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을 찌를 듯한 선홍색 현수막이 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태윤 F&B 직영 복제 매장 '온(溫)가' - 내일 개업! 전 메뉴 무한정 파격 50% 반값 세일 돌입!]

온기 식당의 낡은 유리창 너머로 마주한 그 붉은 글씨들은 마치 서현의 목을 죄어오는 밧줄 같았다. 창틀을 잡은 서현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둔탁하게 두드려 대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강태윤. 그 이름 석 자가 남긴 트라우마는 여전히 서현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차가운 얼음 송곳처럼 돋아나 숨통을 막아왔다.

"서현아, 저 새끼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대놓고 코앞에다가 저런 짓을 해?"

옆에 서 있던 민지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인 민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서현은 대답 대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가스라이팅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숨을 멈추고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현의 뒤편에는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감도는 따뜻한 조리실이 있었고, 매일 밤 이곳을 찾아와 마음을 누이고 가던 단골들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괜찮아, 민지야. 올 줄 알았던 폭풍우야. 조금 일찍 불어닥친 것뿐이야."

서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단단한 뼈대가 들어서 있었다.

이튿날 점심,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온가'의 개업 첫날. 골목길은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 소리와 바람을 넣어 춤추는 거대한 인형이 골목 입구를 가득 메웠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50% 파격 할인'이라는 문구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인근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의 발걸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야, 저기 새로 오픈한 데 오늘 반값이라는데? 가보자!" "대기업에서 만든 거니까 맛은 보장되어 있겠지. 게다가 엄청 싸잖아."

조리실의 소형 CCTV 모니터를 바라보는 서현의 눈길이 무거워졌다. 온기 식당 앞을 지나치던 발걸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맞은편의 화려한 통유리 매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늘 이 시간쯤이면 세 명 중 한 명은 문을 열고 들어왔을 골목길의 인파가, 이제는 온기 식당을 마치 유령 건물처럼 외면한 채 지나쳤다.

셀프 계산대 위에 놓인 '마음 기록 장부'의 화면이 차갑게 반짝였다.

[경고: 일일 방문객 수 전일 대비 85% 감소.] [경고: 영혼의 마진 적자 전환 위기 진입.] [현재 잔고: -12,000원 (특수 식재료 추가 발주로 인한 적자 흐름 감지)] [주의: 적자 상태가 24시간 동안 지속될 경우, 마음 기록 장부 시스템이 영구 정지 및 소멸합니다. 남은 시간: 23시간 45분]

붉은빛의 경고등이 서현의 얼굴을 어둡게 비추었다. 가슴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당장 오늘 밤 안으로 손님들을 되찾아 적자를 메우지 못하면,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치유의 도구였던 이 장부가 영영 사라져 버린다.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서현은 조리대 앞으로 걸어가 칼자루를 꽉 쥐었다. 쇠붙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흐르자, 소란스럽던 머릿속이 씻은 듯이 맑아졌다. 강태윤이 자본과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자신은 오직 맛과 진심으로 맞설 뿐이었다. 서현은 지난번 해금한 '영혼을 깨우는 천연 조미 조화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냉장고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태양초 비정제 고춧가루'의 밀봉을 뜯었다.

공장식 화학 조미료가 흉내 낼 수 없는 극단의 정교함. 그것이 서현이 준비한 칼날이었다.

* *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11시. 맞은편 '온가'의 불빛은 여전히 번쩍였지만, 온기 식당의 홀은 고요하기만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주황빛 전등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때, 매장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딸랑.

서현은 반사적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들어선 이는 초라한 코트 깃을 바짝 올린 노신사였다. 낡은 헌팅캡 아래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고, 어깨는 고단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잔뜩 구부정했다.

그는 며칠 전, 늦은 밤 홀로 찾아와 '버터향이 강한 탄 감자 요리'를 애타게 찾던 그 손님이었다. 당시 서현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주문에 담긴 그리움과 절망을 장부를 통해 읽어냈고, 밤새 감자를 버터에 굴려 가며 겉은 바삭하게 태우고 속은 촉촉하게 익힌 '탄 꿀버터알감자'를 대접했었다.

