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쨍한 가을 햇살이 백송고 메인 스타디움의 인조잔디 위로 쏟아져 내렸다. 초록빛 필드 위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들 사이로, 정적을 깨는 둔탁한 파열음이 그라운드를 가득 채웠다.

퍽! 퍽!

가벼운 캐치볼 소리가 아니었다. 마운드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들은 하나같이 묵직한 궤적을 그리며 미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홈플레이트 뒤편, 그리고 백네트 너머의 관중석에는 평소와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로고가 선명한 구단 바람막이를 걸친 사내들. 그들의 손에는 예외 없이 은빛 스피드건과 두꺼운 가죽 수첩이 들려 있었다. LA, 뉴욕, 보스턴. 메이저리그(MLB)의 거대 자본을 움직이는 아시아 담당 스카우터들이 백송고의 에이스 최태오를 관찰하기 위해 이 조그만 고교 야구장에 정렬한 것이다.

"움직임이 아주 부드럽군. 우측 극상근의 슬라이딩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어. 염증 수치 0.00%의 위력이네."

벤치 안쪽, 이준은 자신의 오른팔을 가볍게 돌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깨 관절을 감싸고 있는 근섬유들이 단 하나의 걸림돌도 없이 매끄럽게 맞물려 돌아갔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승모근이 극상근을 짓눌러 뼈가 으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몸이었다. 74%까지 치솟았던 과부하 부채는 한소희의 아레나 맥스에서 진행된 특수 복구 작업 덕분에 완벽하게 청산되었다. 학부모 카르텔의 온갖 협박과 감시 속에서도, 한소희가 제시한 '아로마 나노 리커버리 세션'의 유일한 피임상자가 되겠다는 계약은 신의 한 수였다.

`[타격 회계 장부 동기화 완료]` `[과부하 부채: 0.00%]` `[우측 어깨 가동률: 100.00% (PERFECT)]`

뇌신경망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푸른빛의 스탯 창이 이준의 시야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완벽하게 리셋된 육체. 전율에 가까운 해방감이 척수를 타고 짜릿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벤치 옆에 붙은 화이트보드판을 바라보는 이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백팀 선발 라인업] 1. 중견수 김호영 2. 우익수 최민 ... 8. 포수 박민우 9. 좌익수 임태지 대타: 이준

백팀의 라인업 가장 밑바닥, 지저분한 매직 글씨로 짓눌려 쓰인 세 글자. 이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베이스볼 카드를 들고 지켜보는 이 중요한 청백전에서, 이준은 선발 라인업에서 완전히 배제당해 있었다. 학부모 카르텔의 입김이 닿은 청팀은 최태오를 필두로 쟁쟁한 주전들이 포진해 있었고, 비주류와 후보들로 채워진 백팀의 벤치 구석에 이준을 처박아 둔 것이다. 자신들의 자녀들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회귀 전에도 늘 써먹던 야비한 은폐 전술이었다.

"준아, 기분 더럽 제?"

장비를 챙기던 박민우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가죽 결이 아주 촘촘하게 다듬어진 프로급 포수 미트가 들려 있었다.

"감독 영감탱이, 대놓고 카르텔 애새끼들만 밀어주려고 작정을 했다. 스카우터들 눈앞에서 네 이름 석 자는 아예 보여주지도 않겠다는 소리 아이가."

이준은 대답 대신 박민우의 손에 들린 미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미트는 단순한 장비가 아니었다. 과거 최태오의 전담 포수 시절, 녀석이 던지는 구질과 사인의 미세한 손가락 뒤틀림을 훔쳐내기 위해 민우가 안쪽 가죽을 미세하게 깎아내고 특수 보강재를 덧대어 개조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냥 도구였다.

"민우야."

"어?"

"그 미트, 오늘 쓸 거지?"

"당연하지! 내 목숨줄 같은 건데."

"좋아. 1회부터 청팀 투수들이 던지는 구질 배합, 그리고 마운드 위 최태오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전부 그 미트로 나한테 중계해라."

