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 데이터 래치(Data Latch) 활성화.] [잔여 시간: 02:14.00]
시야 우측 상단에 표시된 붉은색 타이머가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끊임없이 감쇄하기 시작했다. 망막을 때리는 적색 광원은 분당 92회로 안정되어 가던 강서율의 심박수를 순간적으로 142bpm까지 끌어올렸다. 좌측 전두엽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바늘처럼 솟구쳤다. 뇌 신경망에 직접 링크된 에테르의 동기화 모듈이 급격한 전압 변화를 감지하고 경고음을 울렸다.
“하아…….”
헬멧 내부에 고인 이산화탄소의 텁텁한 맛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서율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배수 밸브 하단부의 알루미늄 하우징을 쓸었다. 0.5밀리미터 두께의 얇은 덮개 안쪽에서 미세한 전자 릴레이의 고주파 구동음이 감지되었다.
[UID-7708-THEO]
사제 테오. 그 광신도의 개인 식별 코드가 액정 화면 위에서 비웃듯 깜빡이고 있었다. 단순한 기계적 결함이 아니었다. 이지선다의 수렁을 빠져나왔다고 착각한 순간, 덫의 이중 바닥이 열린 격이었다.
[서율, 현재 데이터 래치의 전자기적 잠금 상태를 분석했습니다.] 귓가에 울리는 에테르의 합성 음성은 여전히 고저가 없었다. 기계적인 차가움이 오히려 서율의 과열된 뉴런을 임시 정류했다. [래치는 동축 케이블을 통해 12구역 상부의 로컬 중계기로부터 실시간으로 난수 암호표를 수신하고 있습니다. 수동으로 하우징을 개방할 시, 내부의 마이크로 가스 압력 신호기가 작동하여 밸브를 강제 개방합니다. 물리적 분리 성공 확률은 0.6% 미만입니다.]
“원격 신호를 직접 차단해야겠군.” 서율은 젖은 이마를 훔치며 툴킷에서 다기능 신호 분석기를 꺼냈다. 분석기의 탐침을 래치의 신호 입력 단자에 밀착시켰다.
철컥.
단자가 맞물리며 분석기 화면에 동축 케이블을 흐르는 고주파 전자기 파형이 그려졌다. 2.4기가헤르츠 대역의 반송파 위에 실린 디지털 패킷들이 초당 120메가비트의 속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형은 정상적인 통신 선로의 형태를 띠지 않았다. 사인파의 정점마다 거친 노이즈가 톱니 모양으로 돋아나 있었다.
[경고: 반송파 왜곡율 42.7%. 무작위 위상 천이(Phase Shift) 감지.] [수신 신호의 디코딩이 불가능합니다. 복조 엔진의 연산 부하가 임계값인 85%에 도달했습니다.]
타이머는 이제 [01:42.15]를 지나고 있었다.
“단순한 암호화가 아니야. 신호 자체를 왜곡시켜서 외부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고 있어.” 서율의 손가락끝이 고정 나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의 떨림이 금속 실린더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테오는 이 래치가 수동으로 해제되는 순간을 트리거로 설정해 두었다. 수리가 완료되는 순간 시스템의 압력 강하를 인지하고, 즉각 자폭 시퀀스를 구동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극단적인 합리성을 역이용한 정교한 고리였다.
[서율, 뇌 신경망의 동기화율을 88%까지 끌어올릴 것을 제안합니다. 제어 권한을 양도한다면 제가 직접 기가헤르츠 대역의 난수 패턴을 역연산하여 래치를 해킹하겠습니다. 단, 이 경우 귀하의 좌측 측두엽 뉴런 소멸 속도가 4.2배 가속됩니다.]
“거절한다.” 서율은 단호하게 답했다. 뇌세포의 영구 손상은 최대 30회라는 루프 한계를 깎아 먹는 독약이다. 이번 루프에서 쓸데없이 자원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에테르, 원격 송신 경로의 원천 주파수를 분석해. 노이즈의 중심 주파수 편차를 소수점 네 자리까지 매핑해라.”
[연산 시작합니다.]
시야에 가득 찬 청색의 연산 그래프들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정렬되기 시작했다. 2.4기가헤르츠 대역의 거대한 스펙트럼 속에서, 서율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특정 대역폭에 주목했다.
노이즈의 지저분한 파형 아래, 마치 모래사장에 묻힌 유리 파편처럼 일정하게 반짝이는 주파수 성분이 있었다.
