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구구구구구—!

강동구 상공을 분할하던 붉은 격자무늬가 일제히 비틀리며 기괴한 고주파 파동을 뿜어냈다. 대기가 팽창하다 못해 찢어지는 듯한 이명에 생존자들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연산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강도진의 고대 분석 렌즈 표면에 붉은색 경고 코드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경고: 주동 고차원 시스템의 다이렉트 강제 광역 멸살(Format) 시퀀스 감지.] [대상 구역: 서울특별시 강동구 일대 전체 시공간 데이터.] [남은 연산 완료 시간: 180초.]

"기선우 씨."

도진이 나지막이 읊조린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그의 시선은 지평선 너머, 앱솔루트 오더의 임시 지휘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송신되는 주파수는 정확히 612.4Hz. 지난 6화에서 기선우의 품 안에서 분석 렌즈로 스캔해 두었던 바로 그 '포맷 인가용 블랙 연산장치'의 고유 공진 주파수였다. 통제 상실이라는 변수를 마주한 기선우는, 자기가 신봉하던 '90%의 생존율'을 지키기 위해 강동구 전체를 우주 시스템의 연산식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친 짓을……."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태령이 칼자루를 쥔 채 바르르 떨었다. 그의 갑옷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흙먼지와 섞여 검게 가라앉고 있었다.

"방패 영주님, 쓸데없는 생리적 에너지 낭비는 중단하십시오."

도진은 한태령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품 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2화에서 수집했던, 톱니바퀴가 으스러지고 황동 프레임이 비틀린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이었다. 일반적인 감정안으로는 단순한 던전 쓰레기로 분류되던 유물. 하지만 도진의 분석 렌즈는 그 이면에 숨겨진 기하학적 수식을 이미 완벽하게 해독한 상태였다. 이것은 단순한 나침반이 아니라, 고대인들이 인과율 구조의 미세한 비틀림 공간을 추적하고 간섭하기 위해 제작한 다차원 벡터 연산기였다.

스르릉.

도진이 나침반의 찌그러진 다이얼을 612.4Hz의 역위상인 387.6Hz 방향으로 비틀어 고정했다. 그러자 멈춰 있던 청동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하늘을 가득 채운 붉은 격자선의 교차점—포맷 파동의 핵을 가리켰다.

"엘라, 태초의 영토 진흙의 잔여 바인딩 프로세스를 활성화해."

[후훗, 정말로 그 끈적거리는 흙더미를 전부 소모할 생각이야? 그건 네가 가진 유일한 영토 고착 개념 자산인데 말이지.]

귓가를 때리는 엘라의 목소리에는 흥미와 조롱이 반씩 섞여 있었다.

"가치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회비용이다. 연산해."

[명령 접수. '태초의 영토 진흙'의 입자 결합도 100% 동기화 개시. 세이프존의 물리적 경계선과 다차원 바인딩을 연계합니다.]

파아아아앗!

강동구 하위 구역을 둥글게 감싸 안고 있던 '엔트로피 감쇄 벽'의 기저부에서 자줏빛 진흙 입자들이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것은 마치 대지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그물망처럼 변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붉은 격자 장벽의 말단부를 붙잡아 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소리 없는 해일이 몰려왔다.

기선우의 블랙 연산장치에서 방사된 백색 포맷 파동이었다. 그 빛이 닿는 순간, 수십 층 높이의 콘크리트 빌딩 무리가 붕괴의 과정도 없이, 마치 칠판에 적힌 분필 글씨를 지우개로 문지르듯 허무하게 백색 가루로 변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철골 구조물도, 지하에 묻힌 가스관도,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기사단의 잔해조차 단 0.1초 만에 데이터의 소멸 속으로 흡수되었다.

"도진 씨……!"

백설아가 도진의 깃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동물적인 생존 본능은 눈앞의 거대한 소멸이 자신들이 서 있는 대지마저 삼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뇌의 연산 영역을 방해하는 자극은 회피율을 떨어뜨린다."

도진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의 관자놀이에는 굵은 핏대가 솟아올라 있었다.

잔여 인과율 채무 87.4%.

