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쿵, 쿵, 쿵.

지하 빙고의 단단한 얼음 벽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단순한 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채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거인의 발소리 같았고, 동시에 윈터우드 공작가에 들이닥친 불길한 운명의 경종이기도 했다.

“공작 전하! 제국의 이단심문관 군단이 성채 대문 앞을 포위했습니다!”

경비병의 헐떡이는 보고가 지하 빙고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하은은 본능적으로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방금 전까지 자객의 자백을 받아내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웨인 셀레스티아. 그 교활한 사제가 윈터우드 공작가의 턱밑까지 칼날을 들이밀고 들어온 것이다.

“하은.”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블레이드였다. 그가 하은의 어깨를 감싸 쥔 손에 은근한 힘을 주었다. 혹한의 북부를 지배하는 맹수들의 군주답게,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머물러 있었다.

“가자. 내 성채에서 감히 누가 으르렁거리는지 똑똑히 보아야겠군.”

“……네, 전하.”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하는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자객의 독약을 무력화하기 위해 마법 힐링 디저트의 정수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연성해 낸 탓이었다. 시스템의 마력원을 돌리기 위해 강제로 소모된 생명 체온의 페널티가 서서히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부터 고드름이 얼어붙는 것처럼 시려왔다.

‘도감’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위험! 플레이어의 현재 체온: 33.2도] [저체온증 2단계 진입 중. 마력 연성으로 인한 온기 소모 누적. 즉각적인 열원 확보가 필요합니다.]

하은은 저도 모르게 블레이드의 넓은 품으로 조금 더 몸을 밀착했다. 그의 몸은 차가운 빙설 장벽처럼 서늘해 보이지만, 그 가슴 깊은 곳에는 태양보다 뜨거운 마력의 핵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블레이드는 기꺼이 그녀의 든든한 난로가 되어 주려는 듯, 커다란 손으로 하은의 작은 두 손을 감싸 쥐며 자신의 품줄기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하은의 손끝이 닿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블레이드의 셔츠 너머, 그의 심장 부근에 품고 있던 푸른빛의 마력 핵석이 미세하게 공명하며 따스한 빛을 발했다. 하은의 손길에만 반응하여 차가운 얼음 속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나듯 요동치는 그 신비로운 온기. 그 기분 좋은 따스함이 하은의 손끝을 타고 들어가 꽁꽁 얼어붙던 혈관을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좀 괜찮은가.”

“네…… 고맙습니다, 전하. 덕분에 살 것 같아요.”

하은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두 사람은 마샤와 경비병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지상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성채 밖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와 군마들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다가왔다.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매서운 눈보라가 일행의 뺨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성채의 육중한 철문 너머, 백은빛 갑옷을 입고 하얀 망토를 휘날리는 제국의 이단심문관 군단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에는 신성 제국의 상징인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어, 이 어두운 혹한의 대지 위에서 이질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군단의 선두에, 은빛 사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가웨인 셀레스티아가 서 있었다.

그는 평소의 인자한 미소 대신, 오만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벽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단심문국의 공식 대표이자 엄격하기로 소문난 고위 심문관, 바르톨로메오가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윈터우드 공작!”

가웨인이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오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성문을 열고 이단자를 넘겨라! 신성한 수인의 혈통을 요사스러운 마법 요리로 조종하고, 제국의 아이들을 악마의 주술로 오염시킨 마녀가 그대들의 성채에 숨어 있다는 고발이 접수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정확히 블레이드의 품에 안기듯 서 있는 하은을 가리켰다.

“저 사악한 인간 보모를 당장 신전으로 연행하여 영혼의 무게를 달아보아야 한다! 만약 순순히 응하지 않는다면, 윈터우드 가문 역시 제국의 법도에 따라 이단을 비호한 반역 가문으로 다스릴 것이다!”

가웨인의 억박지름에 성벽 위의 늑대 전사들이 일제히 이빨을 드러내며 낮은 으르렁거림을 토해냈다.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었다.

하지만 블레이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싸늘한 비소가 흘러나왔다.

키이이잉!

블레이드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거대한 흑철 대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대검의 검신을 타고 시퍼런 동결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가 검 끝을 가웨인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자, 거세게 몰아치던 북부의 눈보라가 일순간 멈춘 듯 고요해졌다.

