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ry, Lee. We can't risk it.”
귀를 찌르는 영어 발음은 차가웠다. 서른두 살의 이준은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닿은 곳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였다. 유니폼 소매 아래로 삐져나온, 지네처럼 흉측하게 얽어맨 수술 자국이 보였다. 세 차례의 수술. 인공 관절과 나사못으로 간신히 고정해 둔,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관절이었다.
미국 플로리다의 밀폐된 입단 테스트장.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한때 아시아를 뒤흔들 뻔했던 천재 타자는 이제 배트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퇴물에 불과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아직 보여주지 못한 타격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이봐, 리. 네 어깨는 이미 죽었어. 야구는 끝났다고.”
어깨를 타고 올라온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 뼈와 뼈가 맞부딪히며 내는 듯한 삐걱거림.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머릿속이 찌르르 울리며 시야가 번졌다. 뜨거운 열기가 고막을 직접 때렸다. 백송고등학교 시절, 감독과 카르텔의 강요로 진통제를 대여섯 알씩 삼키며 타석에 들어섰던 그 지옥 같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깨가 타들어 갔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과 함께 이준은 정신을 잃었다.
***
훅, 하고 숨을 들이켰다.
허파 가득 들어찬 것은 플로리다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아니었다. 비린내 나는 땀 냄새, 녹슨 쇠붙이의 금속성 악취, 그리고 오래된 고무 매트의 퀴퀴한 습기였다.
이준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며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거칠고 단단한 초록색 타격 매트였다.
“하아, 하아……!”
이준은 다급히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흉터가 없었다. 지네처럼 어깨를 파먹고 있던 세 줄기의 수술 자국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손끝에 느껴지는 것은 탄력 있고 단단한, 아직 파괴되지 않은 젊은 근육의 질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스름한 백열등 하나가 깜빡이며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좁고 밀폐된 공간. 백송고등학교 본관 지하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아무도 찾지 않는 ‘제2체력단련실’이었다.
벽에 걸린 깨진 거울 속으로 앳된 얼굴이 비쳤다.
날카로운 눈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짧은 머리카락.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파란색 글자.
[白松]
백송고등학교 야구부의 유니폼이었다.
“내가…… 돌아온 건가?”
멍하니 손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생생한 감각이 살아 있었다. 서른둘의 쓸쓸한 은퇴 선수가 아닌, 열여덟 살의 고교 유망주 이준의 육체였다. 바로 이 시기였다. 우측 어깨 회전근개에 미세한 파열이 시작되었음에도, 학부모 카르텔의 압박과 강인수 감독의 무자비한 혹사로 인해 진통제를 버티며 배트를 돌려야 했던 그 저주받은 고등학교 2학년의 가을.
어깨를 가볍게 돌려보았다. 관절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파열의 전조가 시작된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과거와 똑같이 어깨가 완전히 파괴되어 몰락할 터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삐이이익—!
[시스템 동기화 완료: 주체 ‘이준’의 뇌신경망과 근섬유 상태를 스캔합니다.] [‘타격 회계 장부(打擊 會計 帳簿)’를 개설합니다.]
“……!”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홀로그램 장부가 펼쳐졌다.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금융 가계부와 물리 역학 그래프가 결합된 형태의 인터페이스였다. 이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보유자: 이준 (18세)] [신체 상태: 우측 회전근개 극상근 미세 손상 진행 중 (가동률 88.5%)] [근섬유 수축 속도: 0.12초 (상위 3.2%)] [잠재 타격 임팩트 파워: 94.2 (최적화 미적용)]
글자들이 뇌리에 직접 박히듯 선명하게 읽혔다.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지만, 푸른빛의 장부는 이준의 안구 움직임을 따라 고스란히 고정되어 움직였다.
[타격 회계 장부 기능 설명] - 투구 연산: 상대 투수가 투구하는 순간, 구속, 회전수, 궤적을 실시간 소수점 단위로 분석하여 100% 확률의 홈런 스위트스폿을 시각화합니다. - 근육 최적화: 연산된 타격 지점에 배트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보유자의 근섬유와 신경망을 강제로 오버클럭하여 조율합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문구였다. 투수의 공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몸을 강제로 조율해 100% 홈런을 칠 수 있게 만든다니. 심장이 고동쳤다. 이것만 있다면 그 어떤 투수의 공이라도 담장 밖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장부의 밑바닥에는 핏빛처럼 붉은 글씨로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 주의: 과부하 부채 (Overload Debt)] - 장부를 활성화하여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타격을 감행할 때마다 ‘피로도 부채’가 실시간으로 누적됩니다. - 현재 누적 부채: 0.00% - 부채 상환 데드라인: 매주 일요일 24:00 (미상환 시 누적된 손상이 즉각 실체화되며, 우측 어깨 회전근개 영구 파열이 도래합니다.)
“부채…….”
이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과거의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갔던 그 끔찍한 부상이, 이 사기적인 능력을 쓸 때마다 ‘부채’라는 이름으로 쌓인다는 뜻이었다. 한계를 넘는 타격을 할 때마다 근육과 인대에 미세 손상이 누적되고, 이를 정해진 기간 내에 리커버리로 ‘상환’하지 못하면 즉사 수준의 부상이 터진다.
엄청난 기회이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하지만…….”
이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통증을 자아냈다.
어깨가 아예 부서져 배트조차 잡지 못했던 서른의 절망에 비하면, 이 정도 리스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관리하면 된다. 철저하게 통제하고 계산하여, 부채가 임계점을 넘기 전에 상환하면 그만이었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2체력단련실 내부를 응시했다.
