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불꽃이 시퍼런 빙고의 냉기를 찢어발기며 맹렬하게 솟구쳤다. 자객의 가슴팍에서 피어난 기괴한 문양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갈라졌고, 그 틈새로 흘러나온 열기가 대연회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붉은 뱀처럼 집어삼키려 들었다.

“아이들이……!”

하은의 목소리가 사르르 떨리는 얼음 조각처럼 바스러졌다. 저 통로 끝에는 폭신한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든 루이와 아기 늑대들의 침실이 있었다. 과거 보육원의 불길 속에서 소중한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홀로 남겨졌던 기억이 짙은 연기처럼 밀려와 하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목구멍이 턱 막히고, 심장이 뜨거운 불덩어리에 짓눌린 듯 고통스럽게 요동쳤다. 또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지켜내야 했다.

하지만 하은이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 어떤 불꽃보다 빠르고 치명적인 그림자가 시야를 덮쳤다.

블레이드였다.

그의 단단한 실루엣이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나섰다. 가차 없이 뻗은 그의 오른손끝에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동결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콰아앙! 성채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천장까지 치솟던 붉은 불길이 공중에서 그대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고드름이 불꽃의 혀를 옭아매고, 이내 거대한 얼음 장벽이 통로 입구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내 성채에서 내 허락 없이 타오르는 불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낮게 가라앉은 블레이드의 음성이 빙고 내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자폭을 시도했던 자객의 몸은 뿜어져 나오던 마법 문양과 함께 꽁꽁 얼어붙어 바스라졌다. 시퍼런 서리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몽글몽글한 눈꽃처럼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단 한 줌의 불씨도, 단 한 줄기의 열기도 아이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블레이드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곧장 하은에게로 향했다. 거친 발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하은의 여린 어깨를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그러쥐었다.

“하은! 다친 곳은 없는가?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하지?”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고열의 마력이 하은의 어깨를 타고 스며들었다. 자폭의 충격과 극심한 긴장감으로 인해 얼어붙어 가던 하은의 몸이 그의 따뜻한 악력에 조금씩 녹아내렸다. 하은은 가슴에 걸린 은빛 백금 표식을 꼭 쥔 채, 가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위층은요? 루이와 아이들은 정말 무사한가요?”

“무사하다. 내 마력이 통로를 이중으로 차단했으니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보다 그대 몸이 낙엽처럼 떨리고 있군.”

블레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하은의 뺨과 손등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상처 하나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그의 미간에 잡혀 있던 깊은 주름이 서서히 완화되었다. 하지만 하은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가문의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려 살던 이 차가운 공작이, 지금 자신을 보며 진심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때, 경비병들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 엎어져 있던 또 다른 자객 무리가 핏발 선 눈으로 침을 뱉었다.

“크윽…… 괴물 같은 늑대 놈들. 죽여라! 북부의 야만스러운 짐승들에게 구걸할 목숨 따위는 없다!”

자식 같은 아이들을 해치려 한 자들의 뻔뻔한 태도에 경비병들이 거칠게 검을 겨누었다. 마샤 역시 살벌한 눈빛으로 채찍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자객 우두머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조롱 섞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모진 고문을 가하더라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지독한 묵비권의 선언이었다.

하은은 차갑게 식어가는 손끝을 맞잡으며 조용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무의미한 유혈 사태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배후를 확실히 밝혀내지 못하면, 아이들의 안전지대는 언제고 다시 위협받을 터였다.

‘도감을 켜자.’

하은의 마음속 외침과 함께, 시야 너머로 몽글몽글한 파스텔톤의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반투명한 동화풍 양장본 장부인 ‘힐링 레시피 도감’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허공에 펼쳐졌다. 아기 늑대들의 상태를 보여주던 장부는, 하은이 시선을 고정하자 눈앞에 있는 자객들의 오감 수치와 스트레스 지수를 정밀한 그래프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대상: 신성제국 소속 암살자] [현재 심박수: 135 bpm (극도의 긴장 및 방어 태세)] [스트레스 지수: 89% (자폭 실패로 인한 심리적 불안정)]

도감이 가동되는 순간, 하은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시스템의 마력원으로서 자신의 생명 체온을 강제로 빼앗기는 페널티가 시작된 것이다. 손가락 끝마디부터 감각이 무뎌지며 하얗게 성에가 끼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34도, 33도…… 머릿속에서 체온 하강을 경고하는 붉은 글씨가 깜빡였다.

그 순간, 허리 뒤로 단단하고 뜨거운 온기가 밀려들었다.

블레이드가 자연스럽게 하은의 등 뒤로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넓은 품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하은의 등에 밀착되자, 마치 한겨울의 벽난로 앞에 선 것처럼 거대하고 포근한 열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하은의 체온 저하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그의 배려였다.

동시에 블레이드의 목덜미 부근에서 미세한 울림이 전해졌다. 그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푸른 마력 핵석이 하은의 손길과 공명하듯 파르르 떨리며 영롱한 푸른빛을 발산했다. 그 신비로운 빛이 하은의 심장으로 흘러들어 가자, 얼어붙던 혈관이 봄눈 녹듯 사르르 풀렸다. 힘을 얻은 하은이 자객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당신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나 있어요.”

하은의 목소리는 맑고 차분했다. 자객 우두머리는 코웃음을 쳤다.

