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를 찌르는 차가운 분사음은 지독하게 이성적이었다.
허공을 가른 백색의 가스 입자들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 순간, 기도의 모든 상피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수축했다. 고통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빙수처럼 서늘하고 끈적거렸다.
"서하진 박사님의 긴급 이송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녹색 위생모 아래로 흘러나온 간호사의 음성은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그녀의 일상적인, 마치 병동의 린넨을 교체하는 것만큼이나 무감한 손짓이 이현의 목덜미를 강타한 수면 가스의 발포 장치로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 그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틈새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독이 들어앉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이현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현실의 안구가 눈꺼풀 안쪽으로 뒤집히며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암전은 휴식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식이라는 무대가 지상에서 지하로, 더 깊고 잔혹한 심연의 연극으로 자리를 옮겼음을 뜻할 뿐이었다.
덜컥.
몸 전체가 허공으로 붕괴하는 듯한 추락감이 척수 신경을 자극했다. 현실의 육체가 이송 카트에 실려 거친 노면 위의 호송 차량으로 밀려 들어가는 물리적 진동. 정이현의 뇌는 그 불규칙한 외부의 타격을 즉각적으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뇌내 가상 공간인 ‘거울의 방’의 기압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을 채운 거울 벽면이 우그러졌다. 마치 열기에 녹아내리는 납판처럼, 거울 속에 비친 수천 명의 정이현이 일제히 왜곡된 형상으로 비틀렸다. 기압의 급감은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으로 치달았다.
이현은 가상의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가상 신체의 피부 위로, 기괴한 수술 흉터가 붉은 낙인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선명하게 각인된 다섯 글자.
‘HN-09.’
지금껏 무의식의 수렁 속에 방치되어 있던 그 일련번호의 진의가, 수면 가스의 자극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명징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감금의 표식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 지하 비밀 실험 구역의 강제 뇌개조 수용 대상자임을 증명하는 물리적 낙인이자, 동시에 이 거대한 정신적 감옥의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 권한 단말기였다.
"아하하! 드디어 무너지는구나, 이현아! 아주 보기 좋아!"
거울의 방 전체가 위아래로 거칠게 전복되기 시작했다. 중력의 축이 완전히 뒤틀려 천장이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그 혼돈의 중심에서 솟구쳐 오른 것은 윤직관이었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광기에 찬 안광이 번득였다. 윤직관은 거울 벽면을 짚고 기어오르며, 이현의 파괴되어 가는 뇌세포를 향해 가늘고 뾰족한 손가락질을 해댔다.
"완벽한 논리주의자 척하더니 결국은 가스 한 모금에 뇌가 녹아내리는 가련한 육체 피조물일 뿐이잖아? 네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이 방의 밑바닥이 뭐가 있는지 보여줄게."
윤직관이 손을 뻗어 거울 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강!
거울 유리들이 수천, 수만 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 나며 아래로 쏟아졌다. 그 깨진 틈새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검고 차가운 가상의 심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고농도 진정제가 뇌간을 마비시키며 만들어낸, 의식의 완전한 가사 상태를 상징하는 심해였다.
윤직관의 발길질이 이현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이현의 가상 신체는 그대로 거울의 방 경계선 바깥, 검은 심해의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꼬르륵.
숨이 막혔다. 허파 가득 차가운 물이 밀려 들어오는 듯한 지독한 질식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뇌세포가 영구 사멸할 때 느껴지는 물리적 기화 현상이 머릿속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져 나갔다.
'이대로 가라앉아 자아를 내어줄 것인가.'
이현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며, 자신의 시야 너머로 유령처럼 떠도는 거울 파편들을 응시했다.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하나, 아주 날카롭게 깨진 은색 파편의 이면에 붉은색 잉크로 쓰인 거친 필적이 이현의 시선을 붙잡았다.
['가장 완벽한 동조는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현의 동공이 미세하게 축소되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이 남긴 친필 서명이었다.
머릿속을 지배하던 지독한 죄책감의 사슬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서하진이 주입하려 했던 '공범자'라는 굴레. 자신이 과거 서하진의 연쇄살인을 완벽하게 도왔던 공범이었다는 그 추악한 증거들.
