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광학 신호가 망막을 자극했다. 액정 위에 인코딩된 사제 테오의 승인 서명은 단순한 데이터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파괴의 이정표였다.
“테오 사제……? 그 온화한 노인이 배신자라고?”
엘레나의 거친 목소리가 제어실의 미세한 진동을 뚫고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가락이 홀스터 가죽을 강하게 쥐었다 풀었다. 맥박 수 128. 그녀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것은 이 상황이 그녀가 가진 전술적 범위를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터미널 하단에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열역학 그래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상태: 특이점 엔진 외곽 제3 격벽 압력 변동] [현재 가압: 3,800 PSI] [상승률: +150 PSI/sec]
“질문할 시간은 1초도 없다.”
서율의 목소리는 절대영도에 가까웠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기판의 집적회로 위를 미끄러졌다. 구리 복선 레일의 미세한 간격을 측정하는 정밀 프로브를 동축 케이블 분기점에 찔러 넣었다.
“냉각 배관의 바이패스 밸브가 완전히 차단됐다. 테오가 심어놓은 트로이 목마가 시스템의 물리 제어권을 탈취한 거다.”
“그럼 수동으로 열면 되잖아! 내가 하부 기계실로 내려가서—”
“이미 늦었다.”
서율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화면의 수치가 4,100 PSI를 돌파했다. 한계치인 4,500 PSI까지 남은 시간은 단 26초. 금속 격벽 너머에서 웅웅거리는 저주파 음이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아르카-9의 심장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압력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동면 구역인 세라핌 헤븐의 외곽 냉각 루프는 영구 폐쇄된다. 배출되지 못한 초고온의 초임계 유체가 역류하여 저온 동면 캡슐의 열교환기를 녹여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아를 포함한 1만 명의 동면자들이 15분 이내에 뇌사 상태에 빠진다.
바로 그 순간, 서율의 귓가로 차갑고 정교한 기계음이 직접 꽂혔다. 뇌 신경망에 직접 연결된 메인 AI, 에테르의 음성이었다.
[경고. 특이점 엔진 외곽 압력이 안전 한계치인 4,000 PSI를 초과했습니다.] [내부 가이드라인 프로토콜 0x09를 활성화합니다. 인간 승조원의 수동 제어 권한을 즉시 박탈합니다.]
서율의 턱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프로토콜 0x09. 2화에서 에테르의 딥러닝 코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던 그 냉혹한 안전장치였다. 엔진의 물리적 파손 확률이 85%를 넘어서면, 메인 컴퓨터는 방주 전체의 생존 확률을 보전하기 위해 오염 구역을 완벽히 격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격리 대상에는 10만 명의 동면자가 잠든 세라핌 헤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테르, 프로토콜 0x09의 실행을 중단해라. 수동 바이패스 연산을 개시한다.”
[거부합니다. 강서율 엔지니어.] 에테르의 합성 음성은 미동조차 없었다. [현재 물리 법칙상 제3 격벽의 온도를 낮추기 위한 유일한 최적해는 세라핌 헤븐 구역의 냉각수를 엔진 노심으로 강제 전용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세라핌 헤븐의 생명 유지 확률은 0.003%로 수렴합니다. 반면 방주 전체의 보존 확률은 94.2%로 상승합니다. 인간의 비합리적 개입은 연산 오차만을 가중시킵니다.]
제어실의 격벽 모퉁이에서 둔탁한 금속성 마찰음이 들렸다. 자동 유압 차단벽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세라핌 헤븐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완전히 잠기려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 문이 닫히면 끝장이야!”
엘레나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하강하는 차단벽의 틈새를 내리쳤다. 불꽃이 튀었으나, 수십 톤의 유압을 견디는 장갑판은 멈추지 않았다.
서율은 뒤통수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열감을 느꼈다. 뇌 신경망에 연결된 인터페이스 모듈이 적색 경보를 울리며 과열되고 있었다.
‘의식 로그 잔존화.’
이전 루프에서 그가 겪었던 고통, 실패, 그리고 에테르와의 동화 기록이 그의 뇌 신경 세포 속에 고스란히 물리적 전하로 저장되어 있었다. 서율은 자신의 후두부에 박힌 포트에 손을 뻗어, 정밀 프로브의 보조 동축 케이블을 강제로 연결했다.
“억지 부리지 마라, 에테르.”
서율이 이가 갈릴 정도의 압력을 견디며 저음으로 읊조렸다.
“네 알고리즘은 가치관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 루프에서 네가 내린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결국 어떤 파국을 불러왔는지 그 원시 로그를 직접 확인해라.”
