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작성자 칸에 박힌 정이현이라는 세 글자는 붉게 달아오른 인장처럼 그의 망막을 태웠다.

한로직의 연산 회로가 뇌신경망에 이식되는 순간, 척수를 타고 치솟은 차가운 전류가 뇌간을 거칠게 난타했다. 머릿속 '거울의 방'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바스러졌다. 사방을 메우고 있던 거울 조각들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무의식의 심연으로 흘러내렸다. 그 깨진 틈새마다 망각의 수렁에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처럼 허공에 투사되었다.

이현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현실의 취조실에서 민도혁 형사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고 흔드는 촉각이 아득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현은 손목을 옥죄는 가상의 수술 흉터를 움켜쥐며, 눈앞에 펼쳐지는 기억의 스크린 속으로 속절없이 침잠했다.

어둡고 밀폐된 하이퍼 네스트의 지하 연구실이었다. 백색 소음만이 낮게 깔린 공간 속에서, 과거의 정이현이 서하진과 마주 서 있었다.

서하진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그것이라기보다, 박제된 맹수의 유리 안구와 닮아 있었다. 과거의 이현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하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서하진의 왼쪽 뺨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피부는 얼음처럼 서늘했다.

과거의 이현이 품속에서 얇은 태블릿 PC 한 대를 꺼내 서하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태블릿의 푸르스름한 액정 화면 위로 선명한 서체가 떠올라 있었다.

[서하진 알리바이 수립 및 밀실 트릭 설계서]

"이것이 당신의 구원입니다."

과거의 자신이 뱉어낸 목소리가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감정이 거세된, 기계장치처럼 정교하고 차가운 음색이었다. 서하진은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현실의 이현의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가상 무비가 정지 화면처럼 멈추고, 이현의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분당 맥박수가 급격히 치솟으며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위액이 역류하는 듯한 극도의 혐오감이 밀려왔다. 자괴감이 온몸의 근육을 마비시켰다.

내가 저 괴물을 만들었다고? 저 잔혹한 밀실 살인의 판을 짜고 기획한 진짜 설계자가, 바로 나였다고?

"허억, 흑……!"

이현은 가슴을 쥐어짜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전신을 덮쳤다. 이성이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 자신을 불신하고 혐오감에 굴복하는 순간, 뇌내 생존 규칙에 따라 주격 자아는 영구히 소멸할 터였다.

그는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부서진 거울 조각들이 뒹구는 바닥, 그 파편 이면에 남겨진 자신의 옛 필적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동조는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현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통증이 마비되어 가던 감각을 강제로 깨웠다. 극단적인 초이성주의적 사고 회로가 강박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는 문장을 곱씹었다. 동조. 적조차 나를 믿게 만드는 동조.

만약 과거의 자신이 단순한 공범에 불과했다면, 왜 이런 문장을 거울 뒤편에 숨겨두었겠는가. 왜 자신을 '적'으로 규정하고, 상대방을 속여야 한다는 전제를 깔아두었겠는가.

"아니야."

이현의 입술 사이로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건 단순한 조력이 아니다."

그는 머릿속에 이식된 한로직의 연산 데이터를 강제로 구동했다. 한로직의 차가운 수식들이 기억의 조각들과 부딪히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가 주목한 것은 한로직이 제시했던 가상 살인 현장의 결정적 모순, 즉 '3분의 오차'였다. 피해자의 사망 추정 시각에 존재하던 미세한 3분의 공백. 그리고 그 공백을 만들기 위해 서버실의 온도를 의도적으로 1.2도 급감시켰던 자신의 행위.

서버실 온도가 1.2도 떨어지면, 시체의 부패 속도와 체온 하강 곡선에 미세한 왜곡이 발생한다. 법의학자가 사후 강직도와 시반을 통해 사망 시각을 추정할 때, 바로 그 '3분'의 오차가 발생하도록 정밀하게 계산된 수치였다.

서하진은 이 3분의 오차 덕분에 완벽한 알리바이를 보장받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이 범행 현장에 없었음을 증명하는 철옹성 같은 방패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현의 눈앞에 서하진에게 건넸던 설계서의 세부 수식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한로직의 지성 데이터가 그 수식들을 순식간에 해독해 나갔다.

"온도 조작의 주체."

