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단말기 화면의 액정이 붉은색 경고등과 동조하며 격렬하게 점멸했다.

[경고. 저온 동면 지구 '세라핌 헤븐' 중앙 온도 감지기 이상.] [동면 구역 001호 체임버 주변 온도: -190.0℃ → -189.5℃] [비정상적인 0.5℃ 불규칙 상승 감지. 원격 해킹 시도 감지됨.]

망막을 찌르는 붉은 빛에 반사적으로 미간이 좁아졌다. 동시에 좌측 측두엽 깊은 곳에서 시큰한 통증이 솟구쳤다. 뇌 신경망에 직접 연결된 에테르의 동기화 모듈이 급격한 데이터 트래픽을 처리하며 발생시킨 뉴런 노이즈였다. 맥박수는 분당 132회로 급증했다. 호흡의 주기가 짧아졌으나 이성은 되레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아…….”

목구멍을 넘어온 음성은 건조했다.

[제한 시간 14분 42초. 해킹 프로토콜을 차단하지 못할 경우, 체임버 001호의 산소 공급 밸브가 차단됩니다. 이후 동면자의 뇌 세포 괴사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15분입니다.]

에테르의 합성 음성이 뇌내 시냅스를 타고 직접 흘러들었다. 감정의 고저가 배제된, 기계적인 주파수 대역이었다.

서율은 즉시 신체 질량을 앞으로 기울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12구역에서 세라핌 헤븐 입구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1,120미터. 일반적인 보행 속도로는 13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에테르, 최단 동선 연산해.”

[비상 수직 환기구 04번 통로를 경유하는 경로를 추천합니다. 수직 낙하 거리 42미터. 중력 가속도를 이용할 시 이동 시간을 3분 15초 단축할 수 있습니다. 단, 착지 시 무릎 관절에 가해지는 충격 하중은 체중의 4.2배에 달하며, 뇌 신경망 부하가 12% 가중됩니다.]

“상관없어. 경로 고정해.”

강철로 된 비상 해치를 발로 차 열었다. 어두컴컴한 수직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벽면에 설치된 아날로그 사다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몸을 던졌다. 마찰열로 인해 특수 작업 장갑의 가죽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끄러지듯 하강하는 동안,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영하의 공기 속에서 순식간에 식어갔다.

쾅!

바닥의 완충용 고무 패드에 두 발이 닿는 순간, 척추를 타고 뇌저부까지 강력한 충격파가 전달되었다. 눈앞에 잠시 붉은색 노이즈 필터가 끼었다가 사라졌다. 잔여 루프 횟수 29회. 뇌세포 사멸의 전조 증상인 시각적 왜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율은 멈추지 않고 세라핌 헤븐의 이중 격벽 앞으로 내달렸다.

두꺼운 티타늄 합금 도어 유리에 서린 성에 너머로, 백색의 자욱한 기체가 보였다. 액체 질소 냉매 증기였다. 배관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삼중 장갑판으로 격리된 동면 구역의 내부 온도는 영하 190도. 방한 작업복의 환경 센서가 급격한 외부 온도 저하를 감지하고 경보음을 울려댔다.

삐- 삐- 삐-

“해치 개방.”

[격벽 내부 압력 불균형 감지. 강제 개방 시 압력 강하로 인한 이압성 고막 손상 확률 78%입니다.]

“개방해, 에테르. 내 명령은 절대적이다.”

치이이익-!

에테르가 록을 해제하자마자 격압 밸브가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안개처럼 밀려 나오는 백색 증기가 서율의 전신을 덮쳤다. 시야는 순식간에 1.5미터 이내로 제한되었다. 영하 190도의 극저온 공기가 작업복 안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피부를 얼려댔다. 속눈썹에 순식간에 고드름이 맺혔다.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서율의 발끝에 단단한 금속성 물체가 걸렸다.

서율은 무릎을 꿇고 바닥을 더듬었다. 손에 잡힌 것은 찌그러진 생체 유지 압력 조절 피스톤의 실린더 파편이었다.

단면을 확인했다. 자연적인 피로 파괴가 아니었다.

“기계적 사보타주의 흔적이다. 고강도 유압 프레스로 측면에서 강한 하중을 가해 실린더 축을 인위적으로 휘어놓았어.”

[분석 완료. 300kN 이상의 순간 물리력이 가해진 흔적입니다. 휴대용 유압 잭을 사용한 공작으로 판단됩니다. 잔류 물리학적 타임라인 분석 결과, 훼손 시점은 약 6분 전입니다.]

에테르의 분석과 동시에 서율의 시선이 바닥의 미세한 흔적으로 향했다.

