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정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밤 2시가 넘어선 시각, 강남 한복판에 솟아오른 49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더 하이스트 센트럴’의 로비는 괴괴하리만치 고요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화려했으나, 이 거대한 콘크리트 마천루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온기는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준우는 코트 깃을 바짝 여미며 귀에 대고 있던 스마트폰을 고쳐 잡았다. 수화기 너머로 사각거리는 이불 소리와 함께 익숙하고도 얄미운 목소리가 흘러나왔.
“오빠, 또 이 시간에 기어들어 오냐? 그러다 진짜 탈모 온다니까. 가뜩이나 우리 가문 대대로 단명하는 팔자인데, 머리숱까지 없으면 조상님들이 저승에서 호적 파자고 하실걸.”
여동생 소희였다. 이 흉흉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유일하게 준우의 숨통을 틔워 주는 존재이자,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강철 같은 성정의 소유자. 준우는 헛웃음을 삼키며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렀. 손가락 끝에 닿는 시린 금속의 감촉이 유난히 낯설었다.
“걱정 마라. 내 모근은 가문의 생명력보다 훨씬 질기니까. 그보다 문은 제대로 걸어 잠갔어? 삼중 잠금장치 다 확인해.”
“아이고, 예, 예. 아주 빗장까지 지를 기세로 걸어 잠갔습니다요. 오빠나 빨리 올라오기나 하셔. 야식으로 시켜 둔 만두 다 식어서 딱딱해질 지경이니까.”
“5분 안에 간다.”
전화기 너머로 소희가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준우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스테인리스 스틸 벽면이 그의 초라하고 피곤한 실루엣을 사방에서 반사했다.
더 하이스트 센트럴의 엘리베이터는 최첨단 IoT 시스템이 적용되어 탑승객의 스마트키를 자동으로 인식했다. 준우가 손을 대기도 전에 화면에 ‘34층’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육중한 금속 문이 닫혔다.
스르륵.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준우의 숨소리만이 벽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완전한 밀실이 완성되었다.
위이잉— 하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화면의 숫자가 가파르게 올라갔. 10, 11, 12...
그때였다. 귓가에 대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지독한 기계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치지직, 지직... 오빠? ...거기... 왜... 지직...
“소희야? 목소리가 잘 안 들려. 전파가 끊기나?”
-오... 빠... 뒤... 뒤에... 지지직!
뚝.
통화가 강제로 끊겼다. 준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액정 상단의 안테나 표시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이 최첨단 명품 아파트에서 전파 음영 지역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준우가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상단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02:13]
숫자가 깜빡이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02:14]로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그 순간, 쿠웅—! 하는 굉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거칠게 흔들렸다.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몸이 붕 떴다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무릎을 타고 올라오는 둔탁한 충격에 준우는 균형을 잃고 벽을 짚었다.
천장의 백색 LED 등이 몇 번 발작하듯 깜빡이더니 완전히 암전되었다. 이윽고 비상 발전기가 가동되는 듯, 비상등의 붉은빛이 스산하게 엘리베이터 내부를 채웠다. 붉은 조명 아래, 사방의 거울이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젠장.”
준우가 침을 삼켰다. 단순히 기계적인 오작동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정체불명의 한기가 살갗을 바늘로 찌르듯 파고들었다. 엘리베이터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은 에어컨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축한 땅속에 묻혀 썩어가던 흙내와, 비린내 가득한 하수도의 냄새였다.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때, 준우의 가슴팍 안쪽에서 맹렬한 고열이 피어올랐. 가죽 재킷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가문의 유산, 가죽 표지의 낡은 장부인 [계율 대장]이 스스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온몸의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옷자락 틈새로 푸른빛을 띤 시린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준우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피의 계율이, 이 밀폐된 죽음의 공간에서 비로소 깨어나고 있었다.
‘각성인가.’
준우는 이를 악물었다. 극도의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히려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냉정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문이 몰살당하던 그 끔찍한 밤의 기억이 그를 옭아매는 트라우마였으나, 동시에 위기 상황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준우는 심호흡을 하며 벽면에 붙은 금속 판넬 옆의 코팅지를 바라보았다.