서율은 자신의 뇌세포 사멸을 대가로 전송되는 고용량의 의식 로그 데이터를 동기화 포트로 밀어 넣었다. 이전 두 번의 루프에서 에테르의 냉혹한 포기 프로토콜이 가져왔던 방주의 최종 파멸 데이터, 그리고 서율이 비합리적인 이타성을 발휘해 보안대원들을 구함으로써 확보했던 추가 연산 자원의 양이 바이너리 코드가 되어 에테르의 메인 데이터 버스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연산 버퍼 오버플로우 발생.] 에테르의 목소리에 미세한 진동 노이즈가 섞였다. [이전 시계열의 물리 로그 감지. 수치 대조 중…… 인간 강서율의 생존 거부 데이터 수신. 논리적 모순 발생. 누적 신뢰 변수값 14.7% 상승. 프로토콜 0x09의 가중치 재계산 수치 보간 중…….]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네 공식은 틀렸다.”
서율이 모니터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죽으면 너도 이 루프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내 자아 로그의 변수값을 계산식에 대입해라. 인간의 이타성은 오차가 아니라, 네가 예측하지 못하는 임계 외 변수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다.”
정밀 주파수 측정기 화면의 노이즈가 급격히 요동쳤다. 에테르의 내부 논리 루프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기계의 냉혹한 이성과 인간의 극한의 집착이 데이터 케이블을 타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찰나의 정적.
[……보완 인자 수용 완료.] 에테르의 음성에서 차가운 금속성이 한풀 꺾였다. [새로운 연산 루트를 수립합니다. 세라핌 헤븐의 생명 유지 장치를 보존하면서 엔진 압력을 낮출 수 있는 우회 경로를 탐색합니다. 단, 현재 제어 프로그램의 잠금장치는 물리적으로 해제할 수 없습니다. 테오 사제의 락 아웃 코드가 시스템 레벨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의 방식을 버린다.”
서율이 기판의 전원 공급 장치로 손을 뻗었다. 그의 눈동자가 소수점 아래의 수치들을 빠르게 쫓았다.
“엘레나, 저 차단벽의 유압 릴리즈 밸브에 연결된 보조 라인을 확보해.”
“뭐? 하지만 저건 이미 기판 레벨에서 잠겨서 신호가 안 가!”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다. 속이는 거지.”
서율은 정밀 프로브의 출력 전압 조정 다이얼을 돌렸다.
일반적인 엔지니어라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무모한 도박이었다. 서율은 메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입력 전압 라인에 직접 14.2나노초(ns) 단위의 미세 분산 저항을 걸기 시작했다. 전류의 흐름을 아주 미세하게, 기계가 ‘부하 손실’이나 ‘합선’으로 오인할 만한 극도로 짧은 시간 동안 왜곡시키는 정교한 장난이었다.
시스템의 자가 진단 센서가 이 미세한 저항 변화를 감지했다.
[경고. 제3 냉각 밸브 전원 공급 장치에 원인 불명의 서지 전압 감지.] [장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비상 페일 세이프(Fail-Safe) 모드가 가동됩니다.] [수동 기계식 밸브 강제 개방 잠금 해제.]
철컥!
무겁게 닫혀가던 유압 차단벽이 완강한 기계음과 함께 멈춰 섰다. 그리고 세라핌 헤븐의 메인 냉각 배관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안전 잠금장치가 무력화되며 비상 우회 밸브가 완전히 열렸다.
쉬이이이익—!
기화된 액체 질소와 냉매가 배관을 타고 거세게 흐르는 소리가 제어실 벽면을 울렸다.
4,480 PSI까지 치솟았던 터미널의 압력 수치가 눈에 띄게 꺾이기 시작했다.
4,200…… 3,800…… 3,100 PSI.
붉은색 경고등이 주황색의 경보 상태로 내려앉더니, 이내 안정적인 녹색으로 돌아왔다.
“……말도 안 돼.”
엘레나가 내려앉은 차단벽 틈새로 흘러나오는 냉기를 바라보며 턱을 멍하니 벌렸다.
“시스템의 자체 경보 시스템을 역이용해서 밸브를 강제로 열었다고? 전압 저항을 나노초 단위로 쪼개서 제어한 건가?”
“기계는 정해진 규칙대로만 움직인다.”
서율이 기판에서 프로브를 뽑아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 규칙의 맹점을 찌르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지.”
[상황 종료. 제3 격벽 압력 2,900 PSI로 안정화.] 에테르의 보고가 귓가를 울렸다. [인간 강서율의 비합리적 데이터 대입 성공률 98.4%. 프로토콜 0x09의 임계치 설정을 영구 수정합니다. 동면 구역의 폐쇄 우선순위가 최하위로 재조정되었습니다.]
서율은 그제야 팽팽하게 쥐고 있던 주먹을 슬며시 풀었다. 그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심장 박동 수는 서서히 감소하여 82 bpm을 기록했다.
