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은 어둠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번졌다.
무인 계산대의 액정 화면이 기괴한 핏빛으로 물들며 껌벅일 때마다, 조리실 벽면에 길게 늘어진 서현의 그림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위험! 시스템 이상 감지!] [태윤 F&B 법인 결제 카드 잔해 및 내부 유입 자금 신호 포착.] [경고: 적자 전환 즉시 '마음 기록 장부'는 영구 소멸합니다.]
서현은 가슴팍을 꾹 눌러 내렸다. 얇은 면 티셔츠 너머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만져졌다.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목구멍에 딱딱한 모래알이 걸린 것처럼 까끌거렸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강태윤 대표의 방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찾아오던 기분 나쁜 침묵이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네가 만든 기획서, 이거 시장에 나가면 바로 사장되는 쓰레기야. 내가 다듬어 주니까 이만큼이라도 돌아가는 거지. 고마운 줄 알아야지, 서현아.'
그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이 환청처럼 조리실 가득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싱크대 모서리에 허리를 찧었다. 둔탁한 통증이 밀려와서야 간신히 현실의 감각이 돌아왔다.
"아직…… 아니야. 아니야."
서현은 스스로를 달래듯 속삭였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조리대의 끝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자, 쿵쾅거리던 심장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기는 태윤 F&B의 숨 막히는 회의실이 아니었다. 자신이 겨우 마련한 작은 요새, 심야 식당 '온기'였다.
서현은 떨리는 손으로 조리실 안쪽의 CCTV 화면을 응시했다.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 찌개 한 그릇을 비우고 눈물을 흘리며 떠난 사내의 온기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었다.
서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앞치마를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조리실 옆면에 숨겨진 작은 뒷문을 열었다.
스산한 새벽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서울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오래된 골목길은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해서, 마치 세상으로부터 잊힌 섬 같았다. 서현은 고개를 숙인 채 식당 옆 골목 모퉁이에 놓인 파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쓰레기통 주변을 살폈다. 방금 전 다녀간 사내가 버린 듯한 구겨진 영수증 몇 장과 담배꽁초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가로등 불빛을 받아 유난히 매끄러운 광택을 내뿜는 종이 한 장이 서현의 눈에 들어왔다.
서현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올렸다.
네모반듯하게 재단된 고급 수입지. 그 위에는 단정하고 세련된 서체로 이름이 박혀 있었다.
[태윤 F&B 메뉴개발팀 대리 김성민]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렸다. 명함의 모서리가 서현의 살결을 따갑게 찔러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벌써 이곳을 알아채고 사람을 보낸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강태윤은 자신이 골방에 처박혀 서서히 말라 죽기를 바랐을 텐데, 이렇게 멀쩡히 가게를 열고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소름 끼치는 상상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 하자, 서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리지 말자. 내가 만든 밥을 먹고 살아갈 용기를 얻은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서현은 명함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차가운 바람을 크게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서둘러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와 묵직한 뒷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새벽 2시. 가장 깊은 어둠이 도시를 덮는 시간이었다.
서현은 카운터의 붉은 경고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떻게든 마진을 남겨야 했다. 이 기적 같은 '마음 기록 장부'가 사라진다면, 자신 또한 다시 그 어둡고 축축한 방바닥으로 굴러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때, 식당의 유리문 위에 달린 작은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딸랑-.
서현은 반사적으로 조리실 벽의 CC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주 작고 왜소한 실루엣이었다. 낡아서 깃털이 다 빠진 얇은 패딩 점퍼를 입은 여고생이었다. 물이 빠진 청바지 끝단은 해져 있었고, 운동화 뒤축은 사정없이 꺾여 있었다.
아이는 양손으로 편의점의 저가 브랜드 컵라면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식당 안의 따뜻한 주황빛 조명이 낯설고 어색한지, 아이는 입구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며 발끝만 만지작거렸다.