하지만 아니었다.
이 필적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서하진의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그의 설계에 동조했던 것은, 그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하진이라는 완벽한 살인마를 법의 테두리 안이 아닌, 스스로가 설계한 가장 완벽한 정신적 단두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의 뇌를 가장 치명적인 미끼로 던진 자해성 수법이었던 것이다.
"동조가 아니야."
이현의 입술 사이로 검은 기포가 새어 나왔다. 질식의 고통 속에서, 그의 차가운 초이성이 다시금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소(起訴)였다."
기억의 도화선이 불을 뿜자, 과거 한로직과의 심리전에서 짚어내지 못했던 마지막 단서가 머릿속에서 수리적 공식으로 환산되어 정렬되었다.
한로직이 제시했던 가상 살인 현장.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에 존재했던 아주 미세한 '3분의 오차'.
한로직은 그것을 이현의 뇌를 무너뜨리기 위한 자신의 완벽한 연역적 함정이라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 3분의 오차, 즉 현장의 온도를 급격히 1.2도 떨어뜨려 사후 강직 시간을 교란했던 진짜 주체는 한로직이 아니었다.
바로 정이현 자신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서하진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조작해 주는 척하면서, 동시에 훗날 서하진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치명적인 사법적 모순을 그 '3분의 오차' 속에 심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오차를 증명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자신의 왼쪽 손목에 새겨진 'HN-09' 낙인 단말기였다.
위이이잉.
현실의 호송 차량이 급격히 코너를 돌며 차체 전체에 심한 진동이 발생했다. 차체를 타고 흐르는 고주파의 마찰음, 그리고 수송 파이프 외벽을 두드리는 불규칙한 타격음이 이현의 청신경을 자극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박자였다.
두 번의 짧은 멈춤, 그리고 세 번의 연속적인 타격.
민도혁 형사가 심문실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그 고유한 '모스 부호식 비트 패턴'이었다. 호송 차량 내부의 누군가가 민도혁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내부 깊숙한 곳에 심어둔 민도혁의 협력자가 보내는 구호이자, 이현의 심층 무의식에 수립된 하이퍼 네스트의 뇌파 동기화 통제 주파수를 교란하는 결정적인 트리거였다.
"겨우 이 정도로 나를 지우려 했나, 윤직관."
이현이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HN-09' 낙인이 푸른빛의 고주파를 뿜어내며 뇌내 시스템의 루트 권한을 강제로 탈취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동기화율 100%.] [뇌내 물리엔진 제어권 회수 작동.]
이현은 자신을 압박하는 가상 심해의 수압과 현실 호송 차량의 흔들림, 노면의 마찰 계수를 완벽하게 수리적으로 계산해 내기 시작했다. 컴퓨터 소자가 연산하듯, 그의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량 속도 시속 72킬로미터. 우측 감속 모멘트 0.4G. 파이프 진동 주파수 142헤르츠.'
현실의 물리적 자극을 완벽한 수치적 상수로 치환해 내는 순간, 뇌내 가상 공간의 물리 법칙이 이현의 이성 아래 재조율되기 시작했다.
그를 짓누르던 검은 심해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투명한 유리 바닥으로 변모했다. 위아래로 거칠게 전복되던 거울의 방이 거대한 중력의 정렬 아래 제자리를 찾아 고정되었다. 거울 조각들이 제각기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며 완벽한 정육면체의 방을 재구성했다.
"어, 어떻게……!"
윤직관이 경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동물적인 직관이 이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기운을 감지하고 본능적인 공포를 토해냈다.
"내 뇌의 주인은 나다."
이현은 한 걸음 한 걸음 윤직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체스판 위의 말들이 아무리 뛰어놀아 봐야, 결국 판을 짜고 물리적 중력을 지배하는 것은 그 판을 내려다보는 설계자지. 윤직관, 너는 단 한 번도 이 판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다."