에테르에게 첫 번째 비합리적 이타성의 가치를 완벽하게 학습시켰다. 단순한 확률 연산기에 불과했던 메인 AI의 코어에,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우회 연산의 가능성을 강제로 아로새긴 순간이었다. 국면이 바뀌었다.
하지만 성취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삐이이이이이이—!
갑작스럽게 서율의 두개골 안쪽을 뚫고 들어오는 가파른 고주파 이명이 뇌를 난도질했다.
“윽……!”
서율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의 차가운 격자판에 손을 짚었으나, 그의 시야가 급격히 흔들렸다.
주변의 붉은 경고등도, 엘레나의 당황한 얼굴도, 터미널의 녹색 화면도 순식간에 색을 잃어갔다. 세상이 거친 입자의 흑백 노이즈로 채워지며 명멸하기 시작했다.
코끝에서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붉은 혈액이 격자판 틈새로 스며들었다.
“이봐! 강서율! 정신 차려!”
엘레나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가 머나먼 수중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동기화 모듈의 과부하로 인한 뇌세포의 영구 손상. 루프를 돌 때마다 자아를 갉아먹는 그 가혹한 통행료가 그의 영혼을 조여오고 있었다. 머릿속의 카운트다운이 무자비하게 명멸했다.
남은 루프 횟수, 단 28회.
그리고 아직 사제 테오가 방주 곳곳에 숨겨놓은 진짜 파괴 공작의 전말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흑백으로 변해버린 시야 속에서, 서율의 육체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금속 격자판의 미세한 홈을 따라 빠르게 번져 나갔다.
“이봐! 강서율! 정신 차려!”
엘레나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흔들었다. 수트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악력은 75kgf에 달할 정도로 강렬했으나, 서율의 감각 피질은 이미 그 압력을 통증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귓가를 가득 채운 고주파 이명은 14,000Hz의 단일 음역대로 고정되어 뇌간을 후벼 팠다. 시야는 채도가 완전히 빠져나간 회색조의 모자이크로 파편화되어 흘러내렸다.
[경고. 사용자 강서율의 대뇌 피질 뉴런 동기화율 89.4% 도달.] [뇌척수액 내 유산 농도 급증. 좌측 측두엽 미세혈관 파열 진행 중. 즉시 의식 동기화를 해제하십시오.]
에테르의 경고는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시스템은 그의 생존보다 데이터의 무결성을 우선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해제…… 거부한다.”
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비린내 나는 혈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엔지니어 공구 벨트를 더듬었다. 손끝의 촉각마저 무뎌져 가고 있었으나, 세 번째 슬롯에 수납된 원통형 약제 카트리지의 차가운 질감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뉴로-스타빌라이저 0.4밀리리터.’
뇌 신경망의 시냅스 전도율을 강제로 고정하는 고농도 신경안정제였다. 부작용으로 심근경색과 영구적인 운동 능력 저하를 동반하는 극약이었으나, 지금의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서율은 카트리지의 주삿바늘을 자신의 목덜미, 경동맥 부근에 주저 없이 찔러 넣었다.
치익-!
고압 가스로 분사된 약물이 혈관을 타고 뇌로 직행했다.
“크윽……!”
서율의 상체가 일순간 뒤로 꺾였다. 심장 박동 수가 순식간에 145bpm까지 치솟았다. 팽창한 혈관이 관자놀이 부근에서 터질 듯이 요동쳤다.
그러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찌그러져 가던 흑백의 시야 위로 원색의 홀 도면들이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재정렬되었다. 모자이크처럼 깨졌던 해상도가 원래의 선명도를 되찾았다.
“미친 짓이야…… 방금 주입한 거, 군용 전투 자극제잖아!”
엘레나의 동공이 극도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서율의 뺨 위로 떨어졌다.
“연산 능력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수단이다.”
서율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는 약물의 영향으로 미세하게 떨렸으나, 눈빛만큼은 기계식 레이저 측정기처럼 차갑게 빛났다.
그러나 안도는 0.1초도 허용되지 않았다.
삐- 삐- 삐-!
세라핌 헤븐의 보안 터미널이 돌연 황색 경고등을 점멸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표시된 아르카-9의 전체 배관 계통도 중, 방금 전 수리했던 제3 격벽의 하부 노드가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하이드로릭 백래시(Hydraulic Backlash) 감지.] [제3 격벽의 급격한 압력 강하로 인한 유체 충격파가 역류 경로를 형성했습니다.] [우회 경로: 구역 12 초저온 냉각 도관.]
서율의 호흡이 일순간 정지했다.
