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현이 계산을 완료하고 윤직관이 지배하려던 가상의 출구를 한 손으로 턱 잡았을 때, 눈앞에 하이퍼 네스트 지하 비밀 구역 공장이 들어섰다.

지독한 이명이었다.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기계음과 함께 가상의 시공간이 점멸했다. 거칠게 흔들리던 시야가 고정되었을 때, 이현의 등 뒤로 전해진 것은 호송차의 딱딱한 가죽 시트가 아니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극도의 한기.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흐르는 철제 수술대였다.

그는 묶여 있었다.

양 손목과 발목, 그리고 이마를 가로지르는 두꺼운 가죽 스트랩이 뼈마디를 죄어왔다. 머리 위로는 정수리를 태워 버릴 듯한 고광도 수술등이 세 개나 켜져 있었다. 안구 안쪽이 타들어 가는 감각 속에서, 이현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오르내릴 때마다 철제 수술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드디어 제대로 눈을 떴군, 정이현."

수술등의 역광 뒤에서 뻗어 나온 목소리는 뱀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서하진이었다. 그는 수술대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얇은 메스를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굴리고 있었다. 은색 날붙이가 불빛을 받아 이현의 얼굴 위로 날카로운 인광을 흩뿌렸다.

"뇌파 동기화율 98%. 기어코 네 발로 이 거울의 방 안쪽까지 들어와 주다니. 역시 넌 내가 만든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야."

서하진의 오만한 실소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왼쪽 손목에 가해지는 지독한 통증에 집중했다. 가죽 스트랩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 그곳, 과거 하이퍼 네스트의 실험실에서 낙인처럼 새겨진 정체불명의 수술 흉터가 불덩이를 얹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HN-09.'

가상 세계에서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일련번호의 실체가 마침내 현실의 살가죽 위로 그 흉측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실험 대상자의 표식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제어 서버와 이현의 뇌 신경계를 직접적으로 연동하는 물리적 포트이자, 서하진이 심어 놓은 영구적인 족쇄였다.

[정이현! 당장 의식을 끊어라!]

뇌리 가장 깊은 곳, 부서진 얼음판을 긁는 듯한 한로직의 비명이 고막을 때렸다.

[네 뇌압이 이미 한계치를 넘었다. 연산 회로의 82%가 물리적으로 파괴되기 직전이야. 저놈의 말을 듣지 마라. 저놈이 제시하는 모든 데이터는 네 자아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한 설계다!]

한로직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다급함과 이질적인 공포가 섞여 있었다. 오직 수치와 인과만을 믿던 논리의 인격이 이토록 흔들리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현이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려 서하진을 응시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진 틈새를 뚫고 나왔다.

"한로직, 네 연산은 처음부터 틀려 있었다."

"뭐?"

서하진이 메스를 멈추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자신이 아닌 허공을 향해 읊조리는 이현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현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눈앞의 서하진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짜 싸움은 머릿속에서 자신을 갉아먹던 사냥개들과의 마지막 대치였다.

"네가 내 머릿속에서 복원해 낸 첫 번째 가상 살인 현장."

이현은 뇌내 탐정 회의소의 거울 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사방이 깨진 유리 파편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한로직은 얼굴이 반쯤 일그러진 채 이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은 22시 12분이라고 했지. 그리고 너는 그 시각에 3분의 오차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나를 범인으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완벽한 수학적 연역이었다! 현장의 온도 저하와 혈액 응고 상태는 오직 그 3분의 공백을 가리키고 있었어!]

한로직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 3분의 오차. 하지만 그 오차는 네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조작한 함정이 아니야."

이현이 깨진 거울 조각 하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유리 단면 이면에, 아주 오래전 이현 본인이 직접 새겨 넣은 듯한 낡고 삐뚤빼뚤한 필적이 박혀 있었다.

'가장 완벽한 동조는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유리 파편에 새겨진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이현의 머릿속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댐이 마침내 붕괴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의 폭포수 속에서 진실이 그 나신을 드러냈다.

"그 3분의 오차는 서하진의 알리바이를 완성해 주기 위한 공범의 증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이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서하진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알리바이에 내 손으로 직접 심어 둔 인위적인 균열. 그리고 그 균열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이 손목의 낙인, 'HN-09'라는 고유 권한 단말기가 필요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정이현!]

"내가 네놈의 조력자 노릇을 했던 건, 서하진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이현의 시선이 현실의 서하진을 꿰뚫었다.