입주민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돌던 일종의 '생존 수칙' 쪽지였다.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미신이라며 떼어내기 바빴지만, 누군가 절박한 심정으로 이곳에 다시 붙여둔 것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 비공식 행동 수칙] 1. 심야 2시 14분, 혼자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을 시 절대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말 것. 2. 소리가 들려도 버튼 판넬 측면의 틈새를 보지 말 것. 3. 만약 거울 너머에서 붉은색 노이즈가 보인다면...
거기까지 읽어 내려가던 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칙의 하단 부분에 붉은색 볼펜으로 굵고 난잡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글자를 뭉개버려, 뒤에 이어질 진짜 피하는 법을 읽지 못하게 조작해 둔 흔적이었다.
붉은 볼펜 자국은 묘하게도 핏방울이 말라붙은 것처럼 굳어 있었고, 그 선의 궤적은 미세하게 굴절되어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규칙 왜곡인가.”
준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가락 끝으로 그 붉은 선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가슴속 계율 대장이 요동치며 머릿속에 기이한 인과율의 공식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틈새가 보이고, 왜곡된 규칙 이면의 진짜 맹점이 눈에 들어왔다.
귀신들은 현대적인 시스템과 규격화된 수칙을 역이용해 인간을 사냥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설정한 설계의 꼼수를 찾아내면 법적으로 그들을 파산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꼼수를 부려 가며 영업하는 건 세무조사 대상인데.”
준우가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지이이잉— 하는 고주파 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정면의 스마트 미러가 부르르 떨렸다.
액정 화면 밑바닥에서부터 붉은색 핏줄 같은 노이즈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거울 속 준우의 등 뒤, 어두운 허공에서 서서히 무언가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죽은 살갗. 눈 구멍이 뻥 뚫린 채 붉은 진액을 흘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준우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뚝. 뚝. 뚝.
실제 엘리베이터 바닥으로 더러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 안의 존재가 현실의 경계를 넘어오고 있었다.
거울 표면에 번개 모양의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 유리가 물리적으로 찢어졌다. 그 틈새로 손톱 밑이 온통 검붉은 피로 물든 축축한 손가락들이 기어 나왔다.
손각시였다. 과거 전통 설화 속에서 처녀의 원한으로 죽어 떠돌던 악귀가, 이제는 현대식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거울을 매개로 실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지독한 썩은 물비린내와 흙벽돌 냄새가 좁은 엘리베이터 안을 꽉 채웠다.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에 평범한 인간이라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상황이었다.
여자의 창백한 손이 거울면을 완전히 깨부수고 나와 준우의 목덜미를 향해 느릿하게 뻗어왔다. 손가락 끝이 닿는 곳마다 공기가 얼어붙어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준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울 속에서 기어 나오는 손각시의 뻥 뚫린 눈구멍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귀신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도망치거나 공포에 질려 자빠져야 할 인간이, 자신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하이스트 센트럴이라기에 입주민 수질이 괜찮은 줄 알았더니.”
준우가 지극히 차분하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 대신 벼려진 칼날 같은 냉소가 실려 있었다.
“수압만 형편없는 게 아니라, 무단 침입자 수질도 아주 엉망이네. 거울 면적 점유에 대한 소급 적용은 매정하게 해야겠는데? 관리비는 내고 이 짓거리 하는 거야?”
손각시의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피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분노한 귀신의 손가락들이 허공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준우의 목을 향해 쏘아져 왔다.
쉬이익!
차가운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썩은 물비린내를 풍기는 축축하고 단단한 손가락뼈들이 준우의 하얀 목덜미 피부에 닿았다.
“큭...!”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압도적인 저주의 힘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준우의 가슴속에 품은 계율 대장이 가공할 푸른 안개를 폭발적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살을 찢는 통증과 차가운 안개가 그의 목덜미에서 맹렬하게 충돌했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냉기는 단순한 온도의 하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얼려버리는 생령(生靈)의 억하심정이었다. 쩍쩍 갈라지는 얼음 소리가 귓전에서 고막을 찔렀다. 준우의 가슴속, 계율 대장이 가죽 표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요동쳤다. 얇은 종이들이 제멋대로 넘어가며 잉크가 가죽 너머로 배어 나오는 듯한 기묘한 작열감이 폐부를 찔렀다.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1분에 140회를 넘나드는 박동이 가슴뼈를 두드려댔지만, 준우의 눈동자만큼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려는 안면 근육을 억지로 붙잡아 두었다.
