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하 빙고의 공기는 콧등을 아릿하게 적실 만큼 시리도록 차가웠다.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석조 벽면 사이로 미세한 성에가 은빛 가루처럼 반짝였다.

하은은 숨소리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 속에서, 품에 안은 동화책 형태의 ‘힐링 레시피 도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은은한 살구색 빛을 내뿜는 도감의 화면 위로, 세 개의 붉은 점이 아주 빠른 속도로 빙고 내부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경고! 정체불명의 침입자 3명 감지.] [현재 위치: 지하 빙고 진입로 15m 전방.] [대상들의 심박수가 가파르게 상승 중입니다.]

하은의 등 뒤에 서 있던 수석 시녀 마샤가 가느다란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마샤의 손끝이 단단한 가죽 소매 안쪽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평소 엄격하고 흐트러짐 없던 그녀의 눈동자에 낯선 침입자들을 향한 차가운 분노가 사납게 일렁였다.

“보육장 님, 놈들이 정말로 들어왔습니다. 이 신성한 보육동의 식자재 창고를 더럽히려 들다니…….”

“쉿, 마샤 님. 조금만 더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하은은 속삭이며 품 안의 붉은 양념 단지를 손끝으로 가만히 매만졌다. 거칠거칠하고 투박한 흙으로 구워진 단지 표면에서 미약하지만 아주 기분 좋은 온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난번 먼지 쌓인 지하 창고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이 작은 단지가 오늘 밤, 아이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지켜줄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될 터였다.

사락, 사락.

눈을 밟는 듯한 미세한 발소리가 빙고의 입구를 넘어 안쪽으로 기어들었다. 검은색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세 개의 그림자가 거대한 우유통들이 늘어선 중앙 보관대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들의 손에는 불길한 보랏빛 마력이 일렁이는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흐흐, 겨우 이딴 허술한 창고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북부의 늑대 맹수들도 소문만 요란했군.”

가장 덩치가 큰 자객이 낮게 낄낄거렸다. 그가 손에 든 유리병의 마개를 열자, 주변의 공기가 썩은 가죽처럼 퀴퀴하고 매캐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병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수인들의 마력을 강제로 뒤흔들어 미쳐 날뛰게 만드는 제국의 금지 약물, ‘검은 마력 독약’이었다.

“이 우유를 마신 아기 늑대 놈들이 어떻게 변할지 아주 기대가 되는군. 제아무리 고고한 윈터우드 공작이라도, 제 자식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피를 흘리며 괴물이 되는 꼴을 보면 미쳐버리겠지.”

자객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일 아침 아이들의 식탁에 오를 가장 크고 신선한 우유통의 뚜껑을 열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우유 표면 위로 검푸른 독약 방울이 떨어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우유, 우리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건데 함부로 손대지 마시겠어요?”

차가운 허공을 가르고 맑고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객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서린 입김을 뱉으며 걸어 나오는 것은,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연약한 인간 소녀였다. 하은은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뭐냐, 순순히 숨어있었으면 목숨은 건졌을 것을. 겨우 인간 보모 계집이 죽고 싶어 환장했군!”

자객의 우두머리가 비웃으며 독약 병을 우유통 속으로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찐득한 검은 액체가 하얀 우유 속으로 번져나가며 피어오르는 먹구름처럼 우유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우유통 내부의 마력 수치가 폭발적으로 요동치며 시퍼런 불꽃을 튀겼다.

“끝났다! 이제 이 우유는 마시는 즉시 영혼을 갉아먹는 맹독이 되었다!”

자객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자신들의 승리가 확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부드럽고도 가차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과연 그럴까요?”

하은은 지체 없이 품 안에서 붉은 양념 단지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고대의 붉은 마력 소금 가루가 붉은 장미 꽃가루처럼 화사하게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계피 향 같은 냄새가 순식간에 차가운 빙고 안을 가득 채웠다.