"이 자를 가장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려 영구히 기소하기 위해, 내 뇌 자체를 미끼로 던진 자해성 수법이었지. 서하진이 나를 완벽한 공범으로 믿게 만드는 것만이,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제어 서버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뇌내 정신 수용소의 바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지루해! 너무 지루하잖아!"

거울의 방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윤직관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동물적인 직관의 인격은 이현이 진실을 깨닫고 자아를 통합하려 하자,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이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다 짜여진 연극이었다고? 그런 건 재미없어! 난 여기서 더 놀아야겠단 말이야! 네 몸을 내놔, 정이현! 내가 저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진짜 피를 보게 해 달라고!"

윤직관의 손가락 끝이 기괴하게 늘어나며 이현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그의 폭주는 이현의 뇌압을 급격히 상승시켰다. 현실의 이현의 코에서 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려 뺨을 타고 귀로 흘러 들어갔다.

"닥쳐, 이 정신병자 새끼야!"

그때, 묵직하고 거친 포효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윤직관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백행동이었다.

완전히 이현의 의지에 동조한 행동 분석의 인격은 망설임 없이 윤직관의 사지를 꺾어 바닥에 메쳤다.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윤직관의 비명이 뇌리를 울렸다. 백행동은 가죽 장갑을 낀 단단한 손으로 윤직관의 목을 누르며, 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이현! 이 미친놈은 내가 잡고 있을 테니 당장 끝내! 이 새끼 뼈마디를 다 으스러뜨려 놓을 테니까!"

"놔! 놓으란 말이야! 같이 죽자, 정이현!"

윤직관이 바닥을 긁으며 절규했지만, 백행동의 완력은 압도적이었다.

이현은 흔들리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거울의 방 중심부, 세 인격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된 그곳에서 이현은 양손을 천천히 뻗었다.

"한로직, 그리고 윤직관."

이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극단적인 이성과 생존을 향한 집념만이 남은 차가운 쇳소리였다.

"너희는 내 실패를 바라는 적대자가 아니다. 내 뇌가 만들어 낸 방어 기제이자, 내가 완벽한 추리를 위해 스스로 분리해 놓았던 지능의 도구들일 뿐이지."

[정이현…… 너는 지금 우리를……!]

한로직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미 거울의 방 전체가 이현의 의지에 따라 수축하고 있었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현은 백행동과 한로직, 그리고 절규하는 윤직관의 영혼 구조식을 마침내 '정이현'이라는 하나의 단일 주격에 동시 배치하기 시작했다. 뇌 신경망이 재배열되는 과정은 뼈를 깎는 고통을 동반했다. 하지만 이현은 단 한 번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그의 정신이 세 인격을 완전히 포섭하고 억누르는 순간, 붉게 치솟던 뇌압 수치 그래프가 급격히 꺾였다.

90%…… 60%…… 30%…….

단 0.1%의 오차도 없이, 뇌압은 완벽한 안정 상태에 다다랐다.

서로 육체를 차지하기 위해 물고 뜯던 분열된 정신들이, 마침내 이현의 절대적인 주체성과 목표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했다. 그들은 더 이상 이현을 위협하는 기생물이 아니었다. 이현의 명령에 복종하는 궁극의 300% 분석 엔진으로 승화하여 그의 신경계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어떻게……."

서하진의 얼굴에서 오만한 미소가 완전히 걷혔다.

수술대에 묶인 이현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그의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깊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동시에 이현은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금속 실린더의 미세한 주파수를 다시 한번 느꼈다. 그것은 하이퍼 네스트의 위치 추적기이기도 했지만, 민도혁이 심어 둔 또 다른 반격의 뇌관이었다.

복도 너머에서 군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원들의 발소리가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 냈다.

탁, 탁탁, 탁.

민도혁이 심문실에서 반복해서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바로 그 모스 부호식 비트 패턴. 그것은 이현의 심층 무의식에 수립된 하이퍼 네스트의 뇌파 동기화 통제 주파수를 교란하는 트리거 코드였다.

이현의 세 가지 지능 회로가 동시에 기동되며 머리를 감쌌던 지독한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가상의 거울의 방이 쩍쩍 갈라지며 일제히 조각나 부서져 내렸다. 유리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암흑 속에서, 수십억 개의 디지털 데이터 정보선과 하이퍼 네스트의 숨겨진 제어 코드가 이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한눈에 읽히는 기적 같은 감각이었다.

이현이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수술등의 강렬한 빛조차 이제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하진."

이현이 구속된 손목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진짜 설계를 보여주지."

