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직, 치지직!
살을 에는 이명(耳鳴)과 함께 사방의 바위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체 독벌레들의 검붉은 파도가 어두운 지하궁의 바닥을 가득 메웠다. 억겁의 세월 동안 음습한 지열을 먹고 자란 벌레들의 아가리에서는 쇠마저 녹일 듯한 끈적한 점액질이 흘러내렸고, 그들이 내뿜는 고약한 독기는 지하시실의 공기마저 납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그 어떤 독충의 위협보다도 더욱 가혹한 파멸의 징조가 위백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커헉……! 으으윽!"
위백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은 채 식기도 전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를 피워 올리며 기화했다. 가슴팍의 옷자락을 찢고 드러난 살갗 위에는, 기이하게 일렁이는 검은 양염(陽焰)의 무늬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지옥의 사슬처럼 꿈틀거리며 심장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약속된 시한 내에 철검우의 피 맺힌 원한을 갚지 못해 초래된 구양지독(極陽之毒)의 본격적인 침식이었다.
기경인과의 굴레는 참으로 비정하고도 무거웠다. 타인의 한을 대속하여 기맥을 소생시킨 대가는, 그 인과의 고리를 완결 짓지 못하는 순간 천하제일의 극양진기를 고스란히 자신의 영혼을 태우는 화독(火毒)으로 변모시켰다. 뼈마디가 쩍쩍 갈라지는 듯한 극통이 전신의 골격을 타고 뇌리를 난타했고, 안구는 용암을 들이부은 듯 붉게 충혈되어 타들어 갔다. 귀청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곡소리와 비명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이성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위…… 위백 형!"
바닥에 엎드러진 채 신념의 붕괴로 피눈물을 흘리던 소천우가, 전신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주저앉은 위백을 바라보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위백의 품에서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한 장의 서찰 사본에 닿았다.
그것은 위백이 청풍오결의 품에서 회수했던, 청운검파의 목줄을 죄고 있던 ‘피의 부채’ 채무 계약서 사본이었다.
"이…… 이것이 어찌하여 그대의 손에……."
소천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원본 서찰의 실체가, 위백이 흘린 사본의 묵향을 통해 완벽히 대조되는 순간이었다. 무림맹이 청운검파를 존립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옭아매고, 사파인 흑월맹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가문의 고혈을 빨아먹던 추악한 밀약의 증거.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가문의 대의가 정녕 한낱 도살장의 고기방석에 불과했다는 진실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크하하핫……! 보았느냐, 소천우?"
위백이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내며 해괴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전신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지독하리만큼 냉소적이었다.
"네놈이 그토록 떳떳하게 고개를 들이밀며 지키려 했던 청운검파의 의기(義氣)라는 것이, 결국 무림맹의 썩은 아귀들이 던져준 개밥바라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네놈들의 고결한 조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자들의 피를 팔아 가짜 군자의 명예를 사들였단 말이다!"
"아아아아아윽-!"
소천우는 가슴을 짓씹으며 대지를 향해 절규했다. 평생을 지탱해 온 검의 길이 무너지고, 신념의 성벽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는 고통은 육신의 상처보다 매서웠다. 가치관이 뿌리째 박살 난 무인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이 청백색 도포를 붉게 적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검을 잡았으며, 무엇을 위해 그 가혹한 굴종을 견뎌냈단 말인가.
그러나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소천우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세차게 솟구쳤다. 비록 평생을 바친 문파의 대의가 허상일지언정, 눈앞에서 가식 없는 분노로 자신들을 일깨워 준 이 사내를 이대로 독충의 밥이 되게 둘 수는 없었다.
스스스스!
수만 마리의 연체 독벌레들이 거대한 장막을 이루며 위백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려는 찰나였다.
스릉-!
맑고 청아한 검鳴이 어두운 지하궁의 적막을 깨뜨렸다.
소천우가 비틀거리면서도 마침내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그의 손에 쥔 청련검이 차가운 은백색의 검광을 내뿜으며 허공을 갈랐다. 가문의 비리를 눈감으라는 무림맹의 압박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세찬 청련의 기상이, 역설적이게도 모든 신념이 파멸한 바로 이 순간 가장 순수하게 타올랐다.
