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인격들이 슬슬 네 뇌를 완전히 파먹고 있을 텐데. 기한은 앞으로 사흘이야."

귓가에 남은 서하진의 잔향은 뱀의 비늘처럼 차갑고 끈적거렸다.

철문이 닫히는 둔탁한 금속음이 취조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깨진 유리 파편 같은 침묵 속에서, 이현의 왼쪽 손목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죽 구속대에 묶인 살갗이 쓸려 붉은 진물이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서늘한 시계 침 소리가 이현의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사흘.

그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뇌세포의 사멸 주기를 계산한 살인마의 정밀한 예고장이었다.

"정이현, 정신 차려. 저 새끼가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민도혁 형사가 이현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이현의 차가운 뺨에 닿았다. 민도혁의 눈동자는 초조함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죽 재킷에서 풍기는 눅눅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그의 의식은 현실의 가죽 구속대를 뚫고, 머릿속 가장 깊은 심연으로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기묘한 부유감. 사방의 소음이 아득해지며, 눈앞의 취조실 풍경이 찢어지듯 갈라졌다.

사방이 깨진 유리 거울로 둘러싸인 방. 이현의 무의식이 구축한 가상의 밀실, '거울의 방'이었다.

기압이 급격히 떨어지며 고막이 먹먹해졌다. 사방에 매달린 거울 파편들이 빛을 반사하며 이현의 일그러진 얼굴을 수천 개로 복제해 내고 있었다. 그 거울의 중심에, 붉은 가죽 재킷을 걸친 사내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정이현의 행동 분석 인격, 백행동이었다.

"어이, 천재 분석가 나리."

백행동이 침을 뱉으며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맹수의 그것과 같은 사나운 폭력성이 깃들어 있었다.

"바깥에서 그 하얗고 말끔한 새끼한테 아주 탈탈 털리고 오셨더만? 사흘이라며? 네 그 잘난 대가리가 썩어 문드러질 시간이 말이야."

백행동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육체의 제어권을 당장이라도 빼앗겠다는 탐욕이 그의 날카로운 눈빛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현이 무너지면, 이 뇌의 주인은 자신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의 여유였다.

이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안색을 외면하며, 백행동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비켜."

"하? 미치셨나. 사흘 뒤면 죽을 목숨이 어디서 명령질이야?"

백행동이 주먹을 쥐며 다가왔다. 그의 굵은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현은 백행동의 위협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그의 팔을 낚아챘다. 정확히는 백행동이 입고 있는 가죽 재킷의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뭐 하는 짓거리야, 이 새끼가!"

백행동이 이현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내팽개치려 했다. 가상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뇌가 인지하는 물리적 충격은 실재했다. 이현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번쩍였고,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돌았다.

하지만 이현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억센 악력으로 백행동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곳이었다.

거칠게 그을린 백행동의 가상 신체 손목 피부 위로,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게 돋아난 수술 흉터가 보였다. 칼로 살을 째고 무언가를 이식한 뒤 다급하게 꿰맨 듯한 울퉁불퉁한 자국. 그리고 그 흉터 가장자리에 문신처럼 박혀 있는 다섯 글자.

[HN-09]

"이거 놓으라고 했다."

백행동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의 껄렁한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며 이현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목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 이현의 온몸을 지배했다. 숨이 막혀오고, 머릿속 뇌세포들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브레인 필터'의 경고음이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탐정 인격들과의 마찰로 인한 실시간 뇌세포 사멸 기제였다.

이현은 목이 졸린 상태에서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백행동을 똑바로 응시했다.

"HN-09."

이현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뱉어냈다.

"네 가상 신체에 새겨진 이 낙인. 그리고 내 현실 육체의 왼쪽 손목에 남아 있는 동일한 수술 흉터. 넌 이게 단순한 무의식의 낙서라고 생각했나?"

백행동의 손귀에 힘이 미세하게 빠졌다. 그의 눈동자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민도혁 형사가 나한테 보여준 현실 수용소 배정 대장 서류를 기억하나?"

이현은 숨을 몰아쉬며 백행동의 손을 뿌리쳤다. 목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지만, 이현의 이성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프로파일러로서 상대의 심리적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순간이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비밀 수용 구역 3층. 그곳에서 진행된 뇌 개조 및 임상실험 대상자 명단. 그 명단의 아홉 번째 칸에 적혀 있던 이름."

이현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백행동의 눈동자가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거기 적힌 이름은 정이현이 아니었어. '백강현'. 전직 강력계 형사이자, 3년 전 하이퍼 네스트의 인체 실험 도중 의사사망 처리된 인물."

"닥쳐... 입 닥쳐!"

백행동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거울의 방 사방이 찌르르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왜곡과 진실이 충돌하고 있었다.

"너는 내 뇌가 만들어낸 단순한 ‘행동 분석’의 가상 인격이 아니야."

이현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예리하게 백행동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갔다.

"하진의 설계와 하이퍼 네스트의 실험에 의해 내 뇌세포 속에 강제로 이식된, 실제 사자의 기억 조각이지. 넌 인간 백강현의 잔해다."