과거 백송고 야구부의 추악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학부모 카르텔. 동료들의 침묵과 배신.
기업인과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후원회는 자신들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배경이 없고 재능만 있는 이준 같은 비주류 선수들을 철저히 소모품으로 부렸다. 에이스 최태오의 어깨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준에게 무리한 투구를 강요했고, 타석에서는 혹독한 훈련량을 강제했다. 감독 강인수는 그 대가로 카르텔로부터 거액의 리베이트를 챙겼다.
“더는 그렇게 살지 않아.”
이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태자 최태오를 위해 날개가 꺾여야 했던 과거의 이준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한 계산과 통제하에, 이 타격 장부를 무기로 삼아 카르텔을 짓밟고 일어설 것이다.
이준은 체력단련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반쯤 녹슨 낡은 피칭 머신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원들이 거의 쓰지 않는 구식 기계였다.
이준은 피칭 머신의 제어 보드로 시선을 내렸다.
“……이건?”
미간이 좁혀졌다. 기계 뒤편으로 연결된 조작 케이블이 기이한 형태로 개조되어 있었다. 정상적인 수치 제어 장치를 무시하고, 강제로 신호를 증폭시키는 구리선이 덧대어져 있었다. 제어 기판의 다이얼은 최고 속도인 ‘155km’ 과부하 영역에 인위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조작 케이블의 피복은 군데군데 벗겨져 미세하게 스파크가 튀는 상태였다.
이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기계는 단순한 방치품이 아니었다. 누군가 비주류 부원들에게 억지 훈련을 시키거나, 부상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조작해 둔 혹사 무기였다. 이준은 그 개조된 배선의 형태와 고정된 다이얼의 수치를 머릿속에 정밀하게 각인시켰다.
‘기억해 두지. 강인수, 네놈이 이 기계로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이준은 바닥에 놓인 알루미늄 배트를 들어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배트를 가볍게 쥔 채, 홈플레이트 가상의 선에 발을 맞추어 섰다.
스탠스를 취하자 눈앞의 장부가 요동쳤다.
[실시간 타격 자세 분석 중……] - 무게중심: 뒤쪽으로 6.2% 편향. - 그립 악력: 우측 가동 범위 제한으로 인해 왼손에 과도한 힘 분산(전달 효율 82%). - 추천 조정: 왼발의 위치를 외측으로 1.2cm 이동, 골반 회전 각도를 3도 하향 조정할 것.
장부의 지시에 따라 이준은 천천히 왼발을 옮겼다. 배트를 쥔 손목의 각도를 미세하게 비틀었다.
스윽.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의 욱신거림이 신기할 정도로 가라앉으며, 근육의 긴장이 가장 효율적인 상태로 재배치되었다.
“이거다.”
이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지금까지의 야구가 감각과 본능에 의존한 무모한 몸짓이었다면, 지금의 야구는 완벽하게 계산된 수학이자 역학이었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공식이 머릿속에 정립되고 있었다.
이준은 배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두운 체력단련실 안에서, 오직 이준의 숨소리와 배트가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철커덩—!
고요를 깨뜨리는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가 복도에서 울렸다.
이준은 동작을 멈췄다.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 지하 제2체력단련실로 접근하고 있었다. 야간 통행이 금지된 시간, 더구나 이 구석진 폐쇄 구역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뚜벅. 뚜벅. 뚜벅.
묵직하고 거만한 발걸음 소리였다. 발바닥 전체로 지면을 꾹꾹 누르며 걷는, 특유의 오만함이 묻어나는 걸음걸이.
이준은 그 발소리의 주인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백송고 야구부의 황태자이자, 학부모 카르텔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특혜를 누렸던 백송고의 에이스. 이준의 어깨를 갈아 넣는 데 가장 앞장섰던 장본인.
최태오였다.
발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덜컹! 덜컹!
문고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밤마다 걸어 잠그는 쇠사슬 자물쇠가 쇠창살에 부딪히며 신경질적인 소음을 내뿜었다.
“어이, 안에 누구 있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앳되었지만, 감출 수 없는 오만함과 불쾌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
“문 열어라. 안에 불 켜진 거 다 보이니까.”
이준은 배트를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배트 끝을 문 쪽으로 정확히 겨냥한 채, 어둠 속에서 문을 노려보았다.
쿵! 쿵! 쿵!
자물쇠가 부서질 듯한 기세로 문이 흔들렸다. 거친 발길질이 문짝을 때렸다. 녹슨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이윽고.
콰아앙—!
거센 충격과 함께 낡은 자물쇠 고리가 허무하게 뜯겨 나갔다. 문이 활짝 열리며 복도의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어두운 체력단련실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 자욱한 불빛을 등지고,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백송고 에이스 유니폼을 입고, 어깨에 값비싼 글러브를 걸친 채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있는 녀석.
최태오였다.
최태오는 체력단련실 구석에 배트를 들고 서 있는 이준을 발견하자마자, 비열한 비웃음을 흘렸다.
“아, 뭐야. 이준 너였냐? 이 밤중에 여기서 쥐새끼처럼 뭐 하고 자빠졌냐?”
최태오가 침을 뱉듯 뱉어낸 말에, 이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끝에 닿는 배트의 감촉을 느끼며,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눈앞의 장부가 최태오를 향해 붉은빛의 경고등을 깜빡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