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현의 세 가지 지능 회로가 동시 기동되며 머리를 감쌌던 두통이 씻은 듯 사라진 순간, 가상 세계가 조각나 부서지며 수십억의 데이터 정보선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유리벽이 깨어지듯 사방의 거울들이 굉음과 함께 바스러졌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하이퍼 네스트 지하 3층 수술실의 가라앉은 냉기, 그리고 비상 전력마저 차단되어 기괴한 침묵에 잠긴 현실의 밀실이었다.

공기는 소독약 냄새와 타들어 가는 전기 부품의 비린내로 가득했다. 이현의 안구 뒤쪽에서 뉴런들이 폭발적인 속도로 연쇄 방전을 일으켰다. 한로직의 차가운 연산, 윤직관의 날카로운 감각, 백행동의 기민한 신체 지각이 하나의 거대한 매트릭스로 융합되어 그의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뇌세포 사멸의 공포는 더 이상 그를 묶지 못했다. 오히려 300%로 가동되는 이성적 폭주가 그의 육체를 한계 너머의 영역으로 밀어 올렸다.

이현의 시선이 수술대 위에 묶인 자신의 사지를 향했다.

그를 결박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가죽 끈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가 자랑하는 특수 고분자 전자기식 구속 벨트였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한 물리적 충격에는 더욱 단단하게 조여들고, 전용 기지국의 동기화 신호 없이는 절대로 풀어낼 수 없는 절대적인 족쇄.

하지만 이현의 망막 위에 겹쳐진 무수한 청색과 적색의 데이터 정보선들은 그 족쇄 아래 숨겨진 주파수의 흐름을 낱낱이 분해하고 있었다.

초당 800번이 넘는 미세한 진동 정보가 결박 부위의 전도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수술실을 장악한 비상 전력의 불규칙한 흐름과 얽혀 기하학적인 암호 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감각으로는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오직 뇌내 탐정 회의소의 극한 연산 능력을 통해서만 시각화될 수 있는 미시적인 세계였다.

이현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왼쪽 손목이 욱신거렸다.

그곳에는 가상 세계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던 정체불명의 수술 흉터가 남아 있었다. 칼날로 정교하게 그어 만든 듯한 기하학적 문양, 그리고 그 아래 흐릿하게 박힌 일련번호.

‘HN-09.’

민도혁 형사가 현실의 조각을 통해 확인해 주었던 그 낙인. 그것은 단순한 실험체의 표식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서브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고유 주파수 발신기이자, 이 수용소의 메인 시스템을 교란하기 위해 이현 자신이 스스로의 살갗 아래 심어 두었던 일체형 단말기였다.

손목의 흉터가 기지국의 미세 주파수와 공명하며 파르르 떨렸다. 붉은색 전자기 선율 속에서, 오직 벨트의 구동 제어선만을 담당하는 812.3Hz의 고유 주파수가 이현의 이성 회로에 정확하게 가려져 포착되었다.

"해독 완료."

어둠 속에서 이현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단 4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현은 손목을 비틀어 구속 벨트의 금속 버클 접합부에 자신의 흉터 'HN-09'를 밀착시켰다. 흉터 내부의 피하 칩이 흘려보내는 간섭 전류가 전자기식 자물쇠의 내부 회로를 직격했다.

치직, 하는 불꽃 튀는 소리와 함께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고분자 벨트가 힘없이 느슨해졌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짜여 있던 잠금 메커니즘이 순식간에 붕괴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찰칵.

사지가 자유를 얻는 순간, 수술실 한구석에 서 있던 수석 연구원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비상 발전기가 뒤늦게 가동되며 천장의 주황색 회전등이 기괴한 빛을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그 흐릿한 광선 아래에서, 수술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할 실험체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은 그 자체로 초자연적인 공포였다.

"말도 안 돼……! 저 전자기 록을 수동으로 풀었다고?"

나이 든 연구원 한 명이 들고 있던 주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유리 실린더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비상 상황이다! 보안팀! 당장 수술실로 요원들을 배치해! 실험체 HN-09가 구속을 돌파했다!"

다른 젊은 연구원이 벽면의 인터콤을 향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가락은 극도의 공포로 인해 비상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허공을 긁어댔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주사기를 떨어뜨렸던 나이 든 연구원이 주머니에서 평범한 사탕 한 알을 꺼내 아주 일상적인 동작으로 껍질을 벗겼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사탕 껍질을 바스락거리며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그 무의미해 보이는 제스처는 지극히 정교했다.

그 순간 이현의 눈동자가 그 궤적을 쫓았다.

사탕 껍질이 낙하하며 스친 벽면의 미세한 틈새. 그곳에 이 방의 환기구 제어 장치가 수동 플랩 형태로 숨겨져 있었다. 나이 든 연구원은 공포에 질린 척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환기구를 통한 가스 살포 장치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행동 사이에 숨겨진 그 악의적인 단서를 이현의 뇌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비상계단 방향의 가스 밸브는 이미 차단했다."

이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수술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너희가 믿고 있는 그 보안 시스템은, 이미 3분 전부터 내 손안에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괴물 같은 놈이……!"

