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마른 모래가 꽉 들어찬 것처럼 버석거리는 공기만이 폐부 언저리를 맴돌았다. 귀가 먹먹해지는 이명 너머로, 차갑게 비웃던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찔렀다.

"임 대리, 네가 우리 회사 아니면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이나 할 것 같아? 네 기획안, 이거 다 쓰레기잖아. 내가 고쳐 써주니까 이만큼이라도 굴러가는 거야. 감사한 줄 알아야지, 어디서 눈을 그렇게 똑바로 떠?"

강태윤. 태윤 F&B의 대표이자, 서현의 영혼을 잘게 부수어 놓은 장본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서현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서현은 싱크대 모서리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렸다. 차가운 타일 바닥의 감각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여기는 서울 변두리, 재개발 예정지 초입의 외진 골목 끝자락에 겨우 마련한 무인 식당 '온기'의 조리실이었다. 홀과 완전히 차단된 이 비좁고 고요한 공간만이 서현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요새였다.

낮 동안의 소란함이 모두 가라앉은 깊은 밤. 골목길을 비추는 외로운 가로등 불빛만이 유리창을 타고 들어와 바닥에 길고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서현은 가슴을 꼬집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하아. 스스로를 달래는 호흡법도 가스라이팅의 깊은 흉터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딸랑.

고요한 정적을 깨고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동시에 쿵, 하고 무거운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크게 울렸다. 서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발소리는 불규칙했고 위태로웠다.

"여기... 아무도 없소? 이봐요! 장사 안 해?"

거칠고 굵은 목소리. 시큼하고 지독한 술 냄새가 조리실 환풍구를 타고 넘어와 코끝을 찔렀다. 서현은 지레 겁을 먹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였지만, 단 한 줌의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대인기피증이라는 지독한 낙인은 그녀를 주방 문 빗장 뒤에 가두어 버렸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 누군가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숨이 막히는 고문이었다.

바깥 홀에서 털썩하며 의자가 사정없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는 둔탁한 소음이 조리실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계만 덩그러니 켜놓고... 사람은 어디 간 거야. 돈은 낼 테니까... 뜨끈한 국물 한 그릇만 좀 줘요. 배가 고파서... 속이 너무 시려서 그래..."

사내의 목소리에는 취기 너머로 지독한 허기와 깊은 슬픔이 찐득하게 묻어 있었다. 서현은 벽에 설치된 조그만 CCTV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화면 속 사내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때가 꼬죄죄하게 탄 양복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어깨는 부러진 날개처럼 힘없이 처져 있었고, 마치 세상의 모든 무게를 혼자 감당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를 돕고 싶다는 마음보다, 문을 열고 나가 이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는 공포가 훨씬 더 컸다. 서현의 눈앞이 노랗게 흐려지며 과호흡 증세가 다시 도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위잉-.

주방 한쪽에 놓인 무인 계산기 화면이 나지막한 구동음을 내며 스스로 밝아졌다. 평소의 차가운 파란색 대기 화면이 아니었다. 모닥불이 서서히 타오를 때처럼 은은하고 따스한 주황색 빛이 온 주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서현은 눈을 깜빡였다. 환각이 아니었다. 모니터 위로 노란 한지 질감의 움직이는 책장 그림이 스르륵 펼쳐지더니, 누군가 붓글씨를 쓰듯 검은 글씨가 빠르게 적혀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 기록 장부] · 방문객: 1호 손님 (피로와 결핍의 방랑자) · 영혼 허기율: 95% (아사 직전) · 심리적 결핍: '어머니의 온기', '가족의 안식처' 상실로 인한 극심한 영혼의 냉증. · 시스템 진단: 현재 손님의 지갑에는 단돈 몇 백 원의 동전뿐이나, 심층적 갈망은 최고조에 달함. · 추천 치유 레시피 해금: '달래냉이된장찌개'

"이게... 대체 뭐지?"

서현은 홀린 듯 화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화면 하단에 붉은색 글씨로 경고이자 규칙인 문구가 추가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 주의: 손님과 대면 접촉하여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하는 순간 장부의 모든 기능이 정지됩니다. 오로지 비대면 밀키트 구성과 방명록 편지로만 소통하십시오. 식당의 월간 운영 마진이 적자로 돌아서면 장부는 영구 소멸합니다.]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 안전거리를 철저히 유지한 채, 오직 요리만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규칙. 그것은 대인기피증에 갇힌 서현에게 내밀어진 가장 안전하고도 완벽한 구원의 밧줄이었다.

화면을 조심스럽게 터치하자, 머릿속으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조리법이 따뜻한 온수처럼 흘러 들어왔다. 된장을 몇 번 체에 걸러내어 텁텁함을 없애야 하는지, 봄나물의 향을 살리기 위해 어느 타이밍에 불을 줄여야 하는지, 칼칼한 청양고추의 배합 비율까지 마치 오랜 세월 손맛을 지켜온 장인처럼 손끝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남자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서현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조리 기구를 꽉 쥐었다. 신기하게도 무거운 쇠 국자를 손에 쥐자 떨리던 손끝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요리는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언어였다.

불을 켜자 주방 안이 금세 따스한 온기로 채워졌다. 서현은 단단하고 하얀 무를 도마 위에 올렸다.

탁. 탁. 탁. 탁.

일정하고 경쾌한 칼질 소리가 조리실 안을 채우자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흩어졌다. 도마 위의 재료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정성을 들이는 만큼, 칼날을 대는 만큼 솔직하고 정직한 모양새로 답해줄 뿐이다. 강태윤처럼 악의를 담아 깎아내리거나 가스라이팅을 하지 않았다.