피스톤 기어의 날카로운 톱니 사이에 물려 있는 미세한 검은색 섬유 조각. 아르카-9의 정식 승무원 피복에는 사용되지 않는, 전자기 차폐 기능이 탑재된 탄소 섬유 원단이었다.

누군가 이곳에 들어와 피스톤을 망가뜨리고 도주했다.

서율은 이가 맞부딪히는 것을 억누르며 일어섰다. 001호 체임버가 위치한 중앙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색 안개 너머로, 여동생 서아의 이름이 적힌 투명한 강화 아크릴 창이 보였다.

창 내부의 서아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지만, 체임버 상단의 디지털 인디케이터는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188.2℃]

온도가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냉매 시스템의 차단 밸브가 완전히 잠겨, 내부의 잔류 액체 질소가 기화하며 온도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이대로 0.5도만 더 상승하면 캡슐 내부의 산소 차단막이 가동되고, 저산소증으로 인한 동면자의 비가역적 뇌 손상이 시작된다.

“서아…….”

서율의 손이 아크릴 창을 짚었다. 차가운 냉기가 장갑을 뚫고 손바닥을 얼렸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합리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벽을 두들기고 싶은 비합리적인 감정이 솟구쳤다.

하지만 서율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강하게 깨물었다. 통증이 뇌하수체를 자극해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켰다. 감정을 물리적 수치로 치환해야 했다. 슬픔은 산소 소비량을 15% 증가시키고, 분노는 시각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는 불필요한 노이즈일 뿐이다.

“에테르. 감정 소모 연산을 중단한다. 수동 제어 모듈의 데이터 전송을 내 대뇌 피질로 직접 라우팅해.”

[경고. 현재 강서율 님의 뇌파 동조율은 89%입니다. 이 상태에서 수동 바이패스 제어 데이터의 직접 입력은 두통 가중 및 뉴런 가소성 저하를 유발합니다.]

“입 닥치고 연결해!”

쿠웅-!

머릿속에서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시야 우측에 수천 개의 복잡한 논리 회로도가 증강 현실로 펼쳐졌다. 001호 체임버의 유압 계통도와 솔레노이드 밸브의 내부 구조가 정밀하게 뇌 신경망에 각인되었다.

체임버 하단의 메인 밸브가 완전히 동결되어 고착된 상태였다. 유압식 작동기는 이미 제어 신호를 거부하고 있었다. 기계적 쐐기를 뽑아내고 수동으로 압착 레버를 돌려야만 했다.

서율은 바닥에 엎드려 제어 패널의 커버를 뜯어냈다.

파지직-!

액체 질소 가스가 미세한 틈새로 분출되며 제어 패널 내부의 구리 배선과 반도체 칩셋을 하얗게 얼려가고 있었다. 열충격(Thermal shock)으로 인해 기판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기판이 완전히 파손되면, 수동으로 밸브를 열어도 제어 컴퓨터가 사망하여 산소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없게 된다.

남은 시간 45초.

일반적인 엔정니어라면 시스템 전체를 셧다운하고 영하 190도의 냉매를 배출한 뒤 부품을 교체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 2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서아는 1분도 버티지 못한다.

서율은 허리춤의 공구 벨트에서 고밀도 절연 레진 스프레이를 꺼냈다.

“3중 레이어링 공법을 가동한다.”

첫 번째 분사. 치익 소리와 함께 투명한 고분자 액체가 얼어붙어 가던 반도체 기판 위에 도포되었다. 1차 레이어는 미세 균열 사이로 스며들어 가스와 수분을 완벽히 차단하는 나노 밀봉막을 형성했다.

두 번째 분사. 이번에는 열전도율이 극도로 낮은 에어로겔 성분이 함유된 청색 레진이 기판 위를 덮었다. 외부의 영하 190도 냉기와 기판 내부의 작동 온도를 격리하는 강력한 단열층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분사. 급속 경화 촉매가 섞인 우레탄 계열의 황색 레진이 도포되자마자, 불과 3초 만에 단단한 플라스틱 장갑판처럼 굳어졌다.

단 10초.

미세 분사와 화학적 경화 반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 극적인 복구 공정이었다. 파괴되려던 제어 패널이 완벽하게 밀봉되어 녹색 작동등을 다시 켜냈다.

[놀랍군요. 수동 제어 패널의 전기적 무결성이 100% 복구되었습니다. 비합리적인 속도의 엔지니어링 연산입니다.]

에테르의 목소리에 미세한 데이터 변조 노이즈가 섞여 들었다. 서율은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수동 압착 레버를 붙잡았다.

“으윽……!”