박민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중계라니? 어떻게?"

"우리가 야간에 제2체력단련실에서 연습했던 대로 하면 돼. 네가 포수 마스크 뒤에서 미트를 쥐는 각도, 검지를 가죽 홈에 밀어 넣는 깊이에 따라 난 청팀 배터리의 사인을 100% 읽어낼 수 있으니까."

이준의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설계가 끝난 상태였다.

강인수 감독은 이준을 대타로 처박아 두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 확신했을 것이다. 특히 지난번 지하 단련실에서 이준이 불법 개조된 피칭 머신을 155km 과부하 상태로 돌려 완파해 버렸을 때, 강인수는 자신의 혹사 공작 무기가 박살 난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제어 보드의 내부 칩을 이준이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대놓고 퇴출은 못 하고, 그저 벤치에 묶어두는 졸렬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준은 그 졸렬함을 비웃듯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내가 타석에 서지 않아도, 경기는 이미 내 손바닥 안이다."

플레이볼 수신호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백송고 메인 호각 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관중석 맨 앞줄에 앉아 스피드건을 마운드로 겨냥했다. 청팀의 선발은 역시나 카르텔의 황태자, 최태오였다.

쉬익-! 쾅!

"스트라이크!"

최태오의 초구가 백팀 1번 타자의 몸쪽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47km/h. 스카우터들이 일제히 수첩에 무언가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마운드 위의 최태오는 턱을 치켜들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백팀의 수비가 시작되자, 그라운드의 분위기는 기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백팀의 선발 포수로 나선 박민우가 홈플레이트 뒤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가슴팍에 밀착된 개조 미트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미트 가죽 안쪽에 숨겨진 반사 패널과 특수 조율 각도가 벤치에 앉아 있는 이준의 눈에 정확히 포착되었다.

`[동기화 신호 감지]` `[박민우의 수신호 연산 중...]` `[상대 타자: 청팀 1번 이현우]` `[볼 배합 예측: 아웃코스 하이 패스트볼 -> 인코스 슬라이더]`

장부의 예측은 단 0.1초 만에 이준의 망막 위에 엑스레이처럼 전개되었다. 이준은 벤치에서 가볍게 오른쪽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 시그널을 확인한 박민우가 즉시 투수에게 사인을 냈다.

백팀의 투수는 카르텔에서 소외된 평범한 우완 볼러였다. 구속은 고작 130km대 중반에 불과한 흙수저 투수. 하지만 박민우의 미트가 요구한 코스는 절묘했다.

파앗! 퍽!

"스트라이크 아웃!"

청팀의 1번 타자가 어이없다는 듯 배트를 허공에 휘둘렀다. 완전히 타이밍을 빼앗긴 헛스윙이었다.

"오?"

뉴욕 양키스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외국인 스카우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스피드건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마운드가 아닌, 홈플레이트 뒤에서 벌떡 일어나 투수에게 공을 던져주는 포수 박민우에게 꽂혔다.

"저 포수, 볼 배합이 아주 영리한데? 투수의 느린 구속을 완벽하게 커버하고 있어."

한 번 시작된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2회 초, 3회 초가 진행될수록 백팀의 수비는 마치 철벽과도 같았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청팀이 압도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박민우가 이끄는 백팀의 마운드는 단 한 점의 허용도 없이 청팀의 카르텔 타선을 이닝마다 삼자범퇴로 요리해 나갔다.

박민우의 개조 미트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프레이밍과, 이준의 타격 회계 장부가 실시간으로 짚어내는 상대 타자들의 핫앤콜드 존(Hot & Cold Zone) 연산 결과가 완벽하게 결합한 결과물이었다.

"나이스 볼! 좋아, 그대로 가자!"

박민우가 우렁찬 목소리로 그라운드를 지휘했다. 그의 우직하고 우호적인 동료애가 백팀 후보 선수들의 사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반면, 청팀 벤치의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강인수 감독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벤치 앞을 서성였다. 그의 시선이 관중석에 앉은 스카우터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이제 최태오의 강속구뿐만 아니라, 백팀의 포수 박민우의 플레이를 집중 분석하며 캠코더를 돌리고 있었다.

