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블레이드의 귓가가 발갛게 물든 채 고개를 끄덕인 그 시각, 영지 경계선 너머에서는 가웨인 신부가 보육동을 무너뜨릴 독약을 쥐고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혹한의 성채 안, 하은의 머릿속은 오직 앞으로의 ‘생존 계획’과 이를 위한 정밀한 수치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공작님. 매일 세 번, 제 체온이 위험 수치에 도달하기 전에 확실하게 온기를 나누어 주시기로요.”

하은은 품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두툼한 보육 장부를 꺼내 들었다. 사각사각, 깃펜 끝이 부드러운 종이 위를 구르며 단정한 글씨를 새겨 나갔다.

[보육장 하은 - 공작 블레이드의 온기 대여 공식 계약서] - 일시: 매일 정오, 그리고 체온 강하 경고등이 켜지는 임의의 시각 2회. - 방식: 양손 맞잡기 최소 10분 유지 (상황에 따라 포옹 및 밀착 접촉으로 대체 가능). - 목적: 힐링 디저트 연성 시 발생하는 극심한 저체온증(동사 위험) 방지 및 마력 충전.

“이것은 단순한 응석이 아니라, 보육동을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행정 절차예요. 공작님께서도 가문의 후계자들을 건강하게 키우고 싶으시다면 이 규칙을 철저히 이행해 주셔야 합니다.”

하은의 똑 부러지는 말소리에 블레이드는 헛기침을 가볍게 토해냈다. 그의 시선이 장부 위로 떨어졌다가, 이내 하은의 덤덤한 눈동자로 향했다.

“……행정 절차라니. 내 온기를 빼앗아 가는 일을 참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포장하는군.”

“포장이 아니라 규칙이죠. 윈터우드 가문은 강인하고 철저한 규율의 가문이잖아요? 저 역시 제 방식대로 이 보육동의 규칙을 세우는 것뿐이랍니다.”

하은은 생긋 웃으며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홀로그램 창, ‘힐링 레시피 도감’이 둥실 떠 있었다.

================================= [사용자: 하은] - 현재 체온: 34.8도 (경미한 한기 발생) - 마력원 충전율: 15% (경고) - 오늘의 추천 충전 대상: 블레이드 윈터우드 (동결 마력 속 초고열 불속성 마력 핵 보유) ※ 주의: 체온이 32도 이하로 떨어질 경우, 신체 마비 및 영구 동결이 시작됩니다. =================================

살짝 서린 한기 때문에 손끝이 조금 아릿했다. 아기 늑대 루이에게 줄 딸기 우유 푸딩을 만들며 소모했던 체온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이었다. 하은은 거침없이 장부를 덮고 블레이드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마침 정오가 되었네요. 첫 번째 공식 온기 충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말이냐?”

“그럼요. 미루다가는 제 손가락이 먼저 얼어붙어서 내일 아침 아이들의 영양 간식을 구울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 손을 이쪽으로.”

블레이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콧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은 이미 하은의 작고 하얀 손을 향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음 성벽의 지배자이자 전장을 피로 물들이던 늑대 공작이, 고작 인간 보모의 당돌한 요구에 손을 내어주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천천히 맞닿았다.

스르륵.

마치 한겨울의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 위에 봄날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은은 저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켰다. 블레이드의 손은 겉보기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린 것처럼 서늘했지만,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마치 가마솥 속의 잉여 불꽃처럼 뜨거웠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온기가 핏줄을 타고 올라와 얼어붙었던 심장을 쿵, 쿵 기분 좋게 울렸다.

“으응…….”

하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몽글몽글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뜨끈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푹 담근 것처럼 나른하고 포근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뺨이 발갛게 상기되고,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마치 봄바람을 맞은 아기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일렁이는 하은의 반응을 내려다보던 블레이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가락이 하은의 가녀린 손가락을 조금 더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그렇게 좋은가?”

그의 목소리에 아주 옅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살 것 같아요. 공작님은 정말 최고의 인간 난로이십니다. 아주 성능이 훌륭해요.”

“난로라니. 북부의 지배자에게 그런 해괴한 별명을 붙이는 이는 제국을 통틀어 너 하나뿐일 거다.”

“칭찬이에요. 이 추운 성채에서 공작님의 온기가 없다면 저는 진작에 하얀 얼음 조각상이 되었을 테니까요.”

하은이 눈을 휘어지게 접으며 웃자, 블레이드는 짐짓 큼큼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쫑긋 솟아오른 그의 검은 늑대 귀끝이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져 흔들리는 것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귀여운 반전이었다. 겉은 삐죽삐죽한 얼음 가시 같으면서도, 속은 이토록 다정하고 따스한 열기를 품고 있다니.

[띵동!] [체온이 상승합니다: 34.8도 -> 36.2도] [마력원 충전율: 52%]

도감의 알림음이 맑은 종소리처럼 하은의 귓가에 울렸다.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안도감과 함께, 하은은 맞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을 조금 더 음미했다. 비즈니스라는 핑계를 댔지만,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바람을 막아주는 두꺼운 돌벽 사이로, 아주 작은 날갯짓 소리가 파르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타닥.

공작 집무실의 커다란 아치형 유리창 너머로, 새하얀 깃털을 가진 기이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려앉았다. 북부의 혹한 속에서도 깃털 하나 상하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 있는 그 새는, 부리에 작은 백금빛 고리를 물고 있었다.

블레이드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좁혀졌다.

“전령조인가. 영지 경계 너머에서 온 놈이군.”

그가 손을 떼려 하자, 하은은 아쉬운 마음에 슬쩍 그의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꽉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블레이드는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창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칼바람과 함께 전령조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블레이드가 새의 다리에 묶인 일반적인 군사 보고서를 확인하는 사이, 하은의 날카로운 눈길은 전령조의 깃털 틈새로 향했다.