연구원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수술실 구석으로 몰렸다.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들어선 것은 무장 요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목덜미에 'HN-08'이라는 낙인이 파랗게 박동하는 민도혁 형사가 서 있었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여전히 기계의 통제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허벅지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탁, 탁.

그것은 요원들의 살상 동기화 신호가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제어 주파수가 그의 뇌파를 완벽히 장악하기 전에, 스스로 신경망에 걸어둔 모스 부호식 역필터였다. 가상 세계와 현실의 경계에서 이현을 깨웠던 바로 그 구원의 비트.

"정이현."

민도혁의 턱 근육이 가파르게 떨렸다. 통제를 이겨내려는 그의 의지가 핏발 선 눈동자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뛰어라. 이 새끼들은…… 내가 막는다."

그의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민도혁은 뒤따라오던 하이퍼 네스트의 무장 요원 두 명의 덜미를 움켜쥐고 수술실 문틀 쪽으로 몸을 날렸다. 강철 격벽이 닫히기 직전, 민도혁의 육중한 몸이 요원들의 사격 각도를 완전히 차단하며 진입로를 막아섰다.

이현의 뇌 속에서 거대한 인지적 합선이 일어났다.

한로직이 과거 가상 현장에서 제시했던 '사망 추정 시각의 3분 오차'. 그것은 한로직이 던진 뇌세포 파괴용 함정이 아니었다. 그 오차의 진실은, 과거 이현 자신이 서하진의 완벽한 범죄 알리바이를 설계해 주는 과정에서 남겨두었던 유일한 '백도어(Backdoor)'의 흔적이었다. 서하진을 완벽한 살인마로 완성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유일한 열쇠를 제 손으로 묻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울의 방 깨진 유리 파편 이면에 남겨져 있던 자신의 옛 필적이 심연에서 솟아올랐다.

'가장 완벽한 동조는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현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그는 서하진의 비열한 조력자가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음모와 서하진이라는 완전무결한 괴물을 세상의 법정 앞으로 끌어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뇌를 미끼로 던지는 극단적인 자해성 기획을 실행했던 것이다.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이 수용소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 자체가, 서하진의 방심을 유도하고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기 위한 거대한 설계의 일부였다.

"모든 인과가 맞아떨어지는군."

이현은 주머니 속에서 묵직한 금속 실린더를 꺼내 쥐었다. 민도혁이 이송 차 안에서 넘겨주었던, 하이퍼 네스트의 주파수를 영구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고출력 전자기 펄스 발생기였다.

수술실 외부 복도로 나서는 이현의 눈앞에 숨 막히는 병동 통로가 펼쳐졌다.

적색 비상등이 깜빡이는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무장 요원들의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울렸다. 총 여섯 명. 그들의 손에 쥔 반자동 소총의 총구가 이현을 향해 정렬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의 뇌는 이미 현실의 물리적 법칙 너머를 보고 있었다.

백행동의 신체 역학 분석이 실시간으로 발동했다. 요원들의 어깨 근육이 수축하는 각도, 검지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미세한 떨림, 복도의 기류를 가르는 공기의 진동. 이 모든 변수가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3D 가상 궤적으로 그려졌다.

‘첫 번째 요원의 사격 각도는 좌측 15도 하방. 두 번째 요원은 우측 벽면을 엄폐물로 삼을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이현의 초인지 속에서 멈춰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현은 첫 탄환이 발사되기도 전에 몸을 낮추며 앞으로 쇄도했다.

타탕!

날카로운 총성이 복도를 찢었지만, 이현은 이미 탄도 궤적의 사각지대로 미끄러진 후였다. 그는 단 한 번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선두 요원의 손목 관절을 꺾어 쥐었다.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요원의 비명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현은 요원의 신체를 방패 삼아 뒤따르는 총탄들을 막아내는 동시에, 오른손에 쥔 금속 실린더의 트리거를 당겼다.

지이잉!

눈이 멀 것 같은 청색 전류 장막이 실린더 끝에서 뿜어져 나와 복도 벽면의 고전압 배선판을 직격했다. 하이퍼 네스트가 자랑하던 첨단 뇌 개조 모니터링 장치들과 신경 동기화 장비들이 전압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불꽃을 튀기며 차례로 터져 나갔다.

"으아악!"

장비와 신경망이 연결되어 있던 요원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수한 인지 구조와 물리적 백도어의 결합이 만들어 낸 완벽한 제압이었다.

복도는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이현은 쓰러진 요원들 사이를 유령처럼 걸어 지나갔다. 그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침내 지상으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인 비상계단 방화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현은 피 묻은 손으로 차가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끼이익, 하는 불쾌한 쇳소리와 함께 비상계단의 어두운 콘크리트 계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계단 난간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깃을 빳빳하게 세운 검은색 코트.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에서 기괴할 정도로 창백하게 빛나는 얼굴.

서하진이었다.

그는 한 손에 검은색 리볼버 권총을 쥔 채, 이현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차가운 광기가 서린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정이현. 네가 설계한 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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