이곳은 셀프 계산대와 온열 밀키트 보관함만 덩그러니 놓인 무인 식당이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는 점이 아이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는지, 아이는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홀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벽면에 붙은 가격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가장 저렴한 메뉴마저도 아이가 가진 주머니 사정에는 버거운 모양이었다. 아이는 컵라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마른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순간, 서현의 조리대 옆에 놓인 무인 계산기 장부의 화면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켜졌다.
띠링.
[새로운 인연의 결핍이 감지되었습니다.] · 대상: 유진아 (18세) · 심리 결핍도: 93% (정서적 방임 및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 · 상태 메시지: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곤 수돗물 한 모금. 육체와 영혼이 모두 굶주려 삶의 한계 게이지가 90%를 돌파했습니다. 따뜻한 온기가 닿지 않으면 영혼의 불꽃이 꺼질 위험이 있습니다.'
화면을 읽어 내려가는 서현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영양실조. 삶의 한계 게이지 90% 돌파.
열여덟의 아이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문장들이었다. 서현은 화면을 더 깊이 터치했다. 장부가 제시하는 치유의 해결책이 서서히 떠올랐다.
[치유 레시피 해금: 얼큰순두부찌개] ※ 특수 조건: 일반 식재료로는 아이의 망가진 위장과 영혼을 달랠 수 없습니다. 장부 전용 상점에서 판매하는 '태양초 비정제 고춧가루'를 사용하여 깊고 부드러운 매운맛을 내야 합니다. · 특수 재료 발주 비용: 45,000원 (원산지: 해발 800m 청정 풍정리 특약 재배)
"사만 오천 원……?"
서현은 턱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 첫 정산으로 얻은 영혼 마진이 고작 38,000원이었다. 그런데 고춧가루 단 한 가지 재료의 발주 비용이 45,000원이라니. 장부의 경고대로 적자 전환이 되면 이 식당의 영혼인 장부 자체가 영구 소멸하게 된다. 머릿속에서 냉정한 수지타산의 계산기가 쉴 새 없이 두들겨졌다.
'이건 미련한 짓이야. 네가 남을 도울 처지니? 네 코가 석 자인데.'
과거 강태윤이 주입했던 차가운 이기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하지만 서현은 화면 너머로 유진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이는 차가운 테이블에 엎드려, 자신이 가져온 컵라면의 포장지만 멍하니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 보이는 그 외롭고 가녀린 실루엣은, 회사에서 버림받고 밤거리를 헤매던 과거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돈은 다시 벌면 돼."
서현은 떨리는 검지손가락으로 장부 화면의 [발주] 버튼을 단호하게 눌렀다.
[결제 완료. '태양초 비정제 고춧가루'가 주방 보관함으로 즉시 전송됩니다.] [현재 매장 마진 잔액: -7,000원 (적자 경고! 24시간 내에 마진을 복구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영구 정지됩니다.)]
붉은 경고음이 나지막하게 울렸지만, 서현은 그것을 무시했다. 주방 벽면의 전송 보관함이 스르륵 열리며, 은은하고 깊은 향을 풍기는 붉은 고춧가루 봉지가 나타났다. 일반 고춧가루처럼 쨍하게 매운 향이 아니라, 가을 햇볕의 따스함과 흙내음이 고스란히 담긴 단맛 도는 매콤한 향이었다.
서현은 서둘러 가스 불을 켰다.
뚝배기에 참기름을 두르고, 풍정리 고춧가루를 한 숟가락 푹 떠서 약한 불에 천천히 볶기 시작했다. 고추기름이 붉고 맑게 피어오르며 주방 안을 따스한 향으로 채웠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를 붓고,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듬뿍 넣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 위에 달걀 하나를 톡 까서 넣자,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위로의 온도가 완성되었다.
서현은 갓 지은 하얀 쌀밥을 그릇 가득 담고, 뚝배기를 쟁반에 올렸다. 그리고 작은 붉은색 포스트잇에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아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날씨가 많이 춥지요. 오늘 밤은 편의점 라면 대신 이 따뜻한 찌개로 속을 채워보는 건 어떨까요? 돈은 받지 않습니다. 맛있게 드셔주시는 것만으로도 이 식당에는 큰 기쁨이 됩니다.]