여기서 태초의 진흙을 완전 고착시키고 포맷 파동을 감쇄 벽으로 받아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념 간섭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 간섭은 필연적으로 인과율 채무의 한도를 초과하게 만든다.

[경고: 추가 라이선스 임대 시 인과율 채무가 100%를 초과합니다.] [채무 초과 패널티: '역전위 유령 마나' 발동. 주변의 모든 물질 구성이 분자 수준으로 영구 붕괴합니다.]

"알고 있다."

도진이 나침반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붕괴 메커니즘을 역으로 포맷 파동에 충돌시킨다. 엘라, 채무 한도 제한을 일시적으로 해제해."

[미쳤구나, 강도진! 스스로 붕괴의 구렁텅이로 기어 들어가는구나!]

엘라의 경고와 함께, 도진의 심장 부근에서 검붉은 마나의 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나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하가 현실화된 일종의 '버그 오류' 그 자체였다. 검붉은 유령 마나가 도진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흘러나와 그의 전신을 타고 내렸다. 피부가 찢어지고 모세혈관이 터져 안경 너머로 피가 흘러내렸다.

스르륵.

갑자기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도진의 뺨을 감쌌다.

피로 얼룩진 도진의 연산 안경을, 백설아가 가만히 고쳐 씌워주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의 생명 마나가 도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심장으로 직행했다.

"낙오시키지 않겠다고 계산했잖아."

설아가 도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거친 호흡이 도진의 턱밑에 닿았다.

"당신의 그 지독하고 차가운 계산법 안에서, 나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끝까지 당신의 계산법 안에 낙오되진 않겠어. 이 더러운 시스템이 당신을 갉아먹게 내버려 두지 않아."

"설아 씨, 이건 비합리적인 마나 낭비……."

"시끄러워. 내 마나를 어디에 쓸지는 내 직관이 결정해."

설아가 이를 악물며 도진의 영혼 계약 경로로 자신의 힐링 마나를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그녀가 지닌 야생의 생명 데이터가 도진의 영혼에 동기화되는 순간, 시스템 알림판이 폭발적으로 깜빡였다.

[동료 자산 '백설아'의 생명력 강제 동기화.] [임시 인과율 감쇄율 15% 적용. 채무 한도 도달 시간이 42초 연장됩니다.]

도진의 시야를 가리던 붉은 노이즈가 걷히고, 연산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백설아의 생명 데이터가 완충재 역할을 하며 도진의 영혼이 붕괴하는 속도를 늦춰준 것이다.

"……효율적인 지원이군."

도진이 차갑게 읊조리며 나침반을 허공으로 투척했다.

"역전위 유령 마나, 방출 스펙트럼 고정. 포맷팅 파동의 공진 주파수와 정밀 간섭을 실행한다."

쉬이이이이익!

도진의 몸에서 뻗어 나간 검붉은 유령 마나가, 나침반의 회전하는 바늘을 축으로 삼아 거대한 기하학적 나선 구조를 그리며 뻗어 나갔다. 그것은 다가오는 백색 포맷의 해일을 저지하기 위해 형성된, 물질을 분해하는 또 다른 소멸의 장벽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두 개의 소멸이 격돌했다.

기선우의 블랙 연산장치가 명령한 '세계의 삭제'와, 강도진의 채무 초과가 불러온 '물질의 분해'가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맞부딪쳤다. 소리는 사라졌다. 극단적인 연산의 충돌은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충돌 지점의 공간이 유리처럼 깨져 나가며 검은색 균열이 발생했다.

그 여파로 독점 상점의 인터페이스가 거칠게 흔들렸다.

[치이이익…… 경고. 시스템 코어 세션의 하중 피드백 발생. 라이선스 유지 불가능…….]

"엘라!"

도진이 소리쳤다.

그때였다. 허공이 푸른색 입자로 갈라지더니, 언제나 귓가에서만 들리던 엘라의 형상이 가상 강림의 형태로 도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홀로그램처럼 투명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과 비단 같은 은발은 소멸해 가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기괴할 정도로 선명했다.

"정말이지, 이래서 하등 생명체와의 계약은 귀찮다니까."