노신사는 텅 빈 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와 함께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는 펜을 들어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뒤, 방명록 게시판에 조심스럽게 붙였다. 서류 봉투는 계산대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간 뒤, 서현은 조심스럽게 홀로 나와 그가 남긴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거칠지만 단단한 필체였다.

[온기 식당의 주인장에게. 나는 오랜 시간 어둠 속을 헤매던 늙은이요. 정리해고라는 허울 좋은 칼날에 베여 삶의 끝자락에 서 있을 때, 이곳에서 맛본 그 '탄 감자 요리'는 나를 다시 살려놓았소. 내 어린 시절, 가난했던 어머니가 연탄불 위에서 태워가며 만들어 주었던 그 투박한 맛.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요리도 채우지 못했던 내 영혼의 구멍을, 당신의 정성이 완벽하게 메워주었소.

뒤늦게 고백하자면, 내 본명은 박병수요. 과거 태윤 F&B가 구멍가게 수준일 때부터 강태윤의 곁에서 모든 핵심 소스를 개발하고 뼈대를 세웠던 전직 소스 개발본부장이지. 하지만 강태윤은 내 기술을 전부 빼앗은 뒤, 나이가 들고 마진율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나를 쓰레기처럼 버렸다네.

며칠 전, 나는 이 식당의 구석에서 뜻밖의 종이 한 장을 발견했소. 당신이 실수로 흘렸던 '특수 치유 식재료 고가 발주 영수증'이었지. 일반 시장 가격의 몇 배에 달하는 비정제 천연 원료와 희귀 약재들의 원산지가 빼곡히 적힌 그 영수증 말이오.

미련한 사람. 장사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그 무모한 영수증을 보며, 나는 가슴이 쿵쾅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소. 대기업의 마진 지상주의 속에서 영혼을 잃어버렸던 내가, 이곳에서 진짜 '음식의 진심'을 본 것이지.

맞은편에 들어선 가짜들은 껍데기뿐이오. 그들이 사용하는 소스는 내가 만든 기초 포뮬러를 조잡하게 인공 감미료로 복제한 것에 불과하니까. 은혜를 갚고 싶소. 봉투 안에 태윤 F&B 공장식 소스들의 치명적인 화학 첨가물 배합 분석 데이터와, 이를 단숨에 압도할 수 있는 '완전 천연 육수 숙성 수치'를 정리해 두었소. 당신의 그 위대한 고집에 이 기술이 더해진다면, 저 가짜들은 결코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서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끝이 찌릿하게 떨려왔다. 자신이 홀로 조리실에 갇혀 외롭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현은 서둘러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평생을 소스 개발에 바친 장인의 정수가 담긴 수치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온도, 습도, 시간, 그리고 천연 재료들의 배합 비율.

"이거라면…… 할 수 있어."

서현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조리실의 가스불이 일제히 켜지며 주황빛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서현은 셰프 박의 비법 노트에 적힌 '초저온 천연 숙성법'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영혼을 깨우는 천연 조미 조화수'를 융합하기 시작했다.

황태와 표고버섯, 그리고 비정제 천연 암염이 끓는 물 속에서 셰프 박이 제시한 정밀한 시간 단위로 어우러졌다. 1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가혹한 조리 과정이었지만, 서현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가스라이팅으로 짓밟혔던 자존감이 요리 도구를 쥘 때마다 단단한 근육이 되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강태윤, 당신의 가짜는 결코 이 맛을 이길 수 없어."

새벽 내내 조리실을 가득 채운 은은하고 깊은 육수 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로이자 거대한 반격의 서막이었다.

* * *

다음 날 저녁.

맞은편 '온가'는 여전히 손님들로 붐볐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가게를 나오는 직장인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아니, 반값이라서 먹긴 했는데…… 화학 조미료 냄새가 너무 심하지 않냐? 먹고 나니까 속이 엄청 더부룩해." "그러게. 첫 입은 자극적이라 맛있는데, 갈수록 물리고 느끼하네. 속 쓰려 죽겠다."

