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단 가득 고여 있던 서늘한 공기가 검은 코트 자락을 따라 기괴하게 일렁였다.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댄 서하진의 손에 든 검은색 리볼버 권총이 정확히 정이현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총구의 어두운 구멍은 마치 빛을 삼키는 작은 블랙홀 같았다.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 드러난 서하진의 얼굴에는 타인의 파멸을 가장 정밀한 예술품처럼 감상하려는 자의 옅은 희열이 번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정이현. 네가 설계한 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위해서."
낮고 부드러우나 뱀의 혀처럼 끈적한 목소리가 콘크리트 계단실을 울렸다.
정이현은 멈춰 섰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화약 냄새가 차가운 육신을 꿰뚫을 터였다. 그러나 이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도, 그렇다고 분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감정이 완전히 탈색된 극이성의 눈빛만이 서하진의 미세한 움직임을 격자무늬로 해체하고 있을 뿐이었다.
왼쪽 손목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그 자리, 가죽처럼 질기게 흉터로 남은 일련번호 'HN-09'가 맥박에 맞춰 붉게 일렁이는 듯했다. 하이퍼 네스트가 심어 놓은 비밀 실험체의 낙인. 그러나 이제 이현은 그것이 단순한 예속의 증표가 아님을 안다. 그것은 이 거대한 뇌내 수용소의 시스템 방벽을 무너뜨릴 유일한 물리적 백도어이자 고유 권한 단말기였다.
"시나리오라."
이현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열렸다.
"그 장황한 어휘는 네 오만을 가리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해, 서하진."
"오만?"
서하진이 실소했다. 검지손가락이 방아쇠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신이 연쇄살인마의 알리바이를 직조한 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어땠지? 네가 그토록 자랑하던 그 청결한 이성이 더러운 핏물에 절여져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말이야. 뇌세포가 한 줌씩 타 들어가는 감각은 꽤 쓸만했을 텐데."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약간 치켜든 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던 어떤 파동을 혀끝으로 끌어올렸다.
그것은 민도혁 형사가 차가운 심문실 테이블 위를 손가락 끝으로 둔탁하게 두드리던 규칙적인 소리였다.
탁, 타닥, 탁, 타닥.
단순한 습관성 소음이 아니었다. 이현의 심층 무의식에 완벽하게 각인되어 있던 그 소리는, 하이퍼 네스트가 주입한 뇌파 동기화 통제 주파수를 근원부터 교란하는 정밀한 트리거 코드였다. 민도혁은 형사라는 껍데기 아래에서, 이현이 스스로 파묻은 계획을 깨우기 위한 물리적 간섭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현의 입술 사이로 기묘한 리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목소리조차 섞이지 않은, 오직 숨결과 입술의 마찰음으로만 이루어진 아주 빠르고 정확한 모스 부호식 비트 패턴.
"습, 스읍, 습, 스읍습, 습……."
서하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조준하고 있는 권총 끝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슨 수작이지? 미쳐서 염불이라도 외는 건가?"
이현은 대꾸하는 대신 흥얼거림의 속도를 높였다.
습, 스읍, 습, 스읍습, 습습, 스읍.
동시에 이현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뇌내 탐정 회의소의 잔해들이 거대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한로직의 날카로운 연산 회로, 윤직관의 야수 같은 동물적 감각, 백행동의 폭발적인 신체 역학 분석이 완벽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거대한 해일처럼 대뇌피질을 휩쓸었다.
과거의 조각들이 빛의 속도로 맞춰졌다.
한로직이 가상 살인 현장에서 그토록 완벽하다고 주장했던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 그 시각에 존재하던 미세한 '3분의 오차'. 실내 온도를 의도적으로 1.2도 급감시켜 사체 경직 속도를 조작했던 그 트릭. 그것은 한로직이 주입한 함정이 아니었다. 과거 서하진의 수사망을 교란하기 위해, 정이현 자신이 직접 실현했던 정밀한 공범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왜?
뇌 속의 거울의 방, 그 깨진 거울 파편 이면에 남겨져 있던 자신의 옛 필적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장 완벽한 동조는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현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일었다.
자신은 서하진의 공범 노릇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 가학적인 괴물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뇌를 미끼로 던져 하이퍼 네스트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기억을 지우고, 스스로를 살인마의 덫에 가둔 것조차 서하진이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제국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한 거대한 자해성 '설계도 원본'의 일부였다.