이현이 손을 뻗어 윤직관의 멱살을 잡았다. 윤직관의 형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연기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직관적 데이터가 이현의 초이성적 주도권 아래 강제로 흡수되어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으아아악! 이현! 네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서하진이 기다리는 그 진짜 지옥을!"
윤직관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거울의 방 사방으로 흩어지며 소멸했다.
이현은 거울의 방 한가운데에 서서 숨을 고르지 않았다. 감정은 배제되었다. 오직 목표를 향한 차가운 집념만이 그의 영혼을 단단하게 동결시키고 있었다.
그는 윤직관이 자신의 마지막 도피처이자 출구로 숨겨두었던 뒤편의 거울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기하학적인 콘크리트 틈새 사이로 현실 세계로 통하는 묵직한 철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 가상의 철문 손잡이를 턱 움켜잡았다.
철컥.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현실의 신경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면 가스의 마취 성분이 연산해 낸 수치적 방어벽에 밀려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철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현의 감은 눈꺼풀 위로 지독하게 밝은 형광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쿵!
호송 차량의 뒷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지하의 공기가 이현의 전신을 감쌌다.
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사방으로 끝없이 뻗어 나간 거대한 회색빛 강철 파이프들과 정체불명의 화학 약품 냄새를 풍기며 웅웅거리는 기계 장치들이었다. 벽면마다 붉은색 경고등이 규칙적으로 깜빡이며 기괴한 박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심장부, 지하 비밀 구역 공장이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금속 배관들의 교차점 한가운데, 휠체어에 앉은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려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하진이었다.
그는 무릎 위에 태블릿 PC를 올려둔 채, 마치 오래전 헤어진 동창을 맞이하듯 지독하게 아름답고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서 와라, 이현아. 네가 설계한 지옥에."
서하진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 위로 떨어지는 마른 낙엽처럼 건조했다.
이현은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를 결박하고 있는 가죽 벨트의 감촉을 음미했다. 철분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인 지하 공장의 공기는 혀끝에 닿자마자 쇠맛을 풍겼다.
그는 천천히 왼손목을 비틀었다. 'HN-09' 낙인 아래의 피부가 백색의 고열을 뿜어내며 뼈마디를 태워 들어갔다. 서하진이 쥐고 있는 태블릿의 액정 화면이 깜빡일 때마다, 이현의 척수를 타고 흐르는 전류의 강도가 정비례하여 상승했다.
"표정이 생각보다 평온하군."
서하진이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휠체어 모터의 미세한 기계음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곤충의 날갯짓 소리처럼 고막을 긁었다. 그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액정을 가볍게 두드릴 때마다, 이현의 왼쪽 손가락 끝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련했다.
"네가 짜놓은 3분의 오차. 아주 영리한 덫이었어. 수사관들의 눈을 속여 나에게 완벽한 부재증명을 주는 동시에, 언제든 나를 기소할 수 있는 스위치로 그 낙인을 설계해 두었더군."
서하진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 눈동자 깊은 곳에 가학적인 즐거움이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이현아, 네가 간과한 게 있어. 그 알리바이를 깨뜨릴 고유 권한 단말기가 네 손목의 낙인이라면, 내가 그걸 통제할 주파수 역시 이미 내 손안에 있다는 뜻이지. 네가 기억을 되찾을수록, 이 낙인은 네 뇌간을 직접 태워버리는 사형 집행관이 될 뿐이다."
서하진이 화면을 위로 쓸어 올렸다.
동시에 이현의 목덜미 근육이 터질 듯이 수축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뇌세포가 기화하는 듯한 극심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현의 얼굴에는 단 한 줌의 비명도 고이지 않았다. 입술 틈새로 흘러나온 것은 침묵보다 차가운 미소였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구속대 측면의 어두운 그늘 속, 코트 주머니 깊숙한 곳에 닿아 있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 실린더의 감촉. 민도혁이 건네준 그 정체불명의 장치는 단순한 쇳덩이가 아니었다.
'민도혁의 모스 부호. 그리고 이 실린더.'
이현의 머릿속에서 윤직관의 동물적인 감각과 백행동의 행동 공식이 정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기 시작했다.