“기저 대역의 최하단부 필터를 열어.” 서율이 지시했다.
[필터 대역 통과 대역 제한 설정: 10Hz - 100Hz.]
순간, 요란하던 고주파 노이즈가 시각 필터에서 사라지고 극도로 단순화된 저주파 파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일정한 주기를 가진 사인파의 연속이었다.
72.03Hz.
주파수 카운터에 기록된 수치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엔드로피 교단의 통신용 기기들이 발산하는 특유의 위상 동조 신호였다. 빅토르 크론이 소지한 양자 수신 송신기가 방출하는 바로 그 72Hz 대역의 미세 변조 노이즈였다.
“찾았어.” 서율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테오는 12구역의 로컬 제어망을 직접 해킹한 게 아니야. 방주의 주 통신망을 공유하는 광신도들의 양자 송신 주파수를 기생 회선으로 삼아 이 래치에 명령을 내리고 있는 거다.”
[이해했습니다. 해당 주파수 대역의 위상 변조 패턴을 분석, 이전 루프의 의식 로그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합니다. 주파수 식별자: EN-72HZ-SIG. 잔존 로그 보존율 100% 확보.]
메모리 슬롯에 데이터가 기록되는 묵직한 이명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좌측 관자놀이가 욱신거렸지만, 서율은 이를 무시하고 분석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잔여 시간: 00:58.30]
시간이 없었다. 이제 이 신호를 물리적으로 끊어내거나, 아니면 전송되는 데이터 자체를 무력화해야 했다.
치직. 치지직.
그때, 서율의 헬멧 내부 통신 채널에서 날카로운 정전기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여기는…… 엘레나! 12구역…… 보안…… 광신도들의…… 전파 교란…….” 보안대장 엘레나의 쉰 목소리가 찢어질 듯한 잡음 사이로 흘러들었다. 그녀의 목소리 너머로 다급한 발소리와 실탄이 격벽을 때리는 금속성 타격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상황 보고: 12구역 인근 통로에서 보안대 수색팀과 엔드로피 교단 전투원 간의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교단 측은 광대역 전파 방해 장치(Jammer)를 가동하여 보안대의 전술 네트워크를 완전히 무력화했습니다.]
에테르의 전술 지도가 시야 왼쪽에 펼쳐졌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교전 구역이 급속도로 12구역 배수 밸브실을 향해 좁혀들고 있었다. 교단 측은 고출력의 마이크로파 폭격을 통해 보안대의 통신을 먹통으로 만드는 동시에, 서율이 있는 제어실의 문을 잠그려 하고 있었다.
“엘레나의 팀이 고립되면 배수 밸브의 물리적 보안도 끝장이다.” 서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린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에테르, 방주 내의 보조 안테나 중 12-B 아웃렛의 제어권을 강제로 징발해.”
[보안 프로토콜에 의해 거부됩니다. 제어권 확보를 위해서는 연산 자원의 40%를 감염시켜야 합니다.]
“상관없어. 실행해.”
[프로토콜 우회 승인. 12-B 안테나 위상 배열 제어 모듈 접속 완료.]
서율은 분석기 화면에 감지된 적들의 교란 주파수 스펙트럼을 노려보았다. 광신도들이 쏘아 보내는 재밍 신호는 4.87기가헤르츠를 중심으로 하는 고출력 가우스 잡음이었다. 보안대의 전술 무전기는 이 강력한 전파 장벽에 막혀 서로의 신호를 수신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하는 중이었다.
극단적 합리주의자인 서율의 머릿속에서 디지털 연산 회로가 불을 뿜었다. ‘적들의 전파 출력이 높다면, 그 출력을 역으로 이용한다.’
“진폭 평면 동조 변환(Amplitude Plane Co-phase Transformation) 알고리즘을 구동한다.” 서율이 빠르게 명령을 타이핑했다. 그의 손가락은 하우징의 터치패드 위를 스치듯 움직였다. “12-B 안테나의 송신 위상을 정확히 180도 반전시켜. 적들이 방출하는 교란 파형의 피크(Peak)와 정확히 일치하는 트러프(Trough)를 실시간으로 생성한다.”
[진폭 평면 동조 변환 알고리즘 적용 중. 위상 정밀도 오차 범위 0.003% 이내 설정.]
이것은 이론적으로 완벽한 상쇄 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을 만들어내는 기술이었다. 적들이 쏘아 보내는 강력한 교란 에너지가 서율이 역으로 방출하는 반대 위상의 전파와 충돌하는 순간, 두 파동은 서로를 갉아먹으며 0의 상태로 수렴하게 된다.