그들의 투덜거림이 찬 바람을 타고 온기 식당의 문 앞까지 흘러들었다. 바로 그 순간, 온기 식당의 무인 온열 보관함에 새로운 밀키트가 채워졌다. 이름하여 [장인의 천연 육수로 우려낸 치유 얼큰순두부찌개].

기존의 얼큰순두부찌개에 셰프 박의 천연 숙성 기술과 조화수가 더해진, 그야말로 완전한 프리미엄 밀키트였다. 가격은 맞은편 복제 매장보다 비쌌지만, 매장 안으로 들어온 한 손님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카드를 긁었다.

그리고 불과 한 시간 뒤.

온기 식당의 1인용 테이블에서 조용히 찌개를 끓여 먹던 손님이 숟가락을 놓지 못한 채 연신 국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와…… 이거 뭐야?"

남자의 입에서 깊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텁텁함이 전혀 없는, 첫맛은 칼칼하고 끝맛은 한없이 깊고 부드러운 국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온몸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적적인 정화감이 전신을 감쌌다. 남자는 허겁지겁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는, 곧장 무인 계산대로 달려가 추가 밀키트를 세 상자나 더 결제했다.

"여기 진짜 대박이다! 맞은편 쓰레기 음식이랑은 비교도 안 돼!"

소문은 산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인근 직장인 가상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온기 식당의 새로운 밀키트 후기가 폭발적으로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태윤 F&B 카피 매장 갔다가 속 버리고 온기 식당 순두부찌개 먹고 극락 갔다 왔습니다. 진짜 천연의 맛이 뭔지 보여주네요.] [반값 할인에 속지 마세요. 온기는 영혼을 치유하는 맛입니다. 완전 강추!]

퇴근 시간인 저녁 7시가 되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맞은편 '온가'의 매장은 텅텅 비어가는 반면, 온기 식당 앞에는 골목 끝자락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도 온기의 밀키트를 맛보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차례를 기다렸다.

무인 계산대의 '마음 기록 장부'의 수치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결제 완료: 프리미엄 얼큰순두부찌개 1개] [결제 완료: 프리미엄 얼큰순두부찌개 2개] …… [알림: 감정 마진 폭발적 상승! 일일 매출 역대 최고치 경신!] [현재 잔고: +1,240,000원] [적자 상태 완벽 해소. 시스템 안정화 완료.]

조리실의 모니터를 보며 민지가 서현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서현아! 대박이야! 저 사람들 대기 줄 서 있는 것 좀 봐! 맞은편 매장 매니저 얼굴 완전히 흙빛 됐어!"

서현은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줄을 선 손님들의 지친 얼굴에, 따뜻한 찌개 상자를 손에 쥐는 순간 은은한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대기업의 치졸한 할인 공세를, 오직 정직한 맛과 진심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짓밟아버린 완벽한 승리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카타르시스가 차올랐다. 이제 더는 강태윤의 그림자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달빛이 차갑게 내려앉은 자정 무렵. 대기 줄이 모두 정리되고 매장이 한산해진 틈을 타, 온기 식당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내 세 명과, 법원 집행관의 완장을 찬 덩치 큰 남자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붉은색 압류 딱지와 함께 조잡하게 위조된 듯하지만 법원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여기 무인 매장 책임자 누구야? 없나?"

집행관을 자처한 사내가 거만한 목소리로 빈 홀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의 제목이 CCTV 카메라 렌즈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특허 무단 표절 및 영업정지 가처분 결정에 따른 임시 압류 집행장]

강태윤이 보낸 사설 대리인들이었다. 법적 절차의 허점을 악용해 위조된 허위 청구서와 판결문을 들이밀며 무인 매장을 강제로 폐쇄하려는 비열한 수작이었다.

"책임자가 안 나오면 무단 점유 및 특허 침해물로 간주하고, 지금 즉시 매장 내부 기기 일체에 압류 딱지를 부착하겠다!"

사내가 붉은색 스티커를 치켜들며 무인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 빨간 스티커가 마음 기록 장부의 화면에 붙으려는 찰나, 조리실 안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서현의 숨이 턱 막혔다. 저 장부에 손을 대면 모든 기적이 끝난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는 식당 안, 사내의 손끝이 장부를 향해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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