이현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통합된 백행동의 감각이 그의 신경망을 타고 흐르며 가죽 스트랩의 장력과 이음새의 마찰 계수를 실시간으로 읽어 들였다. 왼쪽 손목을 죄고 있는 금속 버클의 틈새는 정확히 2.4밀리미터. 한로직의 연산 회로가 그 틈새를 공략할 최적의 추진력과 비틀림 각도를 순식간에 산출해 냈다.

"설계라고?"

서하진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이현의 턱밑으로 메스 날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금속이 피부에 닿기도 전에, 윤직관의 직관이 서하진의 미세한 근육 긴장도를 포착했다. 살의는 없다. 오직 제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박적인 방어 기제뿐이었다.

"정이현, 넌 이 방을 벗어날 수 없어. 네 뇌세포의 80%는 이미 하이퍼 네스트의 동기화 신호에 침식당했다. 네가 발악할수록 네 자아의 붕괴 속도만 빨라질 뿐이야."

"틀렸어."

이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침식당한 것이 아니라, 통로를 열어준 거다."

그와 동시에 이현은 주머니 속에 든 금속 실린더를 향해 허벅지 근육을 미세하게 압박했다. 민도혁이 전해준 묵직한 실린더의 표면이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위치 추적기가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제어 주파수를 교란하는 트리거이자, 이현의 손목에 새겨진 'HN-09' 낙인과 공명하는 동기화 매개체였다.

지이잉.

이현의 왼쪽 손목 흉터 속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살가죽 밑에 이식되어 있던 나노 칩이 실린더의 고유 주파수를 수신하자마자, 수술대 전체를 흐르던 전류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뭐지?"

서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술실 벽면에 붙은 혈류 모니터와 뇌파 측정기의 화면이 거칠게 지직거리며 붉은색 경고등을 뿜어냈다.

[시스템 경고: 외부 단말기(HN-09)를 통한 비인가 시스템 동기화 감지.] [지하 3층 구역 전력 제어권 강제 이전 중. 잔여 시간 2분 40초.]

"이게 무슨……!"

서하진이 다급하게 벽면의 제어 콘솔로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백행동의 폭발적인 신체 제어력이 이현의 사지에 깃들었다. 이현은 뼈가 어긋나는 통증을 무시한 채 왼쪽 손목을 안쪽으로 꺾으며 가죽 스트랩의 고정 버클을 그대로 파괴했다.

콰직!

가죽이 뜯겨 나가며 자유로워진 왼손이 허공을 갈랐다. 이현은 주머니 속에서 금속 실린더를 꺼내 수술대 옆 제어 패널의 단자에 거칠게 꽂아 넣었다.

피비린내 나는 마찰음과 함께 수술실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오직 이현의 손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색 광선과 실린더의 붉은 점멸등만이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교차했다.

"3분의 오차."

어둠 속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울려 퍼졌다.

"내가 과거에 설계했던 그 오차는, 이 수용소의 전체 전력망과 보안 시스템을 단 3분 동안 완전히 정지시키는 강제 백도어였다. 서하진, 네가 내 기억을 지우고 이 방에 가둔 순간부터 이 카운트다운은 예정되어 있었어."

서하진은 어둠 속에서 메스를 쥔 채 뒤로 물러섰다. 그의 거친 호흡 소리가 밀실의 벽면에 부딪혀 반사되었다.

"정이현…… 네놈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아니, 나도 방금 깨달았다. 내 뇌 속의 탐정들이 내지른 비명 덕분에 가려져 있던 진짜 설계도를 찾았으니까."

이현은 남은 구속구들을 차례로 뜯어내며 수술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300%로 가동되는 그의 뇌는 이제 현실의 소음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물리적 변수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군화 소리가 바로 문앞에서 멈췄다.

탁, 탁탁, 탁.

여전히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그 모스 부호의 비트 패턴.

이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한로직의 연산이 그 소리의 주파수와 간격을 분석해 냈다. 그것은 민도혁 형사의 고유한 습관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무장 요원들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진입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살상 동기화 신호'였다.

민도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그들에게 완벽하게 통제당하고 있는 사냥개에 불과했다.

스르륵.

두꺼운 강철 격벽이 위로 들리며 외부의 희미한 비상등 불빛이 수술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역광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전술 요원들의 선두에는, 이현이 잘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형사 사법 기관의 가죽 재킷을 걸친 사내.

민도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회색빛으로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의 목덜미에는 이현의 손목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일련번호가 파랗게 박동하고 있었다.

'HN-08.'

민도혁이 멍한 시선으로 이현을 바라보며, 오른손에 쥔 권총의 조정간을 천천히 내렸다.

"정이현. 설계는 끝났다."

민도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제어 장치를 통해 합성된, 차갑고 완고한 기계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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