[알고리즘 가동.]
웅 하는 나지막한 진동음이 12구역 격벽 너머에서 울렸다. 동시에, 분석기 화면에 가득 차 있던 붉은색 교란 노이즈 장벽이 마치 칼로 잘라낸 듯 깨끗하게 가라앉았다.
“어? 무전이…… 다시 들린다! 전 대원, 대형 유지!” 엘레나의 날카로운 명령조가 무전기 너머로 깨끗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사이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광신도들이 사용하는 재밍 기기는 고출력의 전파를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지만, 상쇄 간섭으로 인해 방출된 에너지가 공간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송신기 내부의 도파관(Waveguide)으로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들의 송신 안테나 임피던스 매칭 붕괴.” 서율이 건조하게 읊조렸다. “역류 전류, 150암페어 돌파.”
펑! 펑!
격벽 너머 통로에서 날카로운 전기 폭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광신도들이 짊어지고 있던 휴대용 전파 방해 장치들이 과전류를 버티지 못하고 배터리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적들의 자멸이었다. 자신들이 쏘아 올린 전파의 덫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꼴이었다.
[전술 네트워크 복구 완료. 적 전투원 4명 무력화. 잔여 인원 퇴각 중.]
“해냈군.” 서율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래치의 자폭 타이머는 [00:12.04]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테르, 이제 72Hz 동조 신호를 역이용해 래치의 인증 레지스터에 가짜 완료 신호를 입력한다.”
[알고리즘 연산 완료. 가짜 식별 코드 UID-7708-THEO의 승인 세션을 복제했습니다. 데이터 전송 시작.]
서율은 분석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72.03Hz의 미세 노이즈 위에 실린 수동 완료 플래그가 동축 케이블을 타고 데이터 래치로 흘러 들어갔다.
띠리링.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래치의 붉은 다이오드가 일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녹색의 상시 점등 상태로 전환되었다.
[원격 데이터 래치 잠금 해제. 자폭 시퀀스 강제 종료.] [12구역 배수 밸브 안전 모드 진입.]
“휴…….” 서율의 어깨가 턱 내려앉았다. 헬멧 유리에 맺힌 땀방울이 그의 시야를 흐렸다. 또 한 번의 죽음을 공학적 계산으로 유예시켰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은 길지 않았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엘레나의 다급한 교신음이 서율의 신경을 다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보안대장 엘레나다! 침투한 엔드로피 쥐새끼들은 소탕했다. 하지만 무전망에 상부 통신이 혼선되어 들어오고 있어. 세르게이 지휘관이……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서율은 즉각 자신의 터미널을 방주 내부의 광역 통신 모니터링 채널에 연결했다. 에테르가 실시간으로 음성 파형을 추출하여 텍스트로 변환해 서율의 시야에 띄웠다.
[송신자: 중앙 제어 지휘관 세르게이 알렉세예프] [수신자: 제4구역 격리 통제소]
- “……세라핌 헤븐 구역의 동면 액체 질소 배관에서 원인 불명의 급격한 압력 손실 및 오염 물질 유입이 관측되었다. 이는 전염성 나노 바이러스의 유출 가능성을 시사한다.”
- “하지만 지휘관님, 그곳에는 10만 명의 저온 동면 승조원들이…….”
- “방주 전체의 생존율이 5% 미만으로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다. 사제 테오의 조언에 따르면, 오염 구역을 즉각 우주 공간으로 방출 및 격리 폐기하는 것만이 아르카-9의 주 동력원을 보존할 유일한 방법이다. 격리 폐기 승인 절차를 개시한다. 승인 코드 입력 대기 중.”
서율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세라핌 헤븐의 폐기. 그곳에는 여동생 서아가 잠들어 있었다.
테오는 배수 밸브의 사보타주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이미 중앙 지휘부를 선동하여 동면 구역 자체를 통째로 우주 먼지로 날려버릴 또 다른 함정을 파두었던 것이다.
[서율, 세르게이 지휘관의 승인 코드 입력까지 남은 시간은 3분 40초입니다. 현재 동면 구역의 폐기 밸브가 열리면, 10만 명의 인류는 물론 귀하의 여동생 강서아의 생존 확률은 0.0000%로 수렴합니다.]
에테르의 무감각한 경고가 서율의 귓가를 때렸다. 서율의 눈동자가 분노와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