“내 성채의 보모를 데려가겠다고?”

블레이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뼈를 얼려버릴 만큼 매서웠다.

“가웨인, 네놈이 드디어 미친 모양이군. 내 가문의 은인이자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보모를 건드리겠다는 것은, 곧 나와 나의 늑대 전사 전원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그가 대검을 바닥에 가볍게 내리꽂았다.

쿠릉!

얼어붙은 대지가 쩍 갈라지며 이단심문관 군단의 발밑까지 균열이 이어졌다. 예리한 얼음 가시들이 땅에서 솟구쳐 오르며 경계선을 그렸다.

“이 선을 넘는 자는 제국의 사제든, 심문관이든 상관없이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이 동토의 밑바닥에 묻어버릴 것이다. 전쟁을 원한다면 기꺼이 상대해주지.”

“이, 이 오만한 수인 놈이……!”

가웨인의 얼굴이 분노로 하얗게 질려갔다. 그는 얼음 가시들을 바라보며 흠칫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심문관장 바르톨로메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심문관장님! 보십시오! 저들이 이토록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마녀의 주술에 걸려 이성을 잃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당장 저 사악한 음식을 만드는 인간 여자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때였다. 블레이드의 등 뒤에서 하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여전히 추위로 몸을 떨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예전의 나약한 하은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아기 늑대들과 자신을 지켜주는 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대한 적 앞에서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잠시만요, 전하.”

하은이 블레이드의 소맷자락을 살포시 잡으며 부드럽게 만류했다. 블레이드는 그녀의 눈빛에서 굳은 결의를 읽고 천천히 대검의 기세를 거두었다.

하은은 성벽 아래의 바르톨로메오 심문관장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가웨인 사제님. 제가 요사스러운 마법 요리로 아이들을 조종하고 있다고요? 참으로 터무니없는 모함이네요.”

“모함이라고? 네년이 만드는 그 정체 모를 디저트들이 아이들의 정신을 홀리고 마력을 강제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가웨인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하은은 입가에 차분하고도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두꺼운 장부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부가 아니었다. 하은의 영혼에 각인된 ‘힐링 레시피 도감’의 모든 수치와 기록을 인간의 글씨로 옮겨 담은, 철저하고도 과학적인 ‘보육 행정 장부’였다.

“바르톨로메오 심문관장님.”

하은이 장부를 높이 들어 올리며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 장부에는 제가 이곳 보육동을 맡은 이후로 아기 늑대들과 영지 내 전사들에게 급여한 모든 힐링 디저트의 원가 비율, 사용된 마력 정제 성분, 그리고 아이들의 마력 진정 임상 데이터가 소수점 아래 세 자리까지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은은 가볍게 손짓했다. 마샤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사본들을 경비병을 통해 이단심문관 측에 전달했다. 바르톨로메오가 굳은 얼굴로 그 서류를 받아 들었다.

“제 요리는 마법이나 주술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마력 영양학에 기반한 치료식입니다.”

하은의 목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특히 제가 사용하는 디저트의 핵심 성분 중 하나는, 지난번 영지 창고에서 발견한 ‘붉은 양념 단지’에 들어 있던 고대 열매 가루입니다.”

가웨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은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그 붉은 가루는 단순한 향신료가 아닙니다. 고대 문헌에 기록된 ‘아그니의 정수’로, 극소량만으로도 수인들의 체내에 쌓인 독소와 폭주 마력을 안전하게 중화시키는 천연 성분입니다. 저는 이를 정밀하게 희석하고 과학적인 비율로 조합하여 아이들의 마력 열병을 치료했을 뿐입니다. 제국 신전의 고대 약학 서적에도 기록되어 있는 합법적인 정화 방식이지요.”

바르톨로메오의 눈이 서류를 훑어내려 갈수록 빠르게 움직였다. 서류에 적힌 데이터는 너무나도 투명하고 명확했다. 각 날짜별 아기 늑대들의 마력 폭주 위험도 감소 그래프, 스트레스 지수 변화, 그리고 영지 귀족들이 보육동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서명한 평판 만족도 수치(98.7%)까지 완벽하게 도표화되어 있었다.

