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현실성이 없었다.

척추뼈 마디마디를 타고 얼음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오한이 일었다.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훕 들이마시며 자리에 굳어 버렸다.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지며 산소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감각. 과거 태윤 F&B의 숨 막히는 사무실, 사방이 막힌 회의실에서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인격을 잘게 부수던 강태윤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정말 숨어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서현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비단결처럼 매끄러웠고, 그래서 더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마침내 찾아낸 어른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서현은 휴대폰을 쥔 손가락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지만,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며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요동쳤다.

"네가 만든 그 조잡한 무인 식당 말이야. 꽤 재미있더구나."

강태윤은 나직하게 웃었다. 수화기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쥐새끼처럼 숨어서 소꿉놀이하는 건 거기까지 해. 네가 가진 그 쓸데없는 레시피들, 결국 누구 밑에서 누구 돈으로 개발된 건지 잊은 건 아니겠지?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내 밑으로 들어와라. 안 그러면 네가 공들여 만든 그 따뜻한 놀이터,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줄 테니까."

과거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서현의 목을 졸랐. "네가 한 게 뭐가 있어?", "너 같은 애는 내 밑이 아니면 아무 쓸모도 없어." 매일 밤 귀가 먹먹하도록 들었던 가스라이팅의 잔재들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서현의 다리가 꺾이듯 주저앉으려 했다. 또다시 그 무력한 시절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할 것만 같은 공포가 온몸을 지배했다.

'아니야.'

서현은 이가 부딪히는 것을 참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이 아주 미세한 이성의 끈을 잡아주었다. 여기는 태윤 F&B의 차가운 사무실이 아니다. 자신이 피땀 흘려 일구어낸,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자신만의 안식처 '온기'다.

뚝.

서현은 온 힘을 다해 빨간색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휴대폰을 던지듯 조리대 위로 밀쳐버렸다.

"하아... 하아..."

가슴이 격렬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며 과호흡의 전조가 찾아왔다. 눈앞의 사물들이 일그러지고 세상의 소음이 멀어졌다. 당장이라도 이 어두운 조리실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싶었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서현의 손끝에, 조리대 벽면에 붙은 밝은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이 닿았다.

방금 전까지 이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간 유진아가 남겨둔 메모였다.

[언니, 바닥 빤짝빤짝하게 물걸레질까지 다 해놨어요! 내일도 저 얼큰한 거 해주셔야 해요. 약속한 거예요!]

동글동글하고 삐뚤빼뚤한 글씨체. 그 위로 주황빛 조명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서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 작은 종이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종이의 까슬까슬한 촉감이 손가락을 통해 뇌리로 전해지자, 거칠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가운 기계식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였지만, 그것은 분명 진짜 온기였다.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의 음식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이곳에 존재한다. 서현은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보이지 않는 벽 너머의 아이에게 다짐하듯 서현은 깊은 숨을 토해냈다. 떨리던 손끝이 서서히 멈추었다.

그때였다. 딸랑, 하고 매장 문이 열리는 맑은 종소리가 조리실 안의 스피커를 통해 작게 울려 퍼졌다.

서현은 서둘러 마른세수를 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CCTV 모니터를 주시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각, 이 시간에 찾아올 손님은 드물었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것은 검은색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깃이 넓은 외투를 입은 낯선 사내였다. 그는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식탁을 두리번거리거나 메뉴판을 보는 대신, 매장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무언가를 탐색하듯 기묘하게 느렸고, 손끝은 초조하게 꼼지락거렸다.

사내는 천천히 무인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기에 긁는 시늉을 하더니, 짐짓 물건을 떨어뜨린 척 몸을 아래로 푹 숙였다.

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확대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무인 계산대 하단의 어둡고 좁은 틈새를 은밀하게 더듬고 있었다. 아주 작고 검은, 손톱만 한 크기의 기기가 사내의 손끝에서 떨어져 계산대 밑바닥의 금속 프레임에 부착되었다. 초소형 불법 도청 마이크였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주문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매장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주방 안쪽에 놓인 검은 가죽 표지의 '마음 기록 장부' 화면이 짧게 지직거리며 푸른빛을 발했다.

[알림: 미상의 노이즈 수집 기기 포착. 계산대 하단 전자기 신호의 불규칙한 미세 전류 방해 감지. 시스템 구동에 미치는 영향은 0.1% 미만으로 정상 작동 유지.]

하지만 서현은 방금 전 강태윤과의 통화 여파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탓에, 장부 모서리에 아주 작게 스쳐 지나간 그 경고 메시지를 미처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밤늦게 들어온 이상한 손님이 물건을 주워 나갔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가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차가운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장의 문이 다시 한 번 가볍게 흔들리며 열렸다.

이번에 들어선 남자는 이 전의 수상한 사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깃을 빳빳하게 세운 더블코트에 가죽 장갑을 낀 단정한 차림새. 지적인 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는 칼날처럼 예리했고, 입매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굳어 있었다.

유명 푸드 칼럼니스트이자, 가차 없고 냉소적인 비평으로 요식업계의 저승사자라 불리는 한강우였다.

강우는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묻은 보이지 않는 먼지를 확인하듯 손 끝을 비벼본 그는, 이내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무인 심야 식당이라니. 결국은 가식적인 온기 마케팅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조잡한 밀키트 전문점이군. 만드는 이의 얼굴도, 진심도 담기지 않은 음식을 파는 곳이 어떻게 '온기'라는 이름을 참칭하는지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으며, 독설가 특유의 오만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는 오늘 이 식당의 위선적인 정체를 낱낱이 파헤쳐 자신의 칼럼에 잔혹하게 박제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서현의 앞에 놓인 마음 기록 장부가 요란하게 빛을 뿜어내며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주황빛 글씨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듯 선명하게 나타났다.

