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소동으로 다소 무리하여 디저트 가루를 살포한 탓에 하은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을 사르르 떨기 시작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지독한 한기가 뼈마디를 타고 올라와 심장으로 내달렸다. 허공을 헤매던 하은의 시야가 잘게 부서지는 얼음 유리창처럼 흐릿하게 일렁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골 한가운데가 시리도록 저려 와 제대로 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을 잃어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속눈썹 위에는 하얀 서리가 보슬보슬 피어올랐다.

[경고: 사용자 체온 32.8도. 한계 돌파 직전!] [경고: 마력원이 위험 수준으로 고갈되었습니다. 60초 이내에 온기를 충전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동결 상태에 빠집니다!]

허공에 붉은빛으로 깜빡이는 도감의 경고창이 눈부시게 명멸했다. 하은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바닥을 짚었지만,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보다 제 손끝이 더 차가웠다.

"하은아! 왜 그래? 어디 아파?"

깜짝 놀란 루이가 앞발을 구르며 낑낑거렸다. 작은 꼬리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였다. 하은은 아이를 안심시켜 주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차갑게 굳어버린 혀에서는 오직 덜덜 떨리는 거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얼음벽처럼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진 품 안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뜨겁다는 것을 하은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블레이드가 커다란 몸을 숙여 하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단단한 손길이 닿는 순간, 하은은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그의 품을 향해 고개를 파묻었다. 장갑 너머로도 미세하게 전해지는 후끈한 열기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몸이... 얼음덩이 같군. 대체 무엇을 한 거지?"

블레이드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당혹감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스쳤다. 하은의 뺨은 이미 핏기를 잃어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입술은 누르스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방치하면 이 작은 인간의 숨이 영영 끊어질 것만 같았다.

블레이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은의 무릎 밑과 등 뒤로 강인한 팔을 밀어 넣었다. 단숨에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 들자, 하은의 머리가 그의 단단한 가슴팍으로 툭 꺾였다.

"비켜라."

그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주위에 모여 있던 호위 기사들과 하인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루이가 뒤를 쫓아오려 하자, 블레이드는 매서운 눈빛으로 아들을 제지했다.

"루이, 너는 보육실에 남아 있어라. 의원을 부르고 보육동의 경비를 강화해."

"하지만 아빠! 하은이가...!"

"내가 살린다. 그러니까 넌 네 책무를 다해라."

짧고 단호한 명령을 남긴 블레이드는 곧장 보육동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북부의 매서운 칼바람이 복도를 따라 휘몰아쳤지만, 그의 넓은 어깨와 검은 모피 코트가 방패막이가 되어 하은에게 닿는 바람을 차단했다.

블레이드가 향한 곳은 본성의 가장 깊숙한 곳, 오직 공작만이 출입할 수 있는 전용 온실이었다. 사계절 내내 거대한 마력 열석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어, 눈보라가 치는 북부에서도 유일하게 붉은 동백꽃과 푸른 잎사귀들이 만발하는 비밀스러운 정원이었다.

쿵, 하고 온실의 두꺼운 목재 문이 열리자마자 훈훈하고 습기 찬 공기가 하은의 살결에 닿았다. 하지만 외부의 온기만으로는 하은의 심장 깊은 곳까지 얼어붙은 한기를 녹일 수 없었다.

블레이드는 온실 한가운데 놓인 부드러운 가죽 침상 위에 하은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인간. 정신 차려라. 눈을 떠."

그의 목소리에 평소와 달리 다급함이 묻어났다.

하은은 혼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과거 보육원의 불길 속에서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홀로 남겨졌던 그 끔찍한 기억이 엄습했다.

'안 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어. 겨우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 루이를, 그 부드러운 털뭉치들을 두고 이대로 차갑게 죽을 수는 없어.'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생존 본능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하은은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있는 것은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지만 속은 태양만큼 뜨거운 마력을 품은 거대한 난로였다.

"으... 으윽..."

하은은 떨리는 두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블레이드의 맨손을 움켜잡으려 했으나, 굳어버린 손가락은 그의 단단한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더 깊은 온기가 필요했다. 겉을 감싼 옷자락 따위가 아니라, 그의 살결 밑에서 세차게 뛰는 뜨거운 마력의 근원이 필요했다.

하은은 본능적으로 블레이드의 은빛 머리칼을 헤치며 그의 목덜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가녀린 두 팔이 그의 단단한 목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뺨이 그의 목덜미와 쇄골 사이의 뜨거운 살결에 사정없이 밀착되었다.

"하윽...!"

블레이드가 거친 숨을 들이쉬며 굳어졌다.

