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획서야?!"

사장 김광철의 벼락같은 고함이 사장실 유리창을 쨍하게 울립니다. 당신의 손끝이 잘게 떨리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합니다. 회귀 전, 5년을 피눈물 흘리며 덕질했던 내 새끼들, '아스트라(Astra)'의 처절한 해체식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당신입니다. 두 번 다시 그 비극을 반복할 순 없습니다. 청량? 탄산수 같은 청춘? 그런 뻔하디뻔한 컨셉으로는 대형 기획사의 자본력에 밀려 흔적도 없이 바스러질 뿐입니다.

당신이 건넨 기획서의 핵심은 바로 '잔혹 동화'. 미소년의 숲속 방랑, 그 이면의 잔인함과 탐미적인 데카당스입니다.

"사장님, 아스트라의 비주얼 합을 보십시오. 메인 비주얼 류신의 그 병약하면서도 서늘한 눈빛, 메인 보컬 카이의 심장을 긁어내리는 듯한 퇴폐적인 허스키 보이스... 이건 청량이 아니라, 피 묻은 사과를 베어 문 잔혹 동화 속 잔혹한 왕자들일 때 비로소 우주를 뚫고 나갈 오라(Aura)가 완성되는 겁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완벽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숲속, 장미 가시 넝쿨을 감은 멤버들이 턱선을 45도 각도로 꺾으며 카메라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돌립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붉은 루비 조커 메이크업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카롭게 꺾이는 칼군무. 그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보는 이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피의 의식과도 같습니다. 심장을 고문하는 듯한 애절한 고음이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전 세계 케이팝 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게 분명합니다.

실제로 당신이 어젯밤 비공식 계정으로 슬쩍 흘린 아스트라의 '잔혹 동화 풍 무드 보드' 쪼가리는 이미 실시간으로 트위터를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 **[X(구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 **@astra_love_forever:** 야 미친 짤 누구임??? 아스트라 걔네 맞아?? 비주얼 투디 씹어먹었네;; 퇴폐미 치사량 초과함 내 심장 찢어발김ㅠㅠㅠㅠ 오열하는 중ㅠㅠㅠㅠㅠ > └ **@kpop_deok_hu:** ㄴㄹㅇ 분위기 미쳤음;; 잔혹동화 컨셉 기획한 사람 들숨에 재력을 날숨에 건강을 얻으셈 대기업 뺨치는 기획력 무엇? 제발 이대로 컴백해줘 통장 바친다;;;

"안 돼! 이 예산을 봐라! 이런 고딕풍 세트에, 화려한 프릴 의상에, 컴퓨터 그래픽까지 바르면 우리 회사는 컴백도 전에 파산이야!"

김광철 사장이 기획서 예산안을 찢어발길 듯이 흔들며 소리칩니다. 확실히 수억 원에 달하는 잔혹 동화 컨셉의 제작비는, 현재 빛 좋은 개살구조차 못 되는 아스트라의 기획사 형편에 불가능에 가까운 금액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오타쿠들의 가슴속에 시퍼런 불꽃이 튀기 시작했으니까요.

> **[더쿠 - 스퀘어] 아스트라 잔혹 동화 컨셉 티저 가상 시안 돌고 있는 거 봄??** > - 이거 진짜 컴백 스포임? 미친 분위기 독보적이다... 맨날 탄산 청량만 하다가 이런 거 하니까 걍 미남계의 혁명임. > - 메보 고음 찌르는 거 가상 매시업 들었는데 내 귀 녹아내림 극락 그 자체;; > - 중소의 기적 가자ㅠㅠㅠㅠ 제발 기획사 일해라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서라도 이거 구현해내라고!!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서라도 내줘.'

누리꾼의 댓글을 보는 순간, 당신의 뇌세포들이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예산이 한 푼도 없다고요? 그렇다면 이 눈부신 오라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세상에 완벽하게 각인시킬 기상천외한 전략을 쓰면 됩니다.

당신은 떨리는 숨을 고르며, 책상을 탁 치고 일어섭니다. 매서운 눈빛으로 사장을 응시하는 당신의 얼굴에는 이미 확신에 찬 미소가 서려 있습니다.

"사장님. 예산 때문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돈 안 들이고 이 컨셉을 세상에서 가장 힙하게 터뜨릴 방법을 가져오겠습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