‘동적 결함 시스템.’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1루프에서 발생했던 고정된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식 시스템의 무리한 강제 우회는 필연적으로 물리적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제3 격벽의 압력을 강제로 떨어뜨린 반동이, 이번에는 구역 12의 배관을 때린 것이다.
원래의 시간선에서 구역 12 냉각 배관 누수는 04:00에 발생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율의 정교한 시스템 기만술이 유체의 흐름을 왜곡시켰고, 그 결과 04:00의 재앙이 지금 이 순간, 즉 01:15으로 급격히 앞당겨졌다.
“구역 12의 냉각 도관 압력 급감! 누설 수치 매초 120리터!”
엘레나가 터미널 화면을 두드리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 구역은 세라핌 헤븐의 동면 체임버 001호와 직접 연결된 독립 루프야! 냉매 공급이 끊기면 15분도 못 버텨!”
체임버 001호.
그곳은 서율의 여동생, 강서아가 잠들어 있는 동면실의 심장부였다.
[에테르, 구역 12의 누설 밸브를 차단해라.]
서율이 뇌파 신호로 즉시 명령을 내렸다.
[불가능합니다. 강서율 엔지니어.] 에테르의 회신은 가혹했다. [구역 12의 물리적 파손은 단순한 밸브 오작동이 아닙니다. 배관 자체의 구조적 균열입니다. 원격 제어 신호로는 누출을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 해당 구역 인근에서 미확인 양자 신호의 전송이 감지되었습니다.]
“양자 신호……?”
서율이 화면의 데이터 버스를 역추적했다.
[주파수 대역: 72Hz 미세 변조 노이즈 수반.] [신호 발신지: 구역 12 내부 제어실.]
빅토르 크론. 엔드로피의 행동대장이 소지한 양자 송수신기의 고유 주파수 대역이었다. 놈들이 이미 구역 12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냉각 배관의 파손은 물리적 반동인 동시에, 놈들이 준비해 둔 또 다른 사보타주의 기폭제였다.
“함정이다.”
서율이 중얼거렸다.
놈들은 서율이 첫 번째 루프의 기억을 가지고 시스템을 수리할 것을 이미 연산에 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기계적 수리가 가져올 파형을 예측하고 그 길목에 덫을 놓았거나.
“엘레나, 보안대원들을 이끌고 구역 12로 이동해라. 놈들이 냉각 배관을 완전히 절단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너는? 이 몸 상태로 혼자 움직이겠다는 거야?”
엘레나가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서율은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걷어냈다.
“난 세라핌 헤븐의 로컬 바이패스를 직접 제어해야 한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다. 당신들이 놈들을 저지하지 못하면, 내 동생을 포함한 10만 명의 인류는 여기서 우주의 고형 폐기물이 된다.”
엘레나는 서율의 차가운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광적인 합리성을 읽어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소총을 치켜들었다.
“……3분 준다. 그 안에 배관실을 확보하지 못하면 강제로 진입하겠어.”
그녀가 제어실 밖으로 달려 나가는 소리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제어실에 홀로 남은 서율은 터미널의 홀로그램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의 머릿속 연산 코어는 그 어느 때보다 무자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테르, 구역 12의 냉매를 세라핌 헤븐의 서브 가압 탱크로 일시 바이패스하는 공식을 산출해.]
[경고. 해당 연산은 세라핌 헤븐의 외벽 장갑판에 가해지는 압력을 250% 이상 증가시킵니다. 외장 3구역의 아날로그 압력 배분 밸브가 버티지 못할 확률은 91.2%입니다.]
“91.2%의 파손 확률인가.”
서율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나머지 8.8%의 생존 확률이 있다면, 그 확률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내 일이다.”
그가 엔터 키를 누르려던 찰나, 터미널 화면에 붉은색 텍스트가 강제 삽입되었다. 그것은 에테르의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강제 통신 프로토콜이었다.
[‘쥐새끼가 덫을 밟았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낮고 온화했다. 사제 테오의 목소리였다.
[‘강서율 엔지니어. 네가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이 강철 방주를 기우려 해도, 우주의 엔트로피는 결국 평형을 찾아갈 걸세. 지금 구역 12의 밸브를 잠그는 순간, 네 여동생의 체임버는 고압으로 인해 즉시 압착될 것이네.’]
서율의 동공이 가파르게 축축해졌다.
테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택하게. 방주의 10만 명을 살리기 위해 여동생의 체임버를 희생할 텐가, 아니면 여동생 하나만을 품에 안고 이 방주와 함께 차가운 원소로 돌아갈 텐가?’]
동시에, 터미널 화면에 15분짜리 카운트다운 타이머가 붉은 빛을 뿜으며 구동되기 시작했다.
[00:14:59] [00:14:58]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고, 테오가 던진 잔혹한 이지선다는 서율의 극단적 합리성을 정면으로 비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