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음 날 정오, 굳게 비어 있는 한낮의 무인 계산대 입구로 검은 대형 명품 가죽 구두를 거만하게 또각거리며 강태윤 태윤 F&B 대표가 스스로 걸어 들어와 영수증 화면을 살기 띤 도발의 상처로 응시했다.
그의 구두 굽이 낡은 나무 바닥을 딛을 때마다 둔탁하고 딱딱한 파열음이 조리실 안쪽까지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조리실의 얇은 벽은 그 소리를 막아주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가시가 되어 서현의 귓가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여기 숨어 있었군, 임서현 대리."
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온 방 안의 공기를 일순간에 얼려버리는 목소리였다.
불투명한 이면 거울 너머로 비치는 사내의 실루엣은 서현이 매일 밤 꿈속에서 자신을 목 조르던 바로 그 악령의 형상이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위로 번뜩이는 안경테, 그리고 상대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특유의 오만한 눈빛. 강태윤은 여전히 타인의 영혼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체하는 방법을 아는 포식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현은 순간 들이쉬던 숨을 멈췄다. 폐포 하나하나가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목구멍이 접착제로 붙여 버린 것처럼 조여들었고, 차가운 바닥 위의 발끝부터 온기가 빠져나갔다. 이대로 바닥이 꺼져 내릴 것만 같은 아득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숨을…… 쉬어야 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서현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두 손으로 가슴을 꽉 움켜쥐었으나 무정형의 공포는 심장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끝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과거 태윤 F&B의 좁은 회의실에서 밤새도록 이어진 강태윤의 폭언, "너 같은 조각품은 밖으로 나가면 하루도 못 버티고 깨져"라던 속삭임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조리실 구석, 작은 싱크대 옆에 놓인 연한 노란색 텀블러가 서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오늘 아침 일찍 진아가 조리실 뒷문 틈으로 살그머니 밀어 넣어두고 간 밀크티였다. 텀블러 표면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사장님, 어제 진짜 고마웠어요.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편의점 밀크티인데, 따뜻하게 데워왔으니까 마시고 힘내요! 오늘 밤에 청소하러 올게요!]
손끝으로 전해지는 텀블러의 은은한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어 가던 서현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녹이기 시작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홍차의 향이 코끝을 스치자, 굳어 있던 흉곽이 조금씩 움직였다. 서현은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고 내뱉은 숨결에 마침내 공포의 잔해들이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작은 식당을 지키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었고, 비대면의 규칙을 존중하며 묵묵히 어둠을 지켜주던 칼럼니스트가 있었다. 그들의 온기가 서현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다.
조리실 밖에서 강태윤은 무인 계산대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화면에는 서현이 마음 기록 장부를 통해 발주했던 내역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전히 미련한 짓을 하고 있군."
태윤은 계산대 화면에 표시된 [특수 치유 식재료 고가 발주 영수증]을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울릉도 독도 해풍 건조 태양초 비정제 고춧가루, 단가 120,000원. 지리산 야생 음나무 진액, 단가 85,000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임 대리, 네가 대기업에서 배운 게 고작 이딴 식의 자선사업인가? 이런 비상식적인 단가로 식재료를 들여오니 마진이 남을 리가 없지. 장부의 숫자 하나 제대로 못 맞추는 꼴이라니. 네가 왜 내 밑에서 낙오자가 되었는지 이 영수증 한 장이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군."
그의 목소리는 조리실 안의 서현에게 정밀한 칼날처럼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서현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불투명 유리창 너머의 강태윤을 똑바로 응시했다. 비록 태윤은 안쪽의 서현을 볼 수 없었지만, 서현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단단한 심지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태윤은 품 안에서 고급 가죽 폴더를 꺼내 무인 계산대 위에 툭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폴더가 열리며 하얀 계약서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말로 할 때 서명해라. 네가 개발한 그 독창적인 소스 레시피와 비법 판권 전체를 태윤 F&B에 양도한다는 계약서다. 대가는 넉넉히 쳐주지. 다시 내 밑으로 들어와 연구원으로 일해라. 그게 네가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식당의 천장과 벽면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미 이 옆 건물의 임대인과 접촉했거든. 통째로 매입해서 우리 태윤 F&B의 초저가형 카피 브랜드를 입점시킬 예정이다. 네가 자랑하는 그 레시피, 대충 흉내 내서 반값에 뿌려버리면 이 얄팍한 골목길 구멍가게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내 손으로 널 다시 한번 완벽하게 짓밟아 주지."
사방이 꽉 막힌 거대한 자본의 벽이 서현을 옥죄어 오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식당의 온 마진율을 위협하고, 자신들의 카피 브랜드로 시장을 침탈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그 순간, 조리실 한구석에 위치한 환기구 겸용 뒷문 틈새로 작은 소음이 들렸다.
스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조리실 안으로 기어들어 온 것은 단골이자 유일한 친구인 박민지였다. 민지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서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옷자락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서현아!"
민지는 서현의 떨리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민지의 뜨거운 체온이 서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용기를 일깨웠다.
"걱정하지 마. 내가 뒤에 있잖아."
민지는 품속에서 고이 접어온 종이 한 장을 꺼내 서현의 손에 살그머니 쥐여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 청년식품창업 대전 신청 팸플릿'이었다.