그리고 지금, 그 설계도의 마지막 트리거가 당겨지고 있었다.
이현이 읊조리는 정밀한 주파수 파동 소리가 비상계단 천장에 매달린 보안 스피커의 미세한 전류 흐름과 간섭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찌이이이이이익-!
귀를 찢을 듯한 고주파 피드백 소음이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다.
"윽……!"
서하진이 왼손으로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현의 입에서 나오는 음파의 비트 패턴은 하이퍼 네스트 전체의 신경 동기화 장치들과 실시간으로 연결된 고주파 제어망의 허점을 정확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수용소 건물 내부의 마이크로웨이브 주파수가 비정상적으로 증폭되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비상계단 벽면에 매달린 비상등이 기괴하게 깜빡였다. 초고주파 과전류가 전선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쾅! 쾅! 쾅!
비상계단 바로 옆 화장실 내부에서 고전압 스파크가 튀었다. 센서식 소변기들이 수압과 전류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도자기가 깨지는 굉음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배관이 터지며 뜨거운 수증기와 물줄기가 공중으로 솟구쳤고, 천장의 형광등들이 차례로 터지며 섬광의 세례를 퍼부었다.
"이, 이게 무슨……!"
서하진의 오만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방에서 불똥이 튀고 타 들어가는 플라스틱 냄새가 진동했다. 자욱한 흰 연기와 물안개가 비상계단 통로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눈부신 빛의 산란 속에서, 서하진은 완전히 시야를 잃었다.
"콜록! 정이현! 어디 있나!"
서하진이 허공을 향해 총구를 마구 휘둘렀다. 조준점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그가 자랑하던 완벽한 통제력은 오직 하나의 작은 오디오 패턴 힌트, 민도혁이 전해준 모스 부호 리듬 하나에 의해 무참하게 분쇄되었다. 거대한 요새 같던 하이퍼 네스트의 첨단 시스템이 역으로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덫이 된 것이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림자가 움직였다.
이현의 눈에는 열 감지 카메라처럼 서하진의 미세 근육 움직임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비틀거리는 어깨, 불안하게 흔들리는 손목, 기침을 하느라 무너진 무게중심. 이 모든 것이 백행동의 신체 역학 분석을 통해 완벽한 궤적으로 계산되었다.
스윽.
연기 속에서 이현이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서하진이 본능적으로 총구를 돌리려 했으나, 이현의 움직임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이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하진의 오른쪽 손목 관절을 낚아챘다.
아주 차갑고, 완고무결한 힘이었다.
"아악!"
서하진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며 리볼버 권총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현은 멈추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묵직한 금속 실린더를 꺼내 들었다. 민도혁이 이송 직전 그의 주머니에 밀어 넣어 주었던 것. 그것은 단순한 전류 방출기가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전자 잠금장치를 강제로 동기화해 무력화하는 마스터 키이자, 물리적인 구속 장치였다.
철컥!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특수 수갑이 서하진의 양 손목을 단단히 결속했다. 금속 실린더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전류가 서하진의 신경망을 자극해 그의 신체 제어 능력을 마비시켰다.
서하진은 계단 벽면에 짓눌린 채, 숨을 헐떡이며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패배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너…… 너는 분명히…… 공범의 기억에 갇혀 있어야……."
이현은 서하진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자욱한 연기와 물안개 사이로, 이현의 차디찬 숨결이 서하진의 귓바퀴를 시리게 적셨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고요했고, 그 안에는 단 하나의 흔들림도 없었다.
"서하진."
이현이 속삭였다.
"네가 만든 무대에서 내가 춤추고 있다고 생각했나?"
서하진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했다.
"처음부터 이 무대를 설계한 건 나였다. 널 가장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나 자신마저 속여 가며 준비한 덫이었지."
이현은 서하진의 귓가에 입술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 현실의 거울을 깨부술 시간이다."
서하진의 목구멍에서 마른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낙엽이 시멘트 바닥을 쓸고 가는 듯한 비참한 소음이었다. 타인의 정신을 난도질하며 희열을 느끼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깨진 거울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진 자신의 초상만이 담겨 있었다.
이현은 서하진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비상계단 두꺼운 콘크리트 벽면에 매립된 비상 제어 콘솔로 향해 있었다. 시스템 과부하로 인해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명멸하는 액정 화면.