서현은 조심스럽게 조리실 문틈을 열고, 홀에 있는 3번 온열 보관함에 쟁반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보관함의 작동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홀에 맑은 전자음이 울리자, 엎드려 있던 유진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시선이 3번 보관함으로 향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붉은 순두부찌개와 하얀 쌀밥이 보였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보관함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리문에 붙은 붉은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쪽지의 글씨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나한테…… 주는 거라고?"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은은한 나무 향과 따뜻한 공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조리실의 어둠 속에서 CCTV 화면을 지켜보던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세상의 차가움 대신, 이 온기가 아이에게 무사히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보관함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매콤하고 구수한 냄새에 아이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쟁반을 조심스럽게 꺼내 테이블로 가져간 아이는, 수저를 들고서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숟가락으로 순두부와 국물을 조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앗."
아이가 나직한 탄성을 뱉었다. 부드러운 순두부가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가을 햇살 같은 따뜻한 매운맛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차갑게 굳어 있던 아이의 위장을 부드럽게 깨웠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아이는 허겁지겁 밥을 말아 찌개를 떠먹기 시작했다.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툭, 툭 떨어져 찌개 국물 속으로 가라앉았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부모가 이혼하고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 뒤, 텅 빈 단칸방에서 홀로 차가운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그 길고 시린 밤들이 이 따뜻한 뚝배기 한 그릇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뚝배기 바닥이 보일 때까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냈다.
식사를 마친 유진아는 벌개진 눈으로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낡은 볼펜과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의 한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찢은 아이는 글씨를 꾹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 쪽지를 들고 가 방명록 게시판의 정중앙에 붙였다. 그리고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딸랑-.
아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서현은 조리실 문을 열고 홀로 나왔다. 아이가 머물다 간 자리는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서현은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아이가 남긴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진짜 맛있었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따뜻한 밥은 처음이에요. 저 돈은 정말 한 푼도 없는데, 대신 매일 밤 여기 와서 청소라도 하면 안 돼요? 바닥도 닦고 테이블도 깨끗하게 해 놓을게요. 제발 밥 먹게 해 주세요. 매일 올게요.]
서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사람의 온기를 두려워해 무인 식당이라는 벽을 세웠지만, 그 벽 너머로 건넨 진심이 이렇게 또 다른 온기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때, 주방 안쪽의 무인 계산대 장부가 요란하게 깜빡였다.
띠링! 띠리링!
[기적적인 영혼의 치유가 달성되었습니다!] · 유진아의 심리 결핍도: 93% -> 41%로 급감 (삶의 의지 완벽 회복!) · 특수 성과: 고정 조력자(야간 매장 관리인) 유치 완료. · 시스템 정산 반영: 월 고정 인건비 소모액 '0원' 처리 수렴. 매장 가치 및 운영 안정도 대폭 상승! · 영혼 마진: +92,000원 적립 (적자 상태 완벽 탈출!) · 현재 매장 마진 잔액: +85,000원 (흑자 전환 성공!)
화면의 붉은 경고등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은은하고 따스한 주황빛이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새로운 텍스트가 떠올랐다.
[보상 획득: '영혼을 깨우는 천연 조미 조화수' 레시피가 해금되었습니다.]
서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혹한 마진 압박과 강태윤의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서도, 오직 손님을 향한 따스한 정성만으로 위기를 극복해 낸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밤마다 홀을 깨끗하게 돌보아 줄 든든한 조력자까지 생겼다.
주방 선반 위에 꽂아둔 특수 식재료 고가 발주 영수증이 불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비록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그것은 결코 헛된 낭비가 아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장부의 화면을 잠갔다. 이제야 비로소 안심하고 오늘 밤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리실의 불을 끄고 가방을 챙기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징-. 징-.
적막한 조리실 안에서, 서현의 주머니 속에 넣어둔 개인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현은 멈칫했다.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자 정보 없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침을 꼴깍 삼킨 서현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주 깊고 고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서현의 온몸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드는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 정말 숨어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서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