금속 레버는 성에로 인해 얼어붙어 있었다. 체중을 전부 실어 레버를 시계 방향으로 꺾었다. 장갑을 낀 손바닥 가죽이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기계적인 마찰음이 밀폐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끼이이이익-!

철컥.

내부의 스프링 장치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배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 질소의 둔탁한 진동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189.1℃] [-189.6℃] [-190.0℃]

디지털 숫자가 급격히 하강하며 정상 범위를 가리켰다. 서아의 캡슐 내부 산소 농도 역시 21.3%의 안전 수치로 고정되었다.

서율은 캡슐 지지대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심박수는 천천히 90회대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관자놀이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살아…… 있군.”

서율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수리가 끝난 피스톤 실린더 하단부, 짙은 성에가 내려앉은 삼중 장갑판의 구석 자리에 기묘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칼날 같은 도구로 정교하게 긁어낸 흔적이었다.

그리스 문자 ‘Ω(오메가)’의 형상 위에 겹쳐진 역삼각형의 문양.

“엔드로피 교단.”

서율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동기화 데이터베이스 대조 완료. 해당 표식은 신성 궤도 종말론자 교단 '엔드로피'의 극단주의 연대 서명입니다. 그들은 아르카-9의 파멸을 우주의 자연적 상태로의 회귀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알아. 하지만 이 표식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야.”

서율은 손가락으로 표식의 깊이를 가늠했다. 깊이 1.2밀리미터. 가공 시 발생하는 마찰열로 인해 표식 주변의 미세 배관 코팅이 살짝 녹아내려 있었다.

표식 바로 옆에는 초소형의 안테나가 달린 전자기 송신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서율은 송신기를 떼어내 단말기에 연결했다. 액정 화면에 복잡한 주파수 파형이 어지럽게 그려졌다.

“주파수 분석해, 에테르.”

[광대역 주파수 433MHz 대역에서 암호화된 시퀀스가 감지됩니다. 수신지는 방주 내부의 중앙 전력 제어실 방향입니다. 이 신호는 단순한 상태 보고용이 아닙니다. 특정 트리거 신호가 수신되면 체임버의 냉각 시스템을 일제히 폭파하도록 설계된 원격 기폭 알고리즘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배신자는 중앙 전력 제어실 근처에 있거나, 그곳의 권한을 쥔 자라는 뜻이군.”

서율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었다. 매 루프마다 변조되는 사보타주의 나비효과 속에서, 적들은 서율이 시스템을 고치는 속도보다 빠르게 파괴 공작의 알고리즘을 진화시키고 있었다. 이번 회차에서 체임버를 지켜냈지만, 다음 회차에서는 이 송신기가 어떤 식으로 작동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을 뿌리 뽑아야만 서아를, 그리고 이 방주에 잠든 10만 명의 인류를 구할 수 있다.

“에테르, 송신기의 주파수 패턴을 복제해 내 신경망에 동조시켜 둬. 다음 루프에서도 이 신호 대역을 바로 추적할 수 있도록.”

[복제 완료. 단, 해당 데이터 유지로 인해 발생하는 뉴런의 메모리 점유율은 3.4%입니다. 인지 오류의 누적 속도가 빨라집니다.]

“상관없어.”

서율은 송신기를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극저온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세라핌 헤븐의 복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중앙 전력 제어실로 이동해 신호의 발신원을 역추적해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특이점 엔진의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0시간 남짓이었다.

서율은 세라핌 헤븐의 무거운 이중 격벽을 통과해 어두운 금속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철컥-!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고요한 공기를 찢는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이 사방에 울렸다.

동시에 서율의 미간에 선명한 붉은색 광점이 맺혔다.

조준경의 레이저 포인터였다.

“거기까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의 실루엣은 지극히 낯익었다.

방주 보안대의 상징인 짙은 청색의 제복. 어깨에 달린 베테랑의 견장.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방주 내부의 민간 구역에서는 엄격히 사용이 금지된, 군용 고출력 에너지 권총 ‘헤파이토스-IV’였다. 총구는 정확히 서율의 미간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보안대장 엘레나 바실리예프였다.

그녀의 거친 눈동자가 영하의 안개 속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권총을 쥔 손가락은 방아쇠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었고,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강서율 엔지니어.”

엘레나의 목소리가 철판을 긁는 듯 건조하게 울렸다.

“민간 통제 구역인 세라핌 헤븐에 무단 침입한 것도 모자라, 보안 송신기를 소지하고 있군. 네가 엔드로피의 첩자였나?”

서율의 뇌세포가 다시 한번 강한 통증과 함께 격렬한 연산을 시작했다.

그녀는 과연 아군인가, 아니면 이 모든 사보타주를 기획한 내통자인가.

미간에 닿은 붉은 광점이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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