"이거 봐. 국가에서 공인하는 대회야. 네가 가진 그 독자적인 레시피와 진정성이라면 여기서 무조건 우승할 수 있어. 대기업의 사적인 법적 압박이나 표절 시비도 국가 공인 타이틀 앞에서는 힘을 못 써. 유통권도 정식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러니까 저딴 인간의 가스라이팅에 흔들리지 마."
서현은 팸플릿의 문구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청년의 진심을 담은 한 그릇, 세상을 치유하다.'
그와 동시에 무인 계산대 아래쪽에 붙어 있던 작은 검은색 물체가 떠올랐다. 지난번 유진아가 청소를 하다가 발견했던, 강태윤 측이 몰래 설치해 둔 무단 도청 마이크였다. 저들은 끊임없이 서현의 숨소리마저 감시하며 레시피를 훔쳐 가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서현은 고개를 들어 벽면 가득 붙어 있는 단골들의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따뜻한 밥 한 끼에 살아갈 힘을 얻고 갑니다.] [불면증이 심했는데, 여기 음식만 먹으면 잠이 잘 와요. 감사합니다.]
그 수많은 진심이 서현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흑자 마진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혼의 풍요로움이 그녀의 내면에서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서현은 천천히 조리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도망치는 패배자의 것이 아니었다. 단단한 조리 기구를 쥘 때의 그 놀라운 집중력이 서현의 전신을 감쌌다.
그녀는 무인 계산대와 연결된 조리실 내부 단말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타이핑을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조리실 안에 울려 퍼지는 정갈한 타건음은 마치 승리를 향한 행진곡 같았다.
글자 입력을 마친 서현은 주저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지이잉-.
고요한 식당 홀에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무인 계산대의 영수증 출력구에서 하얀 종이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강태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영수증을 낚아채듯 뜯어냈다. 당연히 굴복의 서명이 적혀 있을 것이라 확신했던 그의 눈동자가, 영수증에 인쇄된 단 한 줄의 문장을 읽는 순간 사정없이 흔들렸다.
[내 영혼의 가치는 탐욕의 노예가 된 당신의 불법 복제 따위와 바꿀 수 없다. 온기는 진심을 파는 곳이지, 도둑에게 영혼을 파는 곳이 아니다.]
차갑고도 묵직한 선언이었다. 가스라이팅의 폭군 앞에서 비대면이라는 자신만의 가장 안전하고도 거대한 방패를 든 채, 오직 타이핑 영수증 한 장으로 그의 추악한 제안을 비웃어 내동댕이치는 완벽한 격상 반격이었다.
"이…… 임서현이 감히!"
강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하게 달아올랐다. 평생 동안 자신의 통제 아래서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사냥감이 감히 자신을 향해 이토록 당당하게 이빨을 드러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너 미쳤어? 내가 누군지 잊은 거야? 내 말 한마디면 네까짓 무인 구멍가게 하나 폐업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당장 문 열고 나와서 무릎 꿇어!"
그가 미친 듯이 조리실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거친 목소리가 고요한 골목길까지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순간.
찰칵! 찰칵! 찰칵!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카메라 플래시가 식당의 통유리창 너머로 연달아 번쩍였다.
"어? 저기 태윤 F&B 강태윤 대표 아니야?" "대기업 대표가 골목길 작은 무인 식당에 와서 협박을 하고 있네? 대박 특종이다!"
유리창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민지가 미리 손을 써둔 언론사 인맥들이었다. 대기업의 갑질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그들의 등장은 강태윤에게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강태윤은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비열한 안경 너머로 당혹감과 수치심이 가득 들어찼다.
"이, 이게 무슨……! 야, 카메라 치워! 당장 안 치워?!"
하지만 플래시는 멈추지 않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박제했다. 강태윤은 결국 계약서 폴더를 챙길 겨를도 없이, 자신의 부하 직원들을 대동하고 도망치듯 매장을 빠져나갔다. 거만하게 또각거리던 구두 소리는 간데없고, 허둥지둥 도망치는 비참한 뒷모습만이 골목길 뒤편으로 사라졌다.
조리실 안에서 모니터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현과 민지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서현아, 우리가 이겼어! 저 인간 도망치는 꼴 좀 봐!" 민지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기뻐했다. 서현 역시 가슴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연대로 트라우마의 거인을 무너뜨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이튿날 점심. 햇살이 내리쬐는 온기 식당 안으로 들어선 서현은 창밖을 내다보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온기 식당 바로 맞은편, 불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낡은 상가 건물의 벽면에 눈을 찌르는 선명한 적색의 대형 외벽 현수막이 장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인부들이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현수막을 팽팽하게 고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현수막에는 굵고 거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태윤 F&B 직영 복제 매장 '온(溫)가' - 내일 개업! 전 메뉴 무한정 파격 50% 반값 세일 돌입!]
강태윤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온기 식당의 이름과 콘셉트를 그대로 베낀 표절 매장이 바로 코앞에 둥지를 틀고, 자본의 힘으로 서현을 완전히 말려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현수막이 마치 서현을 비웃는 거대한 괴물의 혓바닥처럼 보였다. 수지타산의 가혹한 압박 속에서, 과연 서현은 이 거대한 자본의 공습을 버텨내고 식당 '온기'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