그는 서하진의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 끝이 액정의 특정 주파수 대역을 누르는 미세한 타이밍을 포착했다. 동시에, 지하 공장의 거대한 파이프 외벽을 타고 흐르는 불규칙한 진동음의 주기를 완벽하게 수치화했다.
지하 3층의 공기 밀도, 파이프의 마찰 계수, 그리고 실린더 내부에서 미세하게 작동하는 주파수 교란 장치의 공명 주파수. 이 모든 상수가 이현의 초이성적 연산 장치 안에서 하나의 완벽한 등식으로 정렬되었다.
딸깍.
주머니 속에서 아주 미세한 물리적 타격음이 발생했다. 실린더 내부의 신호 증폭기가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순간, 지하 공장의 천장을 수놓았던 붉은색 경고등이 일제히 파르르 떨리며 꺼졌다. 공장을 가득 채우던 거대한 환풍기 소리가 단숨에 멎었고, 서하진이 쥐고 있던 태블릿 화면 위로 수없이 많은 에러 코드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치직, 치지직!
태블릿 뒷면에서 푸른 빛의 스파크가 튀겼다.
"이, 이게 무슨……!"
서하진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의 왼쪽 이마에 솟아오른 미세한 핏줄이 극도의 인지 부조화를 대변하고 있었다.
손목을 짓누르던 타는 듯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현은 헐거워진 가죽 결박 사이로 왼손을 가볍게 빼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구속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몸짓에는 일말의 서두름도 없었다.
"너는 내가 설계한 3분의 오차가 단순히 알리바이용 기만책이라고 생각했겠지."
이현이 자신의 왼손목을 들어 올려 서하진에게 보여주었다. 'HN-09' 낙인이 이제는 붉은색이 아닌,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알리는 차가운 청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오차는 알리바이 설계가 아니다. 너와 나, 그리고 하이퍼 네스트의 중앙 제어 서버를 단 3분 동안 단 하나의 물리적 동기화 노드로 묶어두는 강제 백도어 통로다."
이현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공장의 거대한 격벽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내려앉아 모든 출구를 폐쇄했다. 완벽한 물리적 밀실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3분의 카운트다운이, 지금 방금 시작됐다."
서하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때였다.
물리적인 밀실의 침묵을 찢고, 이현의 뇌리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거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아직 합병되지 않은 채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 있던 연역의 인격, 한로직의 음성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부서진 얼음판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기계적인 파열음에 가까웠다.
[정이현. 네 역합병 연산 회로에 치명적인 오류가 감지되었다. 현실의 민도혁이 보낸 그 신호…… 그것은 구출을 위한 이정표가 아니다.]
이현의 동공이 미세하게 축소되었다.
그와 동시에, 공장 벽면에 설치된 수십 개의 모니터가 지직거리며 외부 보안 카메라의 화면을 띄웠다.
화면 속, 폐쇄된 복도를 따라 내려오고 있는 이들은 민도혁이나 그의 경찰 동료들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검은색 방탄 장구를 착용한 정예 전술 요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사내의 오른손 손가락이, 소총의 개머리판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탁, 탁.
민도혁의 고유한 모스 부호 비트 패턴이었다.
[그것은 사냥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송신하는 하이퍼 네스트의 동기화 비트다. 정이현, 너는 스스로 가장 완벽한 덫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로직의 차가운 마침표가 뇌세포를 관통하는 순간, 이현은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기 시작하는 금속 실린더의 진짜 주파수를 감지했다. 그것은 전파 방해 장치가 아니었다.
자신의 위치를 지하 3층으로 정확히 유도하기 위한, 하이퍼 네스트의 위치 추적기였다.
서하진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기괴할 정도로 길게 찢어졌다.
이제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그를 이 지옥으로 몰아넣은 진짜 설계자는 누구인가.
사방을 가로막은 철문 너머로, 무장한 요원들의 군화 소리가 기분 나쁜 울림으로 좁혀오기 시작했다. 거울의 방 벽면들이 다시금 미세하게 금이 가며 쩍쩍 갈라졌다.
파멸의 시간이, 단 2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