오물이나 요사스러운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그 어떤 최고급 약제실보다도 체계적이고 투명하게 관리된 완벽한 의료 및 보육 기록이었다.

“이것은…….”

바르톨로메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단순한 요리가 아니군. 고대의 마력 정화 공식을 현대적인 보육 행정에 완벽하게 접목한 훌륭한 기록이다. 신전에 보고된 이단 주술의 징후는커녕, 오히려 수인의 마력 열병을 치료하는 데 아주 모범적인 사례로 보이는군.”

“심문관장님! 그 마녀의 감언이설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가웨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저 서류들은 모두 조작된 것입니다! 어떻게 일개 인간 여자가 저런 완벽한 데이터를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분명 배후에 공작가의 음모가……!”

“가웨인 사제.”

바르톨로메오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는 서류를 소중하게 품에 넣으며 가웨인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대의 고발장에는 이 여인이 요사스러운 환각제로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제국의 그 어떤 학자들보다도 정밀하게 마력을 다루는 훌륭한 보육 전문가의 연구 기록이다. 게다가 영지 귀족들의 친필 서명까지 들어간 이 평판 지표를 거짓이라 우길 셈인가?”

“그, 그것은…….”

“이단심문국은 거짓된 사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선동에 놀아나는 기구가 아니다.”

바르톨로메오가 손을 들어 올려 군단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가웨인 사제. 그대의 무리한 고발로 인해 제국과 북부의 위대한 가문 사이에 불필요한 유혈 사태가 일어날 뻔했다. 신전으로 돌아가면 이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니 그리 알라.”

“심문관장님! 잠시만요!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가웨인이 절규하듯 외쳤지만, 이미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 뒤였다.

공작의 압도적인 무력 위협으로 기세를 꺾고, 하은의 완벽한 수치 장부와 과학적 증거 폭격으로 적의 명분을 완전히 박살 낸 통쾌한 승리였다. 제국의 정예 이단심문관들은 하은을 마녀가 아닌, 오히려 존경스러운 구원자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성벽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샤와 늑대 전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수석 보육장 만세!”

“하은 님이 가문의 명예를 지키셨다!”

하은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금 그녀의 뺨을 스쳤고, 몸 안의 온기가 급격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스르륵.

하은의 몸이 무너지려 하자, 블레이드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그의 뜨거운 가슴에 이마를 기댄 하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냈어요, 전하…….”

“그래, 그대가 가문을 또 한 번 구했다. 참으로 영리하고 대담하군.”

블레이드의 붉은 눈동자에 어려 있는 것은 단순한 신뢰를 넘어선 깊은 애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망토로 하은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그녀의 꽁꽁 얼어붙은 손을 입가로 가져가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따스함에 하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상실의 상처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이곳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과 아이들의 영원하고 따뜻한 안전지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은은 성문을 나서는 가웨인의 마지막 뒷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그의 품속, 은빛 사제복 틈새로 언뜻 보인 백금 인장이 찍힌 평범해 보이는 흰 편지. 그리고 그의 눈에 서린, 짐승보다 더 잔혹하고 번들거리는 광기 가득한 집착.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하은은 직감했다.

한편, 군대를 이끌고 성채에서 멀어지는 가웨인은 자신의 마차 안에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으으윽…… 하은…… 감히 나를 이토록 모욕해?”

그의 온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바르톨로메오의 의심을 사게 된 이상, 신전에서의 그의 입지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제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공작가와 그 계집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웨인은 품속에서 붉은빛으로 기괴하게 일렁이는 작은 금속 장치를 꺼내 들었다. 고대 유적에서 발굴한, 주변 수마일 내의 모든 수인 마력을 강제로 폭주시켜 미쳐 날뛰게 만드는 ‘마력 증폭 폭주 유도 장치’였다.

“두고 봐라.”

가웨인의 눈에 광기 어린 독기가 가득 찼다.

“그 요사스러운 디저트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 성채 안의 모든 맹수 놈들의 피를 미치게 만들어주마. 네년이 자랑하는 그 따뜻한 보금자리가 서로를 찢어발기는 지옥도로 변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지.”

어둠 속에서 붉은 마력 장치가 불길하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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