엘라가 도진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투명한 손가락이 도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그의 영혼에 새겨진 불법 라이선스 계약서를 직접 움켜쥐었다.

"우주 개척 라이선스 등급을 임시로 격상한다. 채무 계약의 주체를 '강도진' 단독에서 '세이프존 영토'로 전환. 이제부터 발생하는 부하는 네 쪼그라든 영혼이 아니라, 이 땅의 엔트로피가 감당할 거야."

[알림: 라이선스 등급 임시 격상.] [계약 조항 보강 개편 완료. 세이프존 내부의 물리 법칙 변환율이 400% 상승합니다.]

엘라의 가상 신체가 빛을 발하며 사라지는 순간, 도진은 전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그들이 서 있는 대지 전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도진이 손을 내뻗었다.

"엔트로피 감쇄 벽, 가동률 400% 초과 공급. 마나의 물리적 역학 척력 치환을 선언한다."

그 순간, 강동구 하위 구역 전체에 기적이 강림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백색의 강제 포맷 광선이 세이프존의 물리 경계선에 닿는 찰나, 감쇄 벽 내부의 설계 공식에 의해 모든 마나 에너지가 순수한 '물리적 역학 척력'으로 치환되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앙!

그것은 우주 시스템의 삭제 명령을 정면으로 받아쳐 내는 거대한 방패였다.

백색의 광선은 세이프존의 반구형 장벽에 닿자마자, 마치 거울에 반사된 레이저처럼 하늘 높이 튕겨 나갔다. 반사된 백색 광선이 하늘의 붉은 격자무늬 장벽을 타격하여 역으로 비틀어 놓았다.

"이, 이게 무슨……."

원격 모니터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기선우의 비명이 통신망을 타고 도진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시야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강동구 전체가 백색의 소멸 속에 휩싸여 가루로 변해가는 종말의 한복판. 오직 강도진과 피난민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반경 수 킬로미터의 세이프존 영역만이 자로 잰 듯 완벽한 원형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장벽 바깥은 끝없는 무(無)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나, 장벽 내부는 단 한 조각의 흙먼지조차 흩어지지 않은 채 웅장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시스템의 강제 포맷을…… 지구의 기술력으로 받아쳐 냈다고?"

기선우의 블랙 연산장치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며 그의 손가락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틀렸습니다, 기선우 씨."

도진이 차갑게 응수했다.

"이것은 기술력이 아니라, 당신들이 버린 '하위 10%'의 가치를 등가교환으로 치환한 결과물입니다. 당신의 완벽한 통제는 실패했습니다."

장벽 외부의 소멸 파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강동구의 90%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강도진의 세이프존만이 허공에 떠 있는 요새처럼 고고하게 남았다.

생존자들의 입에서 떨리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태령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고, 백설아는 도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도진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의 고대 분석 렌즈에 기록된 에너지 수치는 0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맷 파동과 세이프존의 척력 장벽이 격돌하면서 발생한 잔여 에너지가 한계점 이상으로 전이되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세이프존을 감싸고 있던 자줏빛 장벽이 푸른색 전류를 내뿜으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경고: 두 세계의 충돌로 인한 시공간 왜곡 현상 발생.] [에너지 전이율 1,200% 돌파.] [좌표 데이터 유실. 현 세이프존 영역의 물리적 위치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도진 씨? 장벽이 이상해요!"

설아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지상에 고착되어 있던 태초의 진흙이 공중으로 붕괴하며, 세이프존 전체가 거대한 엘리베이터처럼 급격하게 하강—아니, 차원의 아래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백색의 무(無)에서, 차가운 금속빛 벽과 기계적 연산 모듈이 끝없이 늘어선 기괴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변해갔다. 하늘도, 대지도 사라진 채, 오직 거대한 홀로그램 회로 기판들이 별자리처럼 빛나는 암흑의 공간.

[알림: 세이프존 영역 전체가 고차원 연산 시스템의 본체 서버 네트워크 중간 방(Sub-Server Node)으로 불시착 전이되었습니다.]

도진의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을 보며, 그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지구를 벗어나, 이 모든 재앙을 조율하는 고차원 시스템의 심장부 내부로 통째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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