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철의 감촉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사방을 가로막은 회색빛의 조잡한 쇠창살이었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은색 경찰 배지가 망막을 찔렀다. 찌르는 듯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조여 왔다. 거울의 방에서 보았던 깨진 유리 조각들의 환영과 붉은 경보등의 잔상이 현실의 망막 위로 번져 나갔다. 허공을 부유하던 안개는 서서히 걷혔지만,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것은 축축한 지하실의 곰팡이 냄새와 비린 철가루의 호흡이었다.
이현은 가볍게 손목을 가누려 했다. 달그락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의자에 결박된 두 손, 그리고 손목에 선명하게 새겨진 수술 자국 위의 일련번호 'HN-09'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정신이 좀 드나, 정이현 씨."
테이블 맞은편,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사내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가죽 재킷을 걸친 형사 민도혁이었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야수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거칠게 자란 턱수염 위로 피로와 집요함이 얼룩져 있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민도혁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극단적인 초이성주의가 그의 뇌리를 다시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감정은 사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앞의 관찰자가 던지는 정보의 껍데기를 벗겨내야만 했다.
"서하진이 내게 남긴 메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이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타인의 부고를 읽는 낭독자처럼 아무런 고저가 없었다.
"그보다 당신이 가져온 아현동 살인 사건의 사진, 그게 더 흥미롭군."
민도혁은 담배를 꺼내려다 취조실 벽면의 금연 표지를 보고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딱. 따닥. 딱. 불규칙한 비트 패턴이 좁은 방안의 공기를 잘게 부수었다. 그 소리는 이현의 뇌 속 심연을 자극하는 기묘한 울림이었다.
"여전히 미친놈처럼 구는군."
민도혁이 품 안에서 두꺼운 황색 서류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현장 사진 몇 장이 쏟아져 나왔다. 백색 타일 바닥 위에 기하학적인 구도로 흩뿌려진 붉은 혈흔, 그리고 사지의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채 벽에 기대어 있는 피해자의 모습.
"네 짓이지? 네가 하이퍼 네스트의 방에 갇히기 직전, 마지막으로 설계한 작품이 바로 이거잖아. 검찰은 이미 기소장을 작성 끝냈어. 네가 이 수용소에서 평생 뇌가 녹아내릴 때까지 갇혀 지내든지, 아니면 내 손을 잡고 진범의 꼬리라도 잡든지 선택은 네 몫이야."
민도혁의 눈빛이 살의에 가까운 압박을 담아 이현을 짓눌렀다.
그 순간, 이현의 머릿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이성이 균열을 일으키며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깨어났다.
[바보 같은 형사 놈.]
가장 먼저 연역의 메스를 들이댄 것은 한로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현의 좌뇌를 송곳처럼 쑤셔 대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저 자는 지금 덫을 놓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정이현, 당신의 뇌세포가 완전히 사멸하기 전에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지요. 내가 보여주었던 가상 현장의 타임라인을 기억합니까? 22시 12분. 그 시각에 멈춘 온도 저하 공식은 거짓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의 사체는 다른 말을 하고 있군요.]
머릿속에서 찌릿한 방전 현상이 일어났다. 이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등가교환의 법칙. 추리가 어긋나거나 규칙을 위반하면 물리적인 뇌세포가 사멸한다. 뇌압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안구가 빠져나갈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이현은 어금니를 악물며 시선을 탁자 위의 사진으로 고정했다.
사진 속 피해자의 손끝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고, 상처 주변의 혈액은 이미 암갈색으로 변해 고형화되어 있었다.
[키득키득, 피 냄새가 달라!]
윤직관의 정신산만한 목소리가 우뇌의 한구석을 헤집고 들어왔다.
[공기가 차가웠어. 아주 차가웠다고! 저 방의 에어컨은 켜져 있었을까, 꺼져 있었을까? 맞춰봐, 정이현! 틀리면 우리 다 같이 뇌가 폭발해서 죽는 거야!]
"시끄러워."
이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민도혁은 제 앞에 앉은 용의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뭐라고?"
"민 형사."
이현이 고개를 들어 민도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푸른 얼음 같은 이성이 빛나고 있었다.
"당신들은 서하진이 던져준 뼈다귀를 물고 좋아하는 미련한 사냥개에 불과해. 사체의 사망 추정 시각을 몇 시로 보고했지?"
"부검의의 1차 소견은 사건 당일 22시 15분 전후다. 피해자의 위 내용물 소화 상태와 직장 온도를 기준으로 산출한 결과지. 그리고 그 시간, 네 알리바이는 완전히 공백이었어."
민도혁이 확신에 가득 찬 태도로 이현의 얼굴 앞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강압적인 호흡이 이현의 뺨에 닿았다.
하지만 이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조소였다.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극단적인 결함은, 역설적으로 상대방의 가장 날카로운 위협 앞에서도 심박수를 유지하게 만드는 최강의 무기였다.
"틀렸어."
이현이 나직하게 선언했다.
"사망 시각은 22시 12분이야. 딱 3분의 오차가 존재하지."
민도혁의 미간이 굳어졌다.
"3분? 그 따위 오차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의미가 아주 크지. 물리학과 범죄 심리는 숫자의 정밀함에서 시작하니까."
이현은 묶인 손을 들어 올려 탁자 위의 현장 사진 중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민도혁의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의 냄새를 백행동의 인격이 실시간으로 분석해 이현의 의식에 주입하고 있었다.