이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서버실의 온도를 1.2도 떨어뜨리기 위해 제어 장치를 조작한 IP 주소. 그것은 서하진의 개인 단말기가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 내부의 특수 실험 구역, 즉 일련번호 'HN-09'를 부여받은 피실험자의 통제 단말기에서 발신된 신호였다.

'HN-09'.

이현은 자신의 가상 신체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살을 째고 무언가를 삽입했다가 다시 봉합한 듯한 흉터가 그곳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일련번호 HN-09. 그것은 하이퍼 네스트 지하 비밀 실험 구역에서 자행된 강제 뇌개조 수용 대상자의 낙인이었다.

그 낙인을 가진 자만이 접속할 수 있는 독립된 보안망.

"서하진은 알리바이를 얻은 것이 아니다."

이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 자괴감으로 짓눌려 있던 가슴에 차갑고 예리한 확신이 돋아났다.

"그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유일한 열쇠를, 내가 쥐고 있었던 거다."

서하진이 완벽한 알리바이라고 믿었던 '3분의 오차'는, 오직 'HN-09'라는 고유 권한을 가진 이현의 단말기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데이터였다. 즉, 이현이 입을 여는 순간 서하진의 알리바이는 즉각 범행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돌변하는 구조였다.

그것은 공조의 설계도가 아니었다. 서하진이라는 맹수를 완벽히 통제하고, 언제든 단 한 번의 조작으로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현이 직접 짜놓은 '영구 기소 장치'였다.

"가장 완벽한 동조는……."

이현은 바닥에 뒹구는 깨진 거울 조각을 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하진을 가두기 위해 스스로를 공범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서하진, 너를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내가 준비한 덫이었어."

뇌내 심연의 가장 깊은 곳, 암흑으로 가득 차 있던 장벽이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너머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데이터 큐브가 솟아올랐다. 과거의 정이현이 서하진의 뒤통수에 꽂아 넣기 위해 아껴두었던, 진짜 '밀실 트릭 설계도'의 원본 파일이었다.

[데이터 동기화 완료: 설계도 원본 획득.]

머릿속을 울리는 기계적인 알림음과 함께, 이현의 의식이 급격히 현실로 인양되기 시작했다. 심장을 짓누르던 혐오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하진을 단죄할 법의 불칼이 차갑게 벼려져 있었다.

이현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현실의 취조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축축했다. 민도혁 형사가 안도와 의구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이현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현아, 정신이 좀 드는 거냐? 너 아까 갑자기 숨도 안 쉬고……."

"민 형사님."

이현은 민도혁의 말을 자르며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한로직의 논리적 연산과 백행동의 신체 제어가 완벽히 융합된 상태였다.

"서하진의 알리바이를 깨뜨릴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민도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현이 입을 열어 과거의 진실을 발설하려는 순간이었다.

철컥.

취조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것은 경찰들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의 로고가 선명히 박힌 방호복을 입은 보안요원들과, 무표정한 얼굴의 간호사였다. 그들의 손에는 정체불명의 장비와 가스 분무 장치가 들려 있었다.

민도혁이 본능적으로 권총집에 손을 올리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당신들 뭐야! 여기 경찰 취조실이야! 당장 안 나가?"

간호사는 민도혁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한 채, 차가운 눈빛으로 이현만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환자 정이현에 대한 서하진 박사님의 긴급 이송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이 새끼들이 진짜!"

민도혁이 보안요원의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간호사의 손에 들린 분무 장치에서 백색의 수면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취조실의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민 형사님, 피합……!"

이현이 경고를 내뱉기도 전에, 차가운 가스가 그의 호흡기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눈앞의 취조실 풍경이 빠르게 일그러지며 암전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민 형사님, 피합……!"

이현의 경고는 비명처럼 흩어졌다. 차가운 백색 가스가 허공을 가르며 그의 비강과 폐부를 사정없이 잠식했다. 가스는 단순한 마취 성분이 아니었다. 하이퍼 네스트가 극비리에 배양한 뇌파 동기화 억제제, 화학식명 'N-피토신'의 인공 향취가 기도를 타고 내달렸다.

눈앞의 취조실 풍경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빠르게 번지며 뭉개졌다.