[시스템 가동: 힐링 레시피 ‘정화의 달콤 밀크잼’ 연성을 시작합니다.] [소모 체온: 2.5℃] [현재 사용자 체온: 36.5℃ -> 34.0℃]

순간, 하은의 손끝에서부터 찌릿한 한기가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차가움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눈앞이 잠시 아찔해졌다. 몸 안의 온기가 무서운 속도로 빨려 나가는 고통이었지만, 하은은 이빨을 악물며 버텨냈다. 아이들의 먹거리를 더럽히게 둘 수는 없었다. 과거의 화재 속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던 그 무력한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하은은 붉은 소금 가루를 오염된 우유통 속으로 과감하게 흩뿌렸다.

스스스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얀 우유 속에서 검게 소용돌이치던 마력 독소들이 붉은 가루와 닿자마자, 마치 봄눈 녹듯 부드럽게 정화되기 시작했다. 독소의 검은 사슬 구조가 산산이 부서지며 무해한 녹말과 천연 유당으로 빠르게 재조합되었다.

거기에 하은의 마법적인 연성 능력이 더해지자, 차갑던 우유통 아래에서 몽글몽글한 분홍빛 마력 열원이 피어올랐다. 우유는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설탕을 가득 넣고 졸인 듯한 달콤하고 고소한 캐러멜 향기가 지독했던 독약의 냄새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이, 이게 무슨……! 내 독약이 왜 굳어가는 거지?!”

자객이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우유통 안에는 독약 대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진득하고 달콤한 캐러멜색 밀크잼이 가득 차 있었다. 은은한 온기를 품은 밀크잼은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하은은 우유통 옆에 놓여 있던 커다란 나무 국자를 들어 올려, 듬뿍 퍼 올린 밀크잼을 자객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렇게 아까워하실 필요 없어요. 열심히 만드셨으니, 먼저 한 입 드셔보시겠어요?”

“미, 미친 년! 저리 치워!”

자객이 기겁하며 손을 휘둘렀으나, 하은은 재빠르게 국자를 놀려 그의 벌어진 입안으로 따뜻하고 달콤한 밀크잼을 듬뿍 밀어 넣었다.

“읍! 으읍?!”

자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혀끝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부드럽고 진한 달콤함, 그리고 고소한 우유의 풍미가 입안 가득 번졌다. 독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영혼까지 치유해 줄 것 같은 완벽한 극상의 디저트였다.

“맛있죠? 설탕을 전혀 넣지 않고도 고대 소금의 마력 중화 성분 덕분에 단맛이 극대화된 밀크잼이랍니다.”

하은이 생긋 웃으며 속삭였다.

그 순간, 자객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붙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신 밀크잼과 허공에 번진 붉은 소금 가루에는 검은 마력을 품은 자들의 체내 흐름을 완벽히 차단하는 마력 흡수 결정이 들어있었다. 고대의 붉은 소금은 불순하고 탁한 마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어떤 사슬보다 무거운 족쇄가 되는 법이었다.

“끄, 윽…… 몸이…… 움직이지 않아…….”

“바, 발이 얼어붙은 것 같다……!”

자객들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서 일렁이던 불길한 보랏빛 마력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지금입니다! 체포하세요!”

마샤의 날카로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 속에 매복해 있던 윈터우드 가문의 정예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순식간에 쓰러진 자객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손목에 마력 차단 수갑을 채웠다.

“보육동의 식자재는 안전합니다! 침입자들을 전원 생포했습니다!”

대장의 우렁찬 보고가 지하 빙고에 울려 퍼졌다. 완벽한 승리였다. 단 한 방울의 우유도 낭비되지 않았고, 아이들을 위협하려던 비열한 음모는 하은의 영리한 덫에 걸려 한순간에 종식되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는 순간, 하은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손끝이 완전히 감각을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체온이 34도까지 떨어지자, 심장이 삐걱거리며 느리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시리고 아팠다. 하은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우유통 가장자리를 짚었으나, 힘이 빠진 손가락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시야가 흐려지며 몸이 바닥으로 기울어지던 바로 그 찰나.