"저 포수 물건이네. 프레이밍할 때 미트 끝을 미세하게 올리는 동작이 아주 자연스러워. 심판의 판정을 완전히 훔치고 있어."

"게다가 볼 배합 템포가 예술이야. 상대 타자들의 심리를 완벽하게 읽고 들어오네."

스카우터들의 찬사가 백네트 너머로 새어 나왔다. 강인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카르텔의 시나리오가 완전히 망가진다. 백팀의 후보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특히 저 박민우라는 녀석은 최태오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해야 했다.

"감독님."

청팀의 에이스 최태오가 마운드에서 내려와 씩씩거리며 강인수에게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는 핏대가 솟아 있었다.

"백팀 투수 새끼들 공은 깃털 같은데, 왜 우리 애들이 타이밍을 전혀 못 잡는 겁니까? 저 새끼들, 우리 사인 훔치는 거 아니에요?"

"닥쳐라, 태오야. 스카우터들이 보고 있다. 품위를 지켜."

강인수가 신경질적으로 최태오를 제지했지만, 그의 등 뒤로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이 기묘한 흐름을 깨뜨리고, 청팀의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자극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스카우터들의 시선을 다시 마운드 위의 최태오에게 집중시켜야 했다.

강인수의 독사 같은 눈동자가 백팀 벤치 구석,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이준에게 닿았다.

'이준... 네놈이 아무리 기계를 부수고 기고만장해도, 결국 내 손바닥 안의 고등학생일 뿐이다.'

강인수는 이준의 타격 재능만큼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이준이 타석에 들어서서 최태오와 맞붙는다면, 스카우터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킬 수 있는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될 터였다. 그리고 최태오가 이준을 삼진으로 돌려세운다면, 최태오의 가치는 하늘을 찌를 것이 분명했다.

강인수가 백팀 벤치를 향해 거칠게 걸어갔다.

"이준."

낮고 압박감이 실린 목소리가 벤치 안을 울렸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인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거울처럼 맑고, 차가웠다.

"예, 감독님."

"대타 준비해라. 다음 이닝, 원아웃 주자 2루 상황에 네가 나간다."

강인수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보는 앞이다. 네가 진짜 천재인지, 아니면 그냥 입만 살아있는 껍데기인지 증명해 봐라. 만약 여기서 무기력하게 물러난다면, 앞으로 네 자리는 영원히 이 벤치 구석이 될 거다."

명백한 도발이자 협박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을 뿐이었다.

이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이 벤치에 기대어 있던 무거운 검은색 금속 배트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신경을 깨웠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과 함께 이준은 렉가드를 차고 헬멧을 고쳐 썼다.

그가 벤치 밖으로 걸어 나오자, 백네트 너머의 스카우터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첩 페이지가 거칠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온다. 백송고의 숨겨진 괴물 타자."

"부상 때문에 은퇴 기로에 섰다더니, 몸 상태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이준은 타석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배트 끝을 모래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그의 걸음걸이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마운드 위에서 선발 완봉승을 확신하고 있던 에이스 최태오의 시선이 이준에게 고정되었다. 녀석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이내 광기 어린 미소로 일그러졌다.

"결국 기어 나왔냐, 이준?"

최태오가 글러브를 낀 손으로 공을 강하게 쥐어짜며, 손가락 뼈소리를 뚝, 뚝 내기 시작했다.

"네 어깨가 완전히 박살 나는 꼴을 오늘 여기서 전 세계에 보여주마."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타석에 들어서며 배트 끝을 마운드의 최태오를 향해 가볍게 겨누었을 뿐이다.

`[상대 투수: 최태오]` `[시그니처 구질 분석 중...]` `[고속 슬라이더 회전수: 2610 RPM]` `[결함 감지: 검지 손가락 끝 미끄러짐으로 인한 0.04초의 궤적 왜곡]`

이준의 입꼬리가 차갑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던져봐, 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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