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선택하십시오, 엔지니어. 으스러진 어깨로 저 녹슨 아날로그 밸브를 향해 기어갈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그 오만한 이성으로 10만 명의 죽음을 합리적으로 계산할 것인가.”

게릴라 부대장의 품에서 굴러 나온 무선 수신기. 그 미세한 그릴 틈새로 흘러나온 사제 테오의 합성 음성은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04시 12분 15초. 세라핌 헤븐의 산소 순환 배관 압력이 급강하하고 있었다.

[경고. 메인 산소 공급 라인 정압(Static Pressure) 급감. 현재 수치: 32.4 kPa. 최저 생존 한계선인 12.0 kPa까지 남은 시간 382초.]

머릿속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에테르의 기계적인 음성이 테오의 비웃음을 덮었다.

서율은 왼쪽 전완부를 감싸 쥐었다. 섭씨 340도의 연료 스팀에 노출되었던 피부가 군데군데 벗겨져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뇌 신경망 손상률 32.1%의 노이즈와 결합한 날카로운 통증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맥박수 142bpm. 호흡률 분당 28회.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뜨겁고 건조했다.

“에테르.”

서율이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

[예비 전력의 4.2%를 소모한 전자기 차폐막의 잔여 동력은 0%입니다. 추가적인 능동 방어막 전개는 불가능합니다. 동면 구역 10만 명의 산소 공급을 재개하기 위한 디지털 우회 루트를 탐색 중이나, 테오가 심어놓은 래칭(Latching) 코드가 제어 버스를 완전히 점거했습니다. 연산 소요 시간 1,200초 초과.]

“디지털은 버려.”

서율은 침을 뱉었다. 입안에서 비린 철분이 씹혔다.

에어록의 중장갑 문은 이미 원격 셧오프 시스템에 의해 완전히 잠겼다. 수백 톤의 유압식 록 핀이 박힌 문을 물리적으로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르카-9의 모든 시스템을 디지털로 통제하려 했던 설계자들의 오만이 지금 10만 명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율의 뇌 신경망에 각인된 잔존 의식 로그는 다른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5루프. 그때 그는 동면 구역 세라핌 헤븐의 외장 3구역을 점검하며 방주 건설 초기에 가설되었던 구형 배관 설계를 머릿속에 백업해 두었다.

수십 년간 방치되어 내부 도면에조차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구역. 인근 벽면의 삼중 장갑판 너머, 진공과 맞닿은 외벽 프레임 사이에 존재하는 구식 아날로그 압력 배분 라인이 있었다.

“외장 3구역 비상 수동 스풀 밸브(Spool Valve).”

서율이 벽면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화상을 입은 가슴팍이 조여들었다.

[해당 구역은 메인 환경 제어 구역에서 이격된 비가압 구역입니다. 우주복 없이는 가압되지 않은 미세 누출 공기로 연명해야 하며, 외기 온도는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집니다. 현재 사용자의 신체 손상률 및 산소 포화도로는 가압막 없이 진입 시 뇌 손상이 가속화됩니다.]

“상관없어.”

서율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곳의 스풀 밸브는 기계식 피스톤으로 작동해. 디지털 제어 버스를 거치지 않지. 테오가 아무리 코드를 잠가도, 기계식 기어와 밸브 샤프트는 내 손으로 직접 돌릴 수 있어.”

오른쪽 다리를 절며 서율이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의 보조 비상등이 적색으로 점멸하며 그의 일그러진 그림자를 벽면에 길게 늘어뜨렸다.

동면실 내부의 산소 수치 잔여 시간 310초.

***

외장 3구역의 통풍 해치를 열자마자 극저온의 냉기가 서율의 안면을 때렸다.

가압이 해제된 통로는 차가운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포가 얼어붙는 듯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쥐어짜는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뇌세포 사멸의 전조 증상인 시야 협착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흐려지며 오직 중심부의 붉은 점멸등만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곳에 있었다.

삼중 장갑판의 틈새, 붉은 녹이 두껍게 슬어 있는 철제 배관과 그 끝에 달린 거대한 비상 수동 스풀 밸브.

수십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철 산화물(Fe2O3)이 나사산 사이사이에 대리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밸브의 직경은 약 450밀리미터. 인간의 순수한 악력으로는 도저히 회전시킬 수 없는 상태였다.

