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끝에 닿는 알루미늄 차트판의 서늘함이 유난히 시리다. 늘 환자의 가슴을 열고 닫던 당신의 손앞에 놓인 것은, 날카로운 메스가 아닌 한 장의 행정 처분서다. 보건복지부의 붉은 직인이 찍힌 종이의 헤드라인은 명료하고 잔인하다. ‘의사 면허 영구 박탈’.

이사회와 병원장 세력이 구축한 거대한 카르텔은 견고했다. 그들의 비리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당신의 메스는, 결국 법과 권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칼날에 부러지고 말았다. 수술실 내부를 채우던 규칙적인 바이탈 모니터의 비프음, 조직을 태우며 지혈할 때 나던 보비(Bovie)의 매캐한 냄새, 스크럽 간호사가 손바닥에 탁 소리 나게 얹어주던 메스의 묵직한 촉감. 그 모든 감각이 이제는 완전히 차단된 먼 기억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지혈제 투여하고, 세척(Irrigation) 진행합니다."

마치 어제 일처럼 귓가를 맴도는 수술방의 소음들을 떨치려 당신은 주먹을 꽉 쥔다. 생사의 경계에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병원 권력의 개혁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당신이 지키려 했던 정의는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서 마찰열도 남기지 못한 채 바스러졌다. 당신은 더 이상 환자의 환부를 열고, 뛰지 않는 심장을 마사지할 수 없다. 손을 씻고 멸균 장갑을 끼는 행위조차 법으로 금지된 외부인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의 개인 사물함 안쪽에는 법이 지우지 못한 날것의 기록이 쌓여 있다. 면회실 이면지와 수첩 낱장에 꾹꾹 눌러쓴 수백 장의 진정서들.

‘우리 아이를 살려주신 선생님을 지켜주세요.’ ‘그분의 메스 덕분에 저희 가족이 오늘을 삽니다.’

투박하고 거친 글씨체들 속에는 당신이 살려냈던 환자들의 숨결이, 그들이 되찾은 삶의 박동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비록 의료법전 위에서 당신의 자격은 말소되었을지언정, 고통의 심연에서 건져 올려진 이들의 기억 속에서 당신의 손길은 영원히 불패의 기적으로 남을 것이다.

의국 창밖으로 차가운 겨울비가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천천히 청진기를 내려놓고 흰 가운을 벗어둔다. 가운에 새겨진 외과 교수라는 직함은 사라졌지만, 그 가운을 입고 지켜내고자 했던 생명에 대한 엄숙함만큼은 그 무엇도 앗아가지 못한다. 가장 차가운 추락의 순간, 당신은 비로소 메스 없이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서늘하고도 따뜻한 의사로 완성된다. 당신의 꺾여버린 손길은, 그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순결한 양심의 정점에 도장을 찍으며 조용히 멈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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