장부가 지시한 대로, 맑은 우물물처럼 깨끗한 육수에 집된장과 시판 된장을 황금 비율로 섞어 체에 곱게 걸러냈다. 뚝배기 안에서 육수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구수하고 깊은 냄새가 조리실 가득 피어올랐다. 단단한 무가 투명하게 익어갈 즈음, 큼직하게 썬 두부와 애호박, 표고버섯을 아낌없이 넣었다.

마지막 단계는 달래와 냉이였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굳은 땅을 뚫고 자라난 봄나물의 강인한 생명력이 뜨거운 열기와 만나 향긋한 향을 뿜어냈다.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 마당에서 가마솥 끓는 소리를 들으며 맡았던 바로 그 그리운 냄새였다.

서현은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정성스럽게 온열 밀폐 용기에 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정갈하게 담은 밑반찬 세트를 하나의 밀키트 상자에 조심스레 넣었다. 그리고 상자 겉면에 삐뚤빼뚤하지만 온 마음을 담아 포스트잇 한 장을 붙였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따뜻할 때 어서 드세요. - 온기 주인 올림]

그녀는 조리실과 홀을 연결하는 이중 슬라이딩 문을 아주 살며시 열었다. 복도식으로 연결된 무인 온열 보관함 1번 칸에 상자를 밀어 넣고 문을 닫은 뒤, 조리실 안쪽에서 알림 벨 버튼을 눌렀다.

띠링-.

맑고 고운 종소리가 텅 빈 홀에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CCTV 화면 속 남자가 움찔하며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붉은 온기등이 켜진 1번 보관함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주황색 불빛 아래 얌전히 놓인 밀키트 상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보관함 문을 열고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달래냉이된장찌개의 진한 향이 사내의 코끝을 스쳤다.

"이... 이 냄새는..."

수저를 쥔 사내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국물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은 사내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씹을 것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두부와, 입안 가득 번지는 냉이의 쌉싸름한 향이 그의 가슴 깊은 곳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엄마..."

사내의 입에서 참지 못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한 술, 두 술, 찌개를 밥에 슥슥 비벼 허겁지겁 입으로 밀어 넣는 사내의 눈가로 굵은 눈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콧물까지 훌쩍이며 밥을 삼키는 그의 얼굴은 영락없이 길을 잃고 헤매다 집으로 돌아온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자꾸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어, 엄마. 세상 사람들은 다 나보고 쓸모없대.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남자는 조용한 식당 안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독백을 털어놓으며 뚝배기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비웠다. 따뜻한 국물이 그의 차갑게 얼어붙었던 속을 채우고, 짓밟힌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는 치유의 순간이었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사내는 마침내 소매깃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쳐냈다. 그의 얼굴을 어둡게 그늘지게 했던 절망과 피로의 기운이 신기하게도 한풀 꺾여 있었다.

사내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짤랑거리는 100원짜리 동전 몇 개와 함께, 안쪽 깊숙한 곳에서 구겨진 5만 원권 지폐 한 장이 딸려 나왔다. 사내는 잠시 지폐를 내려다보더니, 주방 쪽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무인 계산대 옆 방명록 게시판에 비치된 펜을 들어 서툰 글씨로 마음을 적어 내려갔다.

남자가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딸랑이는 종소리가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듯 조용히 울려 퍼졌다.

식당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서현은 조심스럽게 조리실 문을 열고 홀로 발을 내디뎠다. 누군가의 온기가 아직 따스하게 남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무인 계산대 위에는 사내가 두고 간 구겨진 5만 원권 지폐와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서현은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떼어 내어 읽어 내려갔다.

[지갑에 이 돈밖에 없어서 이것만 두고 갑니다. 오늘 밤, 이 찌개 한 그릇이 저를 살렸습니다. 다시 한번 살아볼 용기를 얻고 갑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뭉클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늘 사람에게 상처받고 이용당해 숨어 지내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넸다는 사실. 그것은 서현에게 있어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한 마음의 구원이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포스트잇 모퉁이를 부드럽게 적셨다.

띠링!

그때 무인 계산기 화면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첫 정산 완료!] · 매출: 50,000원 · 원가 (재료비 및 소모품): 12,000원 · 영혼 마진: +38,000원 (첫 흑자 달성!) · 1호 손님의 심리 결핍도: 95% -> 12%로 극적인 감소. 삶의 의지 회복 완료. · 식당 '온기'의 운영 안정도가 상승합니다.

서현은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전한 요새 안에서, 비대면이라는 거리를 지키며 타인을 치유하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작게 싹텄다. 이 공간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밤하늘의 은은한 달빛처럼 그녀의 마음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 따스한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르륵-.

무인 계산기 화면의 따스한 주황빛이 차갑게 식어가더니, 이내 불길하고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 경고등이 사정없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기계음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붉은 텍스트가 화면 가득 피비린내처럼 쏟아져 내렸다.

[위험! 시스템 이상 감지!] [방금 결제된 5만 원권 지폐 및 투입 자금 정밀 분석 결과...] [태윤 F&B 법인 결제 카드 잔해 및 내부 유입 자금 신호 포착.] [잠재적 침탈 세력의 자금 유입 경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식당 '온기'의 독창적 레시피 강탈 및 강제 적자 전환 시나리오 작동 가능성 대두.] [경고: 적자 전환 즉시 '마음 기록 장부'는 영구 소멸합니다.]

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강태윤. 그 잔인한 지배자의 그림자가 벌써 이 외진 골목길의 작은 식당까지 길게 뻗어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차갑게 얼어붙는 조리실 안에서, 서현은 붉은빛으로 깜빡이는 화면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숨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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