[저 형사,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 3분이라는 숫자를 듣는 순간 경동맥의 박동이 빨라졌지. 놈은 알고 있어. 그 3분의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현은 내면의 목소리들을 완벽히 통제하며 말을 이어갔다.
"사진 속 타일 바닥을 봐. 혈흔의 건조 상태가 균일하지 않아. 특히 피해자의 목에서 흘러내린 주 혈흔의 가장자리 부분을 보면, 미세하게 물결무늬 모양의 경계선이 남아 있지. 이건 혈액이 응고되기 시작한 직후에 급격한 대기 흐름의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야."
"대기 흐름?"
"쉽게 말해, 누군가 밀폐된 현장의 창문을 열었거나, 혹은 꺼져 있던 환풍기를 작동시켰다는 뜻이지. 아현동 현장의 온도는 섭씨 18도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겠지. 하지만 그건 사건이 발견된 이후의 온도다. 범인은 범행 직후 에어컨을 최대 출력으로 가동해 사체의 체온 저하 속도를 인위적으로 가속화했어. 목적은 단 하나. 사망 추정 시각을 3분 뒤인 22시 15분으로 늦추기 위해서."
민도혁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동작이 완전히 멈췄다.
이현은 그 찰나의 침묵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왜 하필 3분일까? 서하진, 혹은 진짜 설계자가 알리바이를 필요로 했던 결정적인 시간이 바로 그 22시 12분부터 15분 사이이기 때문이지. 그 3분 동안 아현동 현장 인근의 감시카메라에 찍힌 인물이 누구였지, 민 형사?"
취조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현의 뇌 속에서 한로직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합니다, 정이현. 나의 연역법을 정확히 현실의 왜곡에 대입했군요. 3분의 오차는 서하진이 파놓은 함정이자, 동시에 그가 숨기려 했던 유일한 꼬리였습니다. 경찰의 조작된 타임라인은 이제 무너졌습니다.]
정이현은 자신의 머릿속을 맴돌던 파괴적인 뇌압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뇌세포 사멸의 위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낸 순간이었다. 뇌내 탐정 회의소의 가혹한 등가교환 규칙은 그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동시에 현실의 허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절대적인 통찰을 제공했다.
민도혁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탁자 위로 툭 떨어졌다. 이현의 정밀하고 논리적인 알리바이 파괴 추리는 단순히 용의자의 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뒤흔드는 완벽한 수사 가이드라인이었다.
"너……."
민도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에서 방금 전까지의 강압적인 기색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현장 검증 자료는 외부로 단 한 장도 유출되지 않았어. 하이퍼 네스트의 의료진조차 이 사진들의 디테일은 모른단 말이다."
"내 뇌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현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리켰다.
"비록 내 기억의 파편들은 조각나 흩어졌지만, 범죄의 공식은 사라지지 않아. 서하진이 내게 전하라고 했던 결승선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은 알겠군. 그는 자신이 만든 완벽한 퍼즐을 내가 직접 풀어나가기를 바라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그 판의 충실한 배달부고."
민도혁은 이현의 서늘한 독설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뒤로 물리며 가죽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현의 뇌 속 백행동 인격이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경고했다.
[위협 수준 낮아짐. 공격 의사 없음. 대신 무언가 숨겨둔 카드를 꺼내려는 전형적인 타협 행동 양식임.]
민도혁이 꺼낸 것은 종이 한 장이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로고가 상단에 선명하게 박힌, 푸른빛이 도는 기괴한 서식의 거래 계약서였다.
그는 그것을 이현의 눈앞에 슬쩍 내밀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아현동 현장의 CCTV에서 22시 13분에 포착된 인물은 서하진이 아니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거물이었지. 그리고 이 계약서…… 네가 갇혀 있는 하이퍼 네스트의 지하 비밀 구역과 관련이 있는 물건이다."
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약서의 내용을 훑었다.
'기소유예 및 정신 감정 위탁 계약서.'
피위탁자의 이름에는 정이현 석 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고, 그 옆의 서명란에는 기묘할 정도로 정교하고 날카로운 필체로 그의 사인이 기재되어 있었다.
[저 필적을 봐!]
윤직관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우리가 거울 뒤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글씨체야! '가장 완벽한 동조는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썼던 그 미친놈의 손글씨라고!]
이현의 심장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과거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계약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어쩌면 스스로 이 하이퍼 네스트의 정신적 감옥 속으로 걸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짙은 안개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민도혁이 계약서를 다시 품 안으로 집어넣으며 이현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의 숨결에서 진한 담배 찌든 내와 함께, 감추어둔 마지막 비수가 벼려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이현, 넌 네가 무죄라고 믿고 싶겠지. 서하진의 음모에 빠진 가련한 천재 분석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지도 몰라."
민도혁이 이현의 귀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 송곳처럼 이현의 고막을 뚫고 뇌 심부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하나만 가르쳐주지. 네가 이 수용소에서 매일 아침 복용하는 그 특수한 신경안정제 말이야. 뇌세포를 억제하고 기억을 조각내서 널 이 지옥에 묶어두는 그 약물."
민도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그거 처방한 의사가 누군지 알아?"
이현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그의 뇌 속에서 세 명의 인격이 동시에 숨을 죽이는 기괴한 정적이 찾아왔다.
"바로 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