“가소로운 인간 계집이 무슨 유도 신문을 하겠다는 거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목을 베어라.”

“글쎄요. 정말 시간 낭비일까요?”

하은은 소매 안에서 작은 단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붉은 진흙으로 구워진,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몽글몽글한 촉감의 양념 단지였다. 지난 2화에서 식자재 창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던, 북부 고유의 향신료 양념 단지였다. 당시에는 그저 매콤한 향이 나는 평범한 소스인 줄 알았으나, 도감의 상세 분석을 거치며 그 안에 극소량의 고대 마력 중화 성분인 ‘아그니의 눈물’이 섞여 있음을 알아차렸었다.

하은이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노을빛 향기가 빙고 안의 매캐한 탄내를 지우며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이 붉은 양념 단지 안에는 제국에서 극비리에 다루는 마력 중화 성분이 들어 있어요. 당신들이 품고 있던 자폭 문양의 마력 흐름을 완벽하게 억제하고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죠.”

자객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도감 장부 위의 심박수 수치가 순식간에 165 bpm으로 치솟으며 붉은 불꽃 아이콘이 사정없이 깜빡였다.

[심리 상태 분석: 극도의 당황 / 정보 유출에 대한 공포]

하은은 자객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성채의 내부 지도가 없었다면, 당신들은 식자재 창고의 위치도, 보육동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가문 내부의 사정을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누군가가 길을 열어주었겠죠.”

“그, 그건……!”

“그리고 이 양념 단지가 보관되어 있던 창고는 최근 제국에서 온 사절단만이 드나들던 구역이에요. 가웨인 셀레스티아 추기경 대리의 전령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죠.”

‘가웨인’이라는 이름이 하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순간, 자객의 심박수는 190 bpm을 돌파하며 한계치에 다다랐다. 도감의 그래프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요동쳤다.

[거짓말 탐지 결과: 100% 진실 반응 / 배후 지목 성공]

“그분은 참 영리해요.”

하은이 단지를 흔들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동화 속 요정처럼 무해하고 따스한 미소였지만, 자객의 눈에는 그 어떤 고문관보다 무섭게 보였다.

“당신들이 실패하면 자폭 마법으로 증거를 인멸하게 만들고, 성공하면 공작가의 안전 관리 소홀을 빌미로 신성제국이 개입할 명분을 만들려 했겠죠. 결국 당신들은 버려지는 장기말에 불과해요. 하지만 이 양념 단지의 성분과 당신들의 시신에 남은 마력 반응을 대조해 제국 황실에 상소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웨인 신부가 사사로이 부린 암살단이라는 증거가 만천하에 드러날 텐데요.”

자객의 얼굴이 서서히 흙빛으로 변해갔다. 이 연약해 보이는 인간 여성이 자신들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정교한 심리전에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뒤에는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영혼까지 얼려버릴 듯한 기세로 서 있는 북부의 맹수, 블레이드 공작이 버티고 있었다.

“내, 내가…… 내가 말하겠다!”

결국 자객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가웨인 신부님이 지시하셨다! 보육동의 아기 늑대들에게 마력 증폭제를 투여해 폭주를 유도하고, 성채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하셨어! 우리에게 내부 지도를 건넨 것도 그분의 밀사였다!”

빙고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문 도구 하나 쓰지 않고, 단 3분 만에 제국 추기경 대리의 음모를 낱낱이 밝혀낸 순간이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병들과 마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샤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하은을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수석 보육장 님의 지혜가 가문의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자백은 없을 것입니다.”

블레이드는 하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서기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겠지. 한 자도 빠짐없이 기록하라.”

“예, 공작 전하!”

서기관이 깃털 펜을 바쁘게 움직여 양장본 기록지에 자객의 자백과 가웨인 셀레스티아의 공모 정황을 엄숙하게 적어 내려갔다. 사보타주와 암살 공모 정황이 윈터우드 공작가의 공식 영지 회의록에 수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로써 공작가는 제국의 간섭을 차단하고 가웨인을 법적으로 처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칼자루를 쥐게 되었다.

블레이드가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깊은 신뢰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애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대의 영리함이 가문을 다시 한번 구했군, 하은.”

“저는 그저…… 아이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하은이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포시 잡았다. 블레이드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자신의 넓고 따뜻한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뜨거운 온기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사르르 스며들며, 얼어붙었던 보금자리를 다시금 따스하게 채워갔다.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궁!

성채 전체가 거대하게 흔들릴 정도의 천둥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단순한 천둥이 아니었다. 맑은 하늘을 찢고 내려온 듯한, 지독하게 이질적이고 억압적인 신성 마력의 파동이었다. 빙고의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고, 얼음 장벽이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켰다.

경비병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지하 빙고로 번개처럼 뛰어 들어왔다.

“공작 전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블레이드의 목소리가 검풍처럼 날카롭게 채찍질했다. 경비병이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제국의 이단심문관 군단이 성채 대문 앞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가웨인 셀레스티아 사제가 선두에 서서, 성채 내부에 이단과 악마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며 문을 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은과 블레이드의 눈빛이 공중에서 강하게 충돌했다. 자백의 증거를 쥐자마자, 적들이 군대를 이끌고 성채의 턱밑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성채 밖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함성소리가 혹한의 바람을 타고 지하 깊은 곳까지 무겁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