침묵이 방 안을 지배했다.

백행동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깨진 거울 조각 사이를 맴돌았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HN-09'라는 일련번호가 붉은 핏빛으로 번쩍이며 맥박 치듯 요동쳤다. 그것은 하이퍼 네스트가 자행한 추악한 실험의 낙인이자,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흉터였다.

"내가... 형사였다고?"

백행동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손. 범인을 제압하고, 총을 쥐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내뻗었던 그 손이었다.

"말도 안 돼. 난 정이현 네 놈의 대가리 속에서 태어난 기생충일 뿐이야. 널 죽이고 내가 나가면 그만인..."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이현이 손가락을 퉁겼다. 거울의 방 한편에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로직이 이현을 파멸시키기 위해 제시했던 가상 살인 현장의 이미지였다.

"한로직이 설계했던 가상 살인 현장.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은 22시 12분이었지. 한로직은 정밀한 수학적 연역으로 그 시간을 도출해 냈고, 나에게 그 시간대의 알리바이를 요구했다. 내 뇌세포를 파괴하기 위해서."

이현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하지만 거기엔 미세한 3분의 오차가 존재했어. 실제 사망 시각은 22시 09분이었지. 그 3분의 차이가 왜 생겼는지 아나?"

백행동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체 안치실의 공조 온도 저하 때문이 아니야. 한로직이 참고한 데이터 자체가 하이퍼 네스트에 의해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오염된 3분의 오차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불쾌해했던 건 바로 너였어, 백행동."

이현이 백행동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형사로서의 네 신체 기억이, 그 현장의 위조된 시간선을 직관적으로 거부했던 거야. 네 뇌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어. 네가 하이퍼 네스트의 조작된 실험 희생자라는 사실을."

백행동의 붉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노와 광기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아..."

그의 입에서 짐승의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억의 봉인이 풀리는 고통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리고 왜 이 차가운 뇌 속 감옥에 갇혀 괴물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참혹한 진실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그들은 네 기억을 지우고 내 뇌의 방어 기제 속에 처박아 두었어. 네가 스스로를 정이현의 악한 인격이라 믿으며 자멸하도록 설계한 거지."

이현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무게감이 실렸다. 그것은 감정 없는 분석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동료를 잃은 자의, 혹은 같은 심연을 공유하는 공범자로서의 기이한 연대감이었다.

"백강현 형사."

이현이 그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나를 죽이고 육체를 차지해 봤자, 넌 하이퍼 네스트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다시 박제될 뿐이다. 서하진이 원하는 설계대로 놀아나는 쓰레기가 되고 싶나?"

백행동이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적의가 씻겨 내려가고, 오직 서하진과 하이퍼 네스트를 향한 극렬한 증오만이 남았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백행동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 안에는 형사로서의 단단한 심지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네 신체 분석 데이터를 내 연역 회로와 완전히 동기화해라. 네가 가진 행동 분석 능력을 내 이성과 결합하는 거야. 서하진이 준 사흘의 기한 동안, 우리는 하이퍼 네스트의 심장을 찢어발길 무기를 만든다."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백행동은 잠시 이현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거친 손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화아악!

그 순간, 거울의 방 전체가 눈이 시릴 정도의 백색 광명으로 가득 찼다.

백행동의 존재가 빛의 입자가 되어 이현의 전신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등가교환의 규칙을 뛰어넘는, 데이터의 완전한 통합이었다. 이현의 뇌 속 신경망들이 폭발적으로 재배선되며 300%를 초과하는 분석 속도가 뇌 피질을 강타했다.

[동기화 완료. 싱크로율 94%.]

머릿속에서 기계적인 사념이 울려 퍼지며, 이현은 전에 없던 강력한 힘이 온몸의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백행동의 행동 분석 빅데이터가 이현의 논리 회로와 완벽히 결합했다.

그러나 승리의 희열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

갑자기 백행동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게 암전되었다.

통합되던 빛의 입자들이 검은 타르처럼 변하더니 이현의 뇌 깊숙한 곳을 사정없이 옥죄기 시작했다. 과부하였다. 세 명의 인격 중 하나를 완전히 흡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 거부 반응이 이현의 신경계를 타고 역류했다.

"윽... 아아악!"

이현은 비명을 지르며 현실 세계로 튕겨 나갔다.

현실의 취조실.

철제 의자에 묶여 있던 이현의 몸이 활처럼 팽팽하게 꺾였다. 그의 입에서 하얀 거품이 울컥 울컥 터져 나왔다. 눈동자는 흰자위만을 보인 채 위로 뒤집혔고, 전신이 간질 환자처럼 격렬하게 발작하기 시작했다.

"정이현! 정이현! 이봐, 정신 차려!"

민도혁 형사가 경악 찬 비명을 지르며 구속대를 풀기 위해 달려들었다.

취조실 벽면에 설치된 하이퍼 네스트의 뇌파 모니터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붉은 경고등을 뿜어냈다. 삐이이이- 하는 금속성 비명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정이현의 뇌파 수치가 한계값을 돌파해 가고 있었다. 뇌사 상태를 가리키는 죽음의 선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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