민도혁의 거친 고함소리가 고무 장막을 통과한 듯 아득하게 굴절되어 들려왔다. "이 개새끼들이…… 정이현, 정신 잃지 마!"

파란 불꽃이 어둠을 갈랐다. 보안요원의 손에 들린 전기충격기가 민도혁의 옆구리에 박히는 찰나의 스파크였다. 민도혁의 신형 가죽 구두가 바닥에 흩어진 거울 파편을 가혹하게 짓밟으며 미끄러졌다. 쓰러지는 민도혁의 손끝이 이현의 셔츠 주머니를 거칠게 스치고 지나갔다. 툭, 하는 둔탁한 감각과 함께 묵직한 금속 실린더가 주머니 안쪽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이현의 의식은 암전의 심해로 추락했다.

뇌내 탐정 회의소의 경고등이 붉은 핏물처럼 명멸했다. [경고: 외부 신경 가스 유입으로 인한 인지력 72% 저하.] [보호 기제 기동. 뇌세포 영구 사멸 방지를 위해 주격 자아의 연산 속도를 강제 제한합니다.]

어둠은 길지 않았다. 아니, 길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눈금이 지워진 세계에서 이현은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끼며 깨어났다.

금속이 맞부딪히는 탁한 소음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피부를 찔렀다. 이송 차량 내부였다. 사방은 두꺼운 납판으로 차폐된 밀실이었고, 이현의 사지는 가죽 구속대에 묶여 고정되어 있었다.

"HN-09번, 뇌파 안정화 단계 진입."

앞좌석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백색의 방호복을 입은 요원 하나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루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구형 지포 라이터를 꺼내 손등 위로 굴렸다.

탁. 탁. 탁.

가벼운 금속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번 울렸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멈춤 뒤, 다시 두 번의 가벼운 타격음이 이어졌다.

단순한 습관성 장난처럼 보이는 그 무의미한 손짓을 보며, 이현의 뇌 속에 이식된 백행동의 미세 행동 분석 알고리즘이 꿈틀거렸다.

'민도혁의 모스 부호 비트 패턴이다.'

이송 요원의 손가락이 그리는 궤적은 민도혁이 심문실 탁자를 두드리던 리듬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하이퍼 네스트의 내부 깊숙한 곳까지 민도혁의 감시망 혹은 협력자가 뻗어 있다는 무언의 이정표였다.

이현은 주머니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민도혁의 금속 실린더를 떠올렸다. 마취 가스의 안개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뇌세포가 다시 한번 한계까지 요동쳤다.

차량이 급격히 회전하며 멈춰 섰다.

철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이현의 들것이 지상 아래로 내려앉았다. 기압이 급격히 떨어지며 귀가 먹먹해졌다. 지하 3층, 하이퍼 네스트의 심장부였다.

밀폐된 방의 문이 열리고 이현이 그 안으로 밀려 들어갔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곳은 방이 아니었다.

사방의 벽과 천장, 바닥까지 온통 거울로 도배된 기괴한 공간.

이현의 부서진 뇌 속에서만 존재해야 할 '거울의 방'이, 차가운 콘크리트와 유리 재질을 입고 현실 세계에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수십, 수백 개의 거울 속에 구속대에 묶인 정이현의 초라한 모습이 무한히 증식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에 드나?"

방 한가운데, 거울들의 왜곡된 반사광 속에서 휠체어에 앉은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하진이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이현이 방금 전 무의식 깊은 곳에서 복원해 낸 '설계서 원본'과 동일한 인터페이스의 태블릿 PC가 올려져 있었다. 서하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액정 화면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눈동자 속에 가학적인 유열이 가득 들어찼다.

"네가 나를 위해 짜놓았던 그 완벽한 알리바이의 덫. 결국 네 스스로 그 빗장을 열고 기어 나왔군, 이현아."

그 순간, 이현의 왼쪽 손목에 새겨진 'HN-09' 낙인 흉터가 기괴한 열감을 뿜어내며 붉게 치솟기 시작했다. 피부 밑에 이식된 마이크로 칩이 서하진의 태블릿 주파수와 동기화되며 뇌간을 직접 타격하는 물리적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과거의 설계도를 손에 쥔 서하진이 미소 지었고, 거울 속 수백 명의 서하진이 동시에 이현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진실을 움켜쥔 대가는, 현실의 거대한 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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