“무슨 짓을 한 건가, 하은.”

낮고 묵직한,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진동시키는 목소리와 함께 단단하고 거대한 품이 그녀의 무너지는 몸을 단단히 받아 안았다.

얼음 장벽처럼 차가운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체온은 태양보다 뜨거운 남자. 윈터우드 공작, 블레이드였다.

블레이드는 품에 안긴 하은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을 느끼고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깊은 초조함과 전율이 동시에 스쳤다.

“이 바보 같은 인간이…… 또 제 몸을 갉아먹으며 이런 짓을 벌였군.”

그는 가차 없이 하은의 두 손을 제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상상치도 못할 만큼 뜨겁고 강렬한 마력 온기가 하은의 얼어붙은 혈관 속으로 빠르게 흘러들어왔다.

“아으…….”

하은은 자신도 모르게 몽롱한 신음을 내뱉으며 블레이드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차갑던 심장 부근이 그의 온기로 인해 사르르 녹아내리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짜릿하고 달콤했다.

그의 품 안에서 체온이 35.5도까지 빠르게 회복되자, 하은은 겨우 눈을 제대로 뜰 수 있었다. 블레이드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자객들과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밀크잼 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경이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가웨인의 쥐새끼들이 보낸 독약을…… 완전히 정화해 무해한 음식으로 바꾼 것인가.”

“네……. 아이들이 먹을 우유였으니까요. 조금도 더럽히게 두고 싶지 않았어요.”

하은이 하얗게 질린 입술로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블레이드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하은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은 단순한 안도감이 아니었다. 이 연약하고 작은 인간 여성이, 자신의 가문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보여준 영민함과 강단에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대의 영리함과 용맹함이 이 성채를 구했다.”

블레이드는 자신의 가슴팍에 달고 있던, 가문 최고의 영예이자 보육에 대한 절대 권한을 상징하는 ‘은빛 늑대 보육장 표식’을 떼어냈다. 정교한 백금으로 조각된 아기 늑대 모양의 배지였다.

그는 떨리는 하은의 옷깃에 그 은빛 표식을 직접 조심스럽게 달아주었다. 그의 뜨거운 손가락끝이 그녀의 쇄골 부근에 닿을 때마다 기분 좋은 스파크가 일었다.

“오늘부로 그대는 이 성채의 임시 보모가 아니다. 가문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작인 내가 보증하는 ‘최고 수석 보육장’이다. 이 성채의 모든 보육 행정과 식자재 권한은 전적으로 그대의 손에 위임된다.”

마샤와 주변의 경비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했다.

“수석 보육장 님의 영명함을 칭송합니다!”

하은은 가슴에 얹어진 은빛 표식을 만지며 깊은 안도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이제 가웨인이 어떤 음모를 꾸며도, 영지 내의 확실한 권한을 쥔 자신이 아이들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경비병들에게 양팔이 붙잡힌 채 끌려가던 자객 우두머리가 갑자기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겨우 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어리석은 짐승 놈들과 비천한 인간 계집!”

그의 가슴팍 옷자락 사이로 붉고 기괴한 마법 문양이 급격하게 팽창하며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체포될 경우 영혼을 제물로 바쳐 주변을 초토화하는 신성제국의 금지된 자폭 마법, ‘성염의 심판’이었다.

“모두 대피하라! 자폭이다!”

경비병 대장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으나, 이미 자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꽃이 빙고의 천장을 타고 올라가 대연회장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 통로 끝에는 내일 축제를 위해 잠들어 있는 아기 늑대들의 침실이 있었다.

“아이들이……!”

하은의 눈동자가 공포로 크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불꽃이 통로를 삼키며 폭발적인 굉음이 성채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