"비록 내 삶이 한낱 기만에 불과했을지라도……."
소천우가 청련검을 비스듬히 눕히며 위백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등 뒤로 몰아치는 독충들의 파도를 향해, 한 자루 검이 거대한 벽이 되어 섰다.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의기만큼은 거짓으로 더럽히지 않겠소!"
휘이이잉-!
소천우의 신형이 한 떨기 푸른 연꽃처럼 피어올랐다. 청운검파의 비전 검법이 지하시실에 몰아치는 폭풍처럼 전개되었다. 푸른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덮쳐오는 연체 독벌레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퍼억! 퍼어억! 독충들이 터져 나가며 뿜어내는 녹색의 점액과 비린 피가 소천우의 전신을 적셨으나, 그의 검끝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직 전방만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갔다.
"크윽……!"
밀려드는 수만 마리의 독충을 홀로 감당하는 것은 자멸에 가까운 짓이었다. 검기를 펼칠 때마다 사락전갈과 연체 독벌레들의 독침이 그의 도포를 뚫고 살을 찔렀고, 살점이 부식해 가는 극통 속에서도 소천우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직 위백을 등 뒤에 두고, 스스로 거대한 고기방패가 되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푸른 검광이 허공에 궤적을 그리며 흩뿌려지는 모습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는 비장한 유성과도 같았다.
그 와중에도 위백의 내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커헉! 끄으으……."
위백은 바닥의 흙을 쥐어뜯으며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구양지독의 화기가 심장과 기맥을 타고 흐르며 온몸의 영맥을 불태웠다. 눈앞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고, 이성의 끈이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뇌리에서 들려왔다. 철검우가 남긴 억울한 원혼의 절규가 가슴속에서 칼날이 되어 심장을 후벼 팠다.
'이대로…… 이대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는가.'
자멸조차 마다하지 않는 파멸적 양강의 아집이 그를 지배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스으윽-!
무너져 내린 석실의 갈라진 바위 틈새,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영역으로부터 한 줄기 기형적이고도 매혹적인 음향이 들려왔다. 콧노래였다. 발밑에 뒹구는 시체와 무너진 잔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죽 구두 굽으로 짓밟으며 뭉개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
조여경이었다.
"어머나, 참 처량하기도 해라. 천하를 다 태워버릴 것 같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한낱 벌레 떼 앞에서 이렇게 뒹굴고 계실까?"
조여경의 입가에 잔인하면서도 흥미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전신이 불타오르는 고통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려 발악하는 위백의 가혹한 투쟁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정파 놈들의 기름진 가식에 환멸을 느끼던 그녀에게, 오직 복수와 아집만으로 스스로를 불사르는 위백의 존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극상의 장난감이이자 소유욕의 대상이었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기엔, 내 장난감이 너무 아깝잖아?"
조여경이 소리 없이 신형을 날려 위백의 곁으로 착지했다. 그녀의 소매 끝에서 은은한 한기가 감도는 검은 보석, 흑월맹의 비보인 '한옥 마정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열기를 흡수하는 특성을 지닌 이 비보는, 조여경이 일전에 위백에게 시험 삼아 넘겨주었던 증표이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 봐. 억지로 버티다간 정말 머리가 깨져 죽을 테니까."
조여경이 한옥 마정고리를 위백의 이마 근처로 가져가며, 자신의 내력인 흑월 비기의 정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웅웅웅-!
마정고리가 푸르스름한 흑빛을 발하며 미친 듯이 진동했다. 마정고리의 차가운 흡인력이 위백의 전신에서 폭주하던 구양의 극양지독과 뇌리를 찢던 심마의 파동을 무섭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얼음 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한 극적인 대비였다.
"아……! 으으……."
위백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붉은 광기가 한풀 꺾이며, 타들어가던 안구의 열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조여경의 마공이 주입된 마정고리가 화독의 폭주를 억누르고, 그의 흐려지던 이성의 실마리를 간신히 붙들어 매어 준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은 기대도 안 해. 대신…… 나중에 더 재미있게 놀아줘야 해?"