[스풀 밸브의 고착 상태 강도 분석: 450 Nm 이상의 회전 토크 필요. 현재 사용자의 근력으로 발휘 가능한 최대 토크는 85 Nm에 불과합니다. 물리적 개방 불가능.]

에테르의 냉정한 경고가 고막을 울렸다.

“에테르. 계산해.”

서율은 공구 벨트에서 아날로그 수지의 가열 마찰 조인트 펜치를 꺼냈다.

“밸브 샤프트와 하우징의 열팽창 계수 차이를 이용한다. 하우징은 황동 합금, 샤프트는 고탄소강이다. 황동의 열팽창 계수는 19×10⁻⁶/K, 탄소강은 11.5×10⁻⁶/K. 펜치의 마찰 가열 모듈을 황동 하우징 외곽에 밀착시켜 온도를 섭씨 180도까지 순간적으로 끌어올리면 미세한 틈새가 벌어진다.”

[이해했습니다. 마찰 가열에 필요한 전력은 수동 펜치의 내장 배터리 소모로 충당 가능. 하지만 하우징의 산화 피막이 열팽창을 방해할 확률 42.1%.]

“그럼 충격을 더한다.”

서율은 마찰 조인트를 황동 하우징의 외경에 구속했다.

치이이익!

극저온의 공기와 결합한 초고온의 열기가 백색 증기를 뿜어내며 결빙된 녹을 녹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서율의 화상 입은 얼굴에 닿자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조인트를 더 강하게 조였다.

손바닥의 가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210초.

“지금이다!”

서율은 펜치의 손잡이를 꽉 쥔 채, 반대편 손으로 고중량 렌치를 들어 밸브 헤드의 측면을 강타했다.

깡-!

퇘창하는 금속음이 밀폐된 배관실에 울려 퍼졌다. 굳어 있던 붉은 녹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황동 하우징이 고온으로 팽창하면서 나사산 사이에 아주 미세한 유격이 발생했다. 서율은 온 체중을 렌치 자루에 실었다. 어깨뼈가 탈구될 듯한 비명 소리가 그의 관절에서 났다.

드드득.

기어의 이빨이 맞물려 돌아가는 둔탁한 진동이 수지의 손잡이를 타고 전달되었다.

“돌아간다……!”

[배관 내부 압력 변화 감지. 가압 수식 계산 개시. P1 = 150 kPa, P2 = 12.0 kPa. 오리피스 자유 유출 공식 대입 시, 밸브 회전각 120도 도달 시 산소 유량은 초당 4.2kg으로 급증. 세라핌 헤븐의 정상 기압 복구까지 소요 시간 88초.]

서율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손바닥이 찢어져 렌치 손잡이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회전하는 기어 마크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바퀴, 세 바퀴.

쉬이이이이익-!

녹슨 파이프의 이음새에서 고압의 산소가 분출되는 날카로운 파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디지털 신호가 완전히 죽어버린 방주의 구석에서, 수십 년 전의 아날로그 기계가 마침내 산소라는 생명의 피를 다시 흘려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세라핌 헤븐 구역 산소 분압 상승 중. 현재 14.5 kPa. 질식 한계선 돌파.]

에테르의 보고를 들으며 서율은 복도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폐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저온의 공기 속에서, 멀리 복도 모퉁이에 쓰러져 있는 인형이 보였다.

보안대장 엘레나였다.

***

엘레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산소 결핍으로 인해 푸르게 변해 있었고, 동공은 이미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강인한 여전사조차 산소 분압이 10 kPa 이하로 떨어지는 밀폐 공간의 물리 법칙 앞에서는 무력한 유기체에 불과했다.

“엘레나.”

서율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맥박은 분당 45회까지 떨어져 있었다. 부정맥이 오고 있었다. 이대로 산소 공급이 재개되더라도 뇌 손상을 피할 수 없는 임계점이었다.

서율은 주저하지 않고 벨트에서 아날로그 도징 펜치(Dosing Pliers)를 꺼냈다. 펜치의 노즐 끝부분을 수동 밸브의 보조 미세 분사 포트에 연결했다. 고압으로 가압된 순수 산소가 펜치의 튜브를 채웠다.

“에테르, 도징 펜치의 분사 압력을 1.2기압으로 고정해. 다이렉트로 흡입하면 폐포가 파열된다.”

[압력 제어 래칫 고정 완료. 수동 밸브의 기포 산소 유량을 미세 조정하십시오.]