"끄응..."
신음이 목구멍을 타고 가늘게 흘러나왔다. 손각시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진액이 준우의 깃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를 적셨다. 썩은 우물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시에, 준우의 시야 사방으로 붉은색 글자들이 어지럽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계율 대장의 각성과 함께, 이 밀실을 지배하는 귀신의 규칙이 정량화된 텍스트로 치환되어 뇌리에 박혔다.
[귀신 계율: 손각시(孫閣氏)의 붉은 노이즈] - 본 규격 구역(엘리베이터) 내에서 거울 속의 '자신'과 3초 이상 눈을 마주할 시, 신체의 소유권을 이전한다. - 단, 비공식 수칙 하단의 '붉은 볼펜 표식'으로 인해 강제 왜곡됨. - 왜곡된 규칙: 거울 속의 '존재'를 인지하는 즉시 경계를 허문다.
준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고통 속에서도 그의 뇌세포는 가차 없이 굴러갔다.
"하... 역시나."
거친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귀신들은 날것의 힘만으로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 반드시 자신들이 쳐놓은 그물, 즉 '계율'이라는 인과율의 덫에 피해자가 발을 들이밀게 만들어야만 비로소 물리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
이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인지 뭔지 하는 부패한 인간들이 붉은 볼펜으로 수칙을 덧칠해 훼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귀신이 더 쉽게 사냥할 수 있도록, 무고한 주민들이 규칙의 구멍에 걸려 넘어지도록 판을 짜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규칙의 왜곡 자체가 불법적인 편법이라는 뜻이었다.
"야."
준우가 목을 옥죄는 손가락뼈를 향해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너, 이거 상도덕에 어긋나는 거 알지?"
손각시의 텅 빈 눈구멍이 기괴하게 찌그러졌다. 사냥감이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훈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 소유권을 넘긴다는 게 원래 네 계약이잖아. 그런데 저 붉은 낙서쟁이들이 규칙을 강제로 쪼개서 '존재'를 인지하기만 해도 기어 나오게 만들었지?"
준우의 목덜미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손각시의 창백한 손등을 적셨다. 뜨거운 피가 닿자 손각시의 피부가 치익 소리를 내며 타올랐지만, 녀석은 손귀를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힘을 더 꽉 주어 준우의 기도를 압박했다.
"컥... 그러니까... 너는 지금... 허가받지 않은 변칙 조항으로... 무단 점거를 시도하고 있는 거야. 세법으로 치면 탈세고, 민법으로 치면 불법 점유지."
준우는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계율 대장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붉은 볼펜 자국이 남겨진 아크릴 판넬 위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찌르르릉!
마치 엘리베이터 전체가 고압 전류에 노출된 것처럼 강렬한 불꽃이 판넬 틈새에서 튀었다. 계율 대장의 푸른 안개가 준우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와, 붉은 볼펜 자국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영수(領收)한다."
준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 왜곡된 계율의 인과를 대장에 기록하고, 소유권을 박탈한다."
그 순간, 손각시의 몸이 발작하듯 크게 흔들렸다. 거울 너머에서 들려오던 기괴한 물소리가 일순간 멈췄다. 녀석의 텅 빈 눈구멍에서 흐르던 핏물이 사방으로 튀며, 엘리베이터 거울 전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사정없이 뻗어 나갔다.
콰과광!
천장의 비상등이 완전히 깨져 나가며 주위가 칠흑 같은 어둠에 담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준우는 자신의 목을 움켜진 손가락들이 미치도록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영혼을 찢어발기는 초고주파의 비명이 밀폐된 금속 상자 안을 가득 채웠다.
성공하는 듯했다. 편법으로 왜곡된 규칙을 역이용해 녀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대장에 묶어두는 결계가 완성되기 직전였다.
그러나.
"오... 빠..."
어둠 속에서, 손각시의 찢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 수화기 너머로 야식 만두가 식는다고 투덜거리던 여동생 소희의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똑같고 생생한 목소리가 준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 추워... 문 좀 열어줘. 왜 거기 혼자 있어...?"
준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찰나의 망설임.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목덜미를 파고들던 손각시의 손톱들이 준우의 살가죽을 뚫고 척추 뼈마디를 향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수십 개의 붉은 손들이 준우의 온몸을 휘감아 거울 안쪽의 심연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