조여경이 위백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은 차가웠으나, 위백의 심장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이성의 실마리를 되찾은 바로 그 순간, 위백의 뇌리 속에서 끊겨 버렸던 동생의 궤적과 철검우, 그리고 소철을 비롯한 수많은 사자들의 피맺힌 한이 다시금 선명하게 정렬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쿠르릉-! 쾅! 쾅!
지상에서 치는 거대한 뇌운의 진동이 지하궁 전체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하늘을 찢는 번개의 우레 소리(외뢰, 外雷)가 지하 깊숙한 이곳까지 대지를 타고 전해져 왔다.
동시에 위백의 체내에서는, 억울하게 구천을 떠도는 생령들의 한과 분노가 심마(내마, 內魔)가 되어 용솟음쳤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원혼이 교직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위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고통에 젖어 있지 않았다. 오직 세상을 향한 서릿발 같은 적개심과, 스스로의 아집을 천도로 승화시키겠다는 굳건한 의지만이 서려 있었다.
"하늘은 말이 없고, 대지는 피로 물들었으나……."
위백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찬란한 금빛의 광휘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내 비록 파멸의 길을 걸을지언정, 이 땅에 엎드러진 사자(死者)들의 한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이것이 내가 선택한 천도이며, 내가 관철할 의기(義氣)다!"
우우웅-!
위백의 선언과 함께, 그의 체내에서 잠자고 있던 구양신공 제3층천의 거대한 벽이 마침내 완벽하게 깨어졌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 극양의 진기가 기경팔맥을 타고 폭포수처럼 역류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의 증강이 아니었다. 죽어간 이들의 고뇌를 자신의 피와 살로 온전히 대속하여 이룩한, 인과의 완성이자 진정한 구양의 대성(大成)이었다.
콰아아아아-!
위백의 전신에서 눈부신 금빛 광휘가 폭발했다. 그 찬란한 불꽃은 어두운 지하궁의 벽면을 대낮처럼 밝히다 못해, 사방의 바위와 석실 전체를 녹여버릴 듯한 가공할 열기로 퍼져 나갔다.
"이…… 이것은……!"
전방에서 독충들을 막아내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소천우가 뒤를 돌아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위백은 마치 지상에 하강한 태양의 화신과도 같았다.
치이익! 타다닥!
위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구양진기가 사방으로 파도쳐 나가자, 수만 마리의 연체 독벌레들은 단 한 마디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재 한 줌으로 기화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바닥을 적시던 끈적한 점액질 역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지하궁을 감싸고 있던 해묵은 암반들이 극양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위백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정양(正陽)의 무형기검이 한 줄기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지하궁의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쏘아 올려졌다.
콰아앙-!
하늘을 찌를 듯한 굉음과 함께 천장의 두터운 암반층이 가루가 되어 위로 관통되었다. 지상과 지하를 가로막고 있던 어둠의 장막이 완전히 찢겨 나가며, 지상으로 통하는 거대한 불꽃 구멍이 찬란하게 뚫린 것이었다.
휘이이잉-!
뚫린 구멍 사이로 지상의 차가운 빗방울과 거센 바람이 지하궁의 열기를 식히며 쏟아져 내렸다. 위백은 금빛 기운을 뿜어내며 소천우와 조여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구양진기 제3경은 이제 흔들림 없는 태산과도 같이 견고해져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타타타탁!
뚫린 불꽃 구멍의 가장자리, 지상의 빗줄기 너머로 수많은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도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준하라!"
지상에서 들려오는 서슬 퍼런 외침과 함께, 뚫린 구멍 주위로 차가운 철갑을 두른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무림맹 낙양 위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수백 개의 강철 쇠뇌가 쥐어져 있었다.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쇠뇌의 살촉들이, 일제히 구멍 아래의 위백과 소천우를 향해 빈틈없이 정조준되었다. 쇠뇌를 쥔 군단병들의 중심에서, 낙양 위가의 호위총관이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하를 탈출하려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더욱 거대하고 촘촘한 무림맹의 살진(殺陣)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