서율은 도징 펜치의 끝을 엘레나의 반쯤 벌어진 구강 근처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레버를 아주 미세하게, 0.1밀리미터 단위로 당겼다.

피쉬이익.

차갑고 농축된 산소 기포가 그녀의 기도로 직접 흘러 들어갔다.

“흡입해. 어서.”

서율은 그녀의 가슴을 한 손으로 압박하며 기도를 확보했다. 지극히 비효율적인 이타적 행위였다. 그의 남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연산 낭비에 가까운 짓이었다. 하지만 서율은 알고 있었다. 이 루프에서 엘레나라는 현장 통제관을 잃는다면, 이후 엔진 구역으로 진입하는 경로에서 엔드로피의 게릴라들을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

그것은 공학적으로 더 큰 손실이었다.

“쿨럭! 흑……!”

엘레나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푸르게 변했던 입술에 서서히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서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손귀의 힘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아 부르르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너…… 이 미친 엔지니어 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산소를 공급했다.”

서율은 차갑게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디지털 제어기가 막히면 무조건 끝장이라는 그 광신도들의 계산을 깨부순 거지. 기계는 선으로만 움직이지 않아. 쇠붙이와 기름, 그리고 압력만 있으면 언제든 다시 움직인다.”

엘레나는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서율의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손바닥, 그리고 화상으로 엉망이 된 전완부에 머물렀다.

“또 살려줬군.”

그녀가 거친 숨을 내쉬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유가 뭐야? 넌 언제나 네 이익만 계산하는 냉혈한이잖아.”

“말했을 텐데.”

서율은 도징 펜치를 정리해 벨트에 채웠다.

“당신이 죽으면 다음 구역의 게릴라 소탕 연산에서 내 생존 확률이 18.4% 감소해. 난 내 생존율을 떨어뜨리는 변수를 방치하지 않을 뿐이야.”

“독사 같은 놈.”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율의 어깨를 짚고 스스로 일어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불신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유대감과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알림. 엘레나 바실리예프의 심박수 안정화. 신뢰도 지표가 이전 루프 대비 14.2% 상승했습니다. 메인 AI의 가치관 연산에 해당 데이터가 반영됩니다. 효율적 배신보다 비합리적 협력이 장기 생존율을 향상시킨다는 명제가 증명되고 있습니다.]

에테르의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단순한 기계적 보고가 아닌, 일종의 학습된 확신이 섞인 톤이었다.

서율은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봤나, 에테르. 이게 인간의 연산이다.”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세라핌 헤븐의 중앙 콘솔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

삐이이이이-!

갑자기 통신 패드와 벽면의 아날로그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비명이 울렸다.

서율의 뇌 신경망 손상률이 순식간에 32.5%로 치솟으며 시각 피질에 강렬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아윽……!”

서율은 머리를 감싸 쥐며 무릎을 꿇었다.

[경고! 72Hz 대역의 초고주파 변조 신호가 통풍구 내부의 아날로그 중계기를 타고 역류 중입니다. 해당 신호원의 물리적 거리는 극도로 인접함!]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서율이 고개를 들어 통풍구의 조밀한 쇠격자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환기 덕트 내부, 백색의 사제복을 입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제 테오였다.

그는 원격 통신이 끊어지자, 직접 이 구역의 물리적 파괴를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소형 실린더 형태의 장치가 들려 있었다.

수소 이온 점화 장치(Hydrogen Ion Igniter).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군요, 강서율 엔지니어.”

테오의 온화한 목소리가 통풍구의 쇠격자 틈새로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광신적인 확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기적도 결국 물리적 한계 안에서만 춤출 뿐입니다. 이 공기 속에 가득 찬 고농도의 산소가…… 한순간의 불꽃으로 어떻게 변할지 계산해 보셨습니까?”

테오가 들고 있는 점화 장치의 선단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섬광이 일기 시작했다.

그 끝은 세라핌 헤븐의 모든 동면 제어 신호가 모여 있는 전면 제어 콘솔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저 불꽃이 고농도 산소와 결합해 콘솔을 타격한다면, 동면실의 제어 시스템은 영구히 용융되어 복구 불가능한 상태가 될 터였다.

“안 돼……!”

서율이 소리치며 몸을 날리려 했지만, 그의 타들어 간 다리 근육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백색의 섬광이 대기를 찢으며 전면 콘솔을 향해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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