왼쪽 손목의 흉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살죽 아래에 박힌 미세한 칩이 기전력을 감지하고 깨어난 것처럼, 가죽 같은 피부 위로 'HN-09'라는 일련번호가 선명한 검붉은 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현은 주저 없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달아오른 흉터를 제어 콘솔의 하부 인식 패드에 그대로 밀착시켰다.
지이잉-!
비명 같은 기계음과 함께 콘솔 화면의 붉은 경고창들이 일제히 지워졌다. 푸른색 시스템 코드들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이현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고유 식별 코드 감지: HN-09.] [접근 권한: 최고 설계자(Co-Designer) - 정이현.] [시스템 잠금을 해제합니다.]
"너…… 설마……."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던 서하진의 눈동자가 갈라진 틈새처럼 벌어졌다.
"그 장치를…… 직접 기동시킨 건가? 네 손으로 네 무덤을 파낸 거야!"
서하진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비상계단 벽면을 타고 불길하게 울렸다. 이현의 손끝이 콘솔 키패드 위를 번개처럼 질주했다. 한로직의 완벽한 연산 회로가 현실의 전산망과 동기화되어 가장 빠른 탈출 경로의 보안 프로토콜을 해제해 나갔다.
과거 자신이 설계했던 그 '3분의 오차'.
피해자의 사망 시각을 조작하기 위해 현장 온도를 1.2도 떨어뜨렸던 물리적 제어 기록이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서버 깊숙한 곳에서 인출되었다. 그것은 이현이 서하진의 알리바이를 완성해 준 공범의 증거이자, 동시에 하이퍼 네스트의 주파수 통제망을 무력화할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 마스터 키였다.
이현은 마지막 엔터 키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철커덕!
지상으로 향하는 두꺼운 방화문의 유압식 잠금장치가 풀리며 틈새로 서늘한 외부의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탈출구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제어 콘솔의 화면이 기괴하게 깜빡이며 경고음이 아닌, 차가운 기계음의 안내 방송을 내뱉기 시작했다.
[경고. 최고 설계자 권한 사용에 따른 보안 프로토콜 작동.] [공범자 검증 로그 및 온도 조작 파일(3분의 오차 증거)을 외부 수사망으로 자동 송출합니다.] [수신처: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민도혁 형사 개인 단말기.]
이현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민도혁이 심문실에서 손가락을 두드리며 심어 놓았던 무의식의 수신 주파수. 그것은 이현을 깨우는 트리거인 동시에, 시스템이 붕괴할 때 내부의 모든 범죄 증거를 외부로 방출하는 자동 송신 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송신 완료. 100%.]
머릿속이 일순간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고요해졌다.
귀청을 때리는 고주파의 이음이 고막을 뚫고 대뇌피질을 향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뇌 속의 거울의 방 사방을 메우고 있던 유리벽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균열을 일으켰다.
'브레인 필터 제3수칙 위반.'
지독하게 차가운 시스템의 목소리가 뇌세포의 물리적 파괴를 알리며 심연에서 울려 퍼졌다.
[자신이 과거 연쇄살인마 '설계자'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조작해 준 '공범자'라는 사실을 외부인에게 들키지 말 것.]
누설되었다. 외부 수사관인 민도혁에게 정이현이 공범자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순간, 스스로의 뇌에 걸어 두었던 제3의 족쇄가 풀려 버린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주격 자아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자폭 장치였다.
"컥……!"
이현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백행동의 정밀한 신체 역학도, 윤직관의 날카로운 감각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뇌세포 수만 개가 실시간으로 타 들어가는 타는 듯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조여 왔다.
"하하…… 하하핫!"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서하진이 피를 흘리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정이현! 넌 나를 잡기 위해 스스로의 뇌를 죽이는 길을 택했어! 네가 탈출하는 그 순간, 네 자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이현은 비틀거렸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지상의 희미한 빛이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풀려나기 시작한 세 개의 인격이 이현의 무너지는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검은 촉수를 뻗쳐 왔다. 주격 자아가 소멸하는 순간, 그의 육체는 뇌 속의 괴물들에게 영구히 잠식당할 터였다.
코끝으로 지독한 피비린내가 밀려들었다.
정이현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방화문 너머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구두 굽 소리를 들었다.
뚜벅, 뚜벅.
누군가 비상계단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향해 힘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