‘저건……?’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릴 때마다, 하얗고 보드라운 깃털들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반짝이는 은빛 실선이 보였다. 하은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눈앞에 도감의 경고창이 붉게 점멸했다.

[위험 감지! 대상의 신체에 숨겨진 특수 마법 인장 발견.] [추적 코드: 가웨인 셀레스티아 - 신성제국 백금 인장] [도감 분석 기능 활성화: 숨겨진 밀서를 감지했습니다.]

하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웨인. 직전 화에서 보육동을 파멸시키겠다며 검은 독약을 흔들던 그 광신적인 사제의 이름이었다. 그가 벌써 손을 뻗은 것이 분명했다.

하은은 자연스럽게 전령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머, 참 예쁜 새네요. 북부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깃털이 어쩜 이렇게 고울까요?”

마치 아기 동물을 사랑하는 순진한 보모처럼, 하은은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새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새는 하은의 다정한 마력에 취한 듯 얌전하게 눈을 감았다. 블레이드가 군사 보고서를 읽는 데 집중한 틈을 타, 하은은 전령조의 가장 깊숙한 날개 깃털 밑바닥에 교묘하게 붙어 있던 아주 얇고 평평한 백금 인장 편지를 손끝으로 가볍게 떼어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도의 은닉 마법이 걸린 종이였다. 하지만 하은의 손끝이 닿는 순간, 도감의 마력이 작동하며 그 은닉 마법을 소리 없이 무력화시켰다. 하은은 편지를 소매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공작님, 전령조가 많이 지쳐 보이네요. 보육동에 데려가서 따뜻한 물과 모이를 좀 먹여도 될까요?”

블레이드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라. 영지 경계 부근의 결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는 보고가 있군. 가웨인 그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가웨인…… 추기경 대리 말씀이신가요?”

“그래. 수인들을 악마의 씨앗이라 부르며 호시탐탐 우리 가문을 무너뜨릴 기회를 노리는 교활한 뱀이지. 이번에도 보육동을 목표로 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블레이드의 목소리에 서리가 맺혔다.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가차 없는 살기가 일렁였다.

하은은 소매 속 백금 편지를 꽉 쥐었다.

‘역시나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과, 과거 보육원 화재 때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던 뼈아픈 부채감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랐. 이번에는 단 한 명의 아이도, 이 따뜻한 보금자리도 가웨인의 더러운 손에 더럽혀지게 두지 않을 것이다.

하은은 전령조를 품에 안고 서둘러 보육동의 개인 집무실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소매에서 백금 인장 편지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평범한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지였지만, 하은이 도감의 ‘비밀 장부 해독 기능’을 활성화하자 눈부신 푸른 빛과 함께 글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밀서 해독 진행 중…… 10%…… 50%…… 100%] [해독 완료: 가웨인의 사보타주 지령서]

- 내용: “오늘 밤, 공작가의 식재료 보관 심장부인 지하 빙고(氷庫)에 침투하라. 보육동으로 흘러 들어갈 모든 식자재와 약초에 ‘마력 증폭 발작제’를 투입할 것이다. 어린 짐승들이 스스로 미쳐 날뛰며 제 어미와 보모의 목을 물어뜯게 만들어라.”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하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손끝이 분노로 가볍게 떨렸다.

“먹을 것에 장난질을 쳐서 아이들을 미치게 만들겠다고……?”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이들에게 먹이는 음식은 하은에게 있어 가장 신성하고 안전해야 할 생명줄이었다. 그것을 오염시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려 하다니, 가웨인의 수법은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하은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철저하게 계산적인 보육 경영자의 마인드로 돌아왔다.

‘오늘 밤 침투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오히려 잘됐어. 미리 덫을 쳐두면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어.’

그녀는 문득 지난번 지하 창고 깊은 곳에서 발견했던,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던 붉은 양념 단지를 떠올렸다.

[고대의 붉은 마력 소금 단지] - 성분: 극소량의 고대 마력 중화 성분 및 마력 흡수 결정 함유. - 효능: 어떤 종류의 인위적인 마력 폭주 약물이나 독소도 즉각적으로 흡수하여 무해한 전분으로 분해함.

‘이걸 식자재 창고 주변에 미리 살포해 두고, 도감의 레이더망으로 침입자들을 감시하면 완벽해.’

하은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붉은 양념 단지를 챙겨 들고, 보육동의 든든한 행정 조력자인 수석 시녀 마샤를 불렀다.

“마샤 님, 오늘 밤 지하 빙고의 경비를 겉으로는 허술하게 풀어주세요. 그리고 이 붉은 가루를 빙고 입구와 식자재 보관함 주변에 얇게 뿌려두어 주십시오.”

마샤는 하은이 건넨 단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은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자 이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장 님의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요. 가문의 전통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밤이 깊어 가고, 성채 외부에는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은은 방 안의 램프 불빛을 낮춘 채, 도감의 실시간 감시 레이더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화면에 표시된 푸른빛의 성채 지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정적을 깨고 붉은 점들이 지도 가장자리에서 나타났다.

[경고! 정체불명의 침입자 3명 감지.] [현재 위치: 지하 빙고 진입로 50m 전방.] [이동 속도: 매우 빠름 (은신 마법 사용 중).]

하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쥐새끼들이 드디어 덫으로 기어들어 오는구나.”

그녀는 붉은 단지를 꽉 쥐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재료 보관 심장부인 지하 빙고로 몰래 접근하는 검은 자객들의 그림자가 도감 레이더망에 선명하게 포착되어 번뜩였다. 위기의 순간, 하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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