[새로운 손님 감지: 한강우] · 심리 결핍도: 85% (오만함과 독설의 단단한 성벽 밑에 감춰진, 부친 상실의 깊은 죄책감과 불면의 밤) · 영혼의 허기 상태: '따뜻한 기억의 부재' 임계치 초과. · 해금 레시피: [쌉싸름한 산초기름을 가미한 평양식 온반] [설명: 고집스럽고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겨울밤마다 묵묵히 끓여주던, 맑은 양지 육수에 알싸한 산초 향이 내려앉은 이북식 온반. 원망 뒤에 숨겨진 그리움을 삼키게 만드는 영혼의 해독제.]

서현은 장부의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화면 속 수치는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그의 영혼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남들에게 비수를 꽂는 날카로운 혀를 가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의 수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한 조난자였다.

서현의 손끝이 조리 기구를 가만히 쥐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강태윤의 폭언과 가스라이팅의 상처가 이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 위에 겹쳐 보였다.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온반이라..."

서현은 조용히 가스레인지의 불을 켰다. 푸른 불꽃이 냄비 바닥을 감싸 안으며 경쾌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현은 조리실 냉장고에서 정성껏 우려내어 둔 맑은 양지 육수를 꺼냈다. 기름기를 완벽하게 걷어내어 맑기가 황골빛 유리 같은 육수였다. 갓 지어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을 그릇에 담고, 그 위에 결대로 곱게 찢은 부드러운 쇠고기 고명과 가볍게 구워낸 녹두전을 얇게 썰어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손끝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은은한 산초기름을 딱 한 방울 떨어뜨렸다.

알싸하면서도 가슴을 툭 치는 독특한 향이 조리실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서현은 정성스럽게 차려진 온반 그릇을 1인용 온열 밀키트 보관함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띠링.

홀의 보관함에 주홍색 불빛이 들어오며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문하신 음식을 받아 가세요."

강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보관함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뜨거운 김과 함께 낯선 향이 훅 끼쳐왔다.

"이건..."

강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릇을 꺼내 테이블로 가져온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맑은 고기 육수의 구수한 냄새를 뚫고 올라오는, 쌉싸름하면서도 코끝을 아리게 만드는 이 독특한 산초의 향기.

그는 홀린 듯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국물을 조심스럽게 한 입 떠서 입안에 넣었다.

국물이 혀끝에 닿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찰나, 강우는 숟가락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앗..."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맛이었다.

평생을 차갑고 엄격하게 자신을 다그치기만 했던, 그래서 평생을 원망하고 밀어내기만 했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겨울밤마다 말없이 끓여주던 바로 그 평양식 온반의 맛이었다.

세상의 온갖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산해진미를 맛보고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내던 그였지만, 정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외롭고 고집스러운 맛을 재현해 낸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평생을 찾아 헤넸던, 그러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체념했던 기억의 조각이 지금 이 허름한 무인 식당의 그릇 안에서 완벽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산초의 알싸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가슴속 깊은 곳에 얹혀 있던 단단한 응어리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웠다.

강우는 허겁지겁 숟가락을 움직였다. 체면도, 오만함도 모두 팽개친 채 밥을 국물에 말아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평생을 가두어 두었던 눈물샘이 마침내 터져버렸다.

안경 알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국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버지..."

그는 숟가락을 쥔 손을 덜덜 떨며 흐느꼈다. 독설로 무장했던 그의 차가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아이의 나약한 얼굴만이 남았다. 이 음식은 단순한 밀키트가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을 완벽히 들여다보고 달래주는 기적의 치유제였다.

강우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홀 안쪽의 굳게 닫힌 조리실 문으로 향했다. 이 음식을 만든 사람이 저 너머에 있다. 반드시 만나야 했다.

쾅! 쾅! 쾅!

"안에 계신 거 압니다! 제발 나와 주십시오!"

강우는 미친 듯이 조리실 문을 두드렸다. 나무 문이 거칠게 흔들리며 둔탁한 소음이 고요한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음식을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제발... 제발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매서운 칼럼니스트의 지성은 완전히 날아가 버린 채, 그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문고리를 거칠게 돌려댔다.

조리실 안에서 서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문이 부서질 듯이 울리는 진동과 강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그녀의 대인기피증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호흡이 다시 가빠지고,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안 돼... 오면 안 돼...'

서현은 귀를 막으며 조리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타인과의 직접적인 대면은 그녀에게 일종의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순간, 주방 벽면에 걸린 마음 기록 장부에서 붉은색 사이렌 조명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고음의 경고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위험! 직접 대면 접촉 및 물리적 노출 임박!] [경고: 손님과 직접 마주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순간, 마음 기록 장부의 모든 기적 프로세스는 즉시 정지됩니다.] [긴급 페널티 발동: 대가 위반으로 인한 감정 장부 영구 소멸 시스템 프로세스 개시!]

장부 화면에 거대한 붉은색 숫자가 나타나며 무자비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5] [남은 시간: 4]

서현의 두 눈이 공포로 가득 찼다. 문고리가 거칠게 덜컥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장부의 카운트다운은 멈추지 않았다. 이 문이 열려 한강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적의 장부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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