그녀의 가슴팍을 꿰뚫고 싶었으나, 내력이 요동칠 때마다 심장이 끓는 물에 삶아지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손가락 끝 하나 까딱하기 힘든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조여경은 위백의 살기 서린 일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서 은은한 분향과 서늘한 기운이 동시에 풍겨 나왔다.
"그리 매정하게 굴지 마셔요. 저는 위선으로 가득 찬 정파 놈들과는 다르답니다. 스스로를 불사르는 도련님의 그 비장한 면상이 기특해서, 특별히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달빛 아래,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 차갑게 빛나는 물건이 떨어져 내렸다.
탁.
위백의 무릎 기슭에 떨어진 것은 푸른빛이 감도는 기이한 옥고리였다. 한옥 마정고리(寒玉魔晶環). 겉보기에는 평범한 장신구 같았으나, 그것이 땅에 닿는 순간 동굴 내부의 후끈한 열기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 서늘한 한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흑월맹의 비보 중 하나인 한옥 마정고리예요. 도련님의 그 타오르는 심장을 식혀줄 아주 훌륭한 흡열(吸熱)의 도구지요. 물론, 공짜는 아니랍니다."
조여경이 생긋 웃으며 속삭였다.
"그것이 도련님의 이성을 붙들어 매어 줄지, 아니면 도련님을 더 깊은 마도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지…… 나는 참으로 기대가 되거든요. 부디 쉽게 죽지 마셔요, 위백 도련님."
말을 마친 조여경은 신형을 흐트러뜨리며 소리 없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남긴 서늘한 기운만이 한옥 마정고리를 타고 위백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기이하게도 마정고리를 쥐자마자 날뛰던 극양의 폭주가 미세하게 억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었다.
스스스스―! 바스락!
멀지 않은 대나무 숲에서 수십 명의 발자국 소리가 낙엽을 밟으며 좁혀오고 있었다. 살기 어린 청강검들의 검풍이 공기를 찢는 소리, 그리고 그 선두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청한 백검의 기운.
소천우였다.
그는 무림맹 묵영대의 추격을 뿌리치거나 혹은 그들과의 기이한 합의 끝에, 결국 위백의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 분명했다. 맹의 더러운 음모의 전령서를 품은 채, 자신의 신념과 문파의 존립 사이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검끝을 바로 세운 소천우의 기세가 동굴 입구를 압박해 왔다.
"위백……! 그곳에 있는가!"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소천우의 비장한 외침이 동굴 벽을 흔들었다.
위백은 한 손으로는 한옥 마정고리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타오르는 가슴을 짓눌렀다. 단전 속 소철의 원혼은 다시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목구멍에서는 아직 채 뱉어내지 못한 핏덩이가 뜨겁게 역류하고 있었다.
과연 위백은 이 가혹한 내우외환의 극통 속에서, 자신을 쫓아온 소천우의 백검을 꺾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가슴속 극양지독에 심장이 먼저 타버려 이 어두운 동굴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