인간의 가냘픈 몸뚱이가 제 목덜미에 매달려 오는 감각은 생소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하은의 뺨은 얼음 조각을 얹어놓은 것처럼 차가웠지만, 그녀의 간절한 손길은 불을 뿜는 것처럼 그의 심장을 자극했다.

블레이드의 목줄기가 움찔거리며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그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거대한 동결 마력과 그것을 억누르는 초고열의 붉은 마력이 부딪히며 거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은은 그 열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스템 가동: 온기 흡수 시작!] [접촉 부위: 목덜미 및 쇄골 (밀착도: 상)] [체온 변화: 31.5도 -> 32.2도 -> 33.0도... 급상승 중!]

하은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도감 장부가 떠올랐다. 장부 위에는 실시간으로 온기 복구율을 나타내는 막대그래프가 요동치며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접촉 면적이 넓어질수록, 밀착도가 깊어질수록 붉은색 막대그래프는 무서운 속도로 차올랐다.

"하은... 무슨 짓을..."

블레이드는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수인의 본능이 이 낯선 접촉에 경고등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 목덜미를 파고들며 덜덜 떠는 하은의 작은 몸집을 느끼는 순간, 그의 손길은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 가벼웠다. 마치 조금만 힘을 주어 쥐면 바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존재. 하지만 이 여린 인간이 제 아들의 목숨을 구했고, 얼어붙어 가던 보육동에 따스한 빵 냄새를 불어넣었다.

만약 이 인간이 여기서 차갑게 식어 사라진다면?

보육동은 다시 얼음지옥이 될 것이고, 제 아들 루이는 또다시 폭주 속에서 고통받다 죽어갈 것이다. 가문이 마주할 그 어두운 미래가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블레이드의 가슴속에서 무거운 책임감과 달갑지 않은 소유욕이 고개를 들었다.

"결코...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블레이드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오히려 자신의 억센 팔로 하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녀를 제 넓은 가슴팍으로 완전히 밀착시켜 자신의 체온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화르륵,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온의 마력이 하은의 전신을 감쌌다.

[접촉 면적 확대: 전신 밀착 (밀착도: 최상)] [온기 복구율: 120% 돌파!] [체온 변화: 34.5도... 35.2도... 35.8도. 정상 범위 진입 중.]

뜨거운 온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얼어붙었던 혈액을 다시 돌게 만들었다. 하은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이 풀린 듯 블레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굳어 있던 손가락에 부드러운 감각이 돌아왔고, 이마에는 몽글몽글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온실의 붉은 동백꽃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힐 때쯤 하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굳건한 턱선과 단단한 목덜미였다. 그리고 자신을 빈틈없이 껴안고 있는 우람한 팔통.

"앗..."

하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블레이드의 팔은 쇠사슬처럼 단단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라. 아직 완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블레이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의 시선은 하은의 창백했던 뺨에 다시금 발그레한 핏기가 도는 것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저, 전하... 이제 괜찮습니다. 체온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하은은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블레이드는 그제야 천천히 팔의 힘을 풀었다. 하은은 조심스럽게 침상 위로 내려앉으며 흐트러진 옷가지를 추슬렀다. 가슴이 쿵쾅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였다지만, 이 냉혈한 공작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체온을 갈구했다니.

하지만 부끄러움도 잠시, 하은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기묘한 '저체온증 페널티'는 앞으로도 계속될 터였다. 아기 늑대들을 돌보기 위해 힐링 푸드를 연성할 때마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하은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블레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귀끝이 미세하게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것을 놀릴 때가 아니었다.

"전하. 제 몸에 일어난 현상에 대해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의 푸른 눈동자가 하은에게로 향했다.

"말해라. 네 몸이 왜 갑자기 얼음처럼 식어버린 거지? 네가 사용하는 그 기묘한 마법과 관련이 있는 건가?"

"네, 맞습니다."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수치와 장부의 개념을 꺼내 들었다.

"제가 루이와 아이들을 위해 만드는 특별한 디저트는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제 생명의 온기를 마력원으로 치환하여 연성하는 일종의 등가교환입니다.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의 마력을 진정시킬 때마다, 제 체온은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블레이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 자신을 깎아 먹으며 아이들을 살리고 있었다는 뜻인가?"

"네. 오늘처럼 대량으로 연성할 경우, 제 체온은 동사 직전인 31도까지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블레이드의 손을 지목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마력 핵을 품고 계신, 전하와의 물리적 접촉뿐입니다."

온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붉은 동백꽃 잎 하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블레이드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문의 저주받은 동결 마력을 억누르기 위해 늘 뜨겁게 들꿇던 자신의 마력. 그것이 이 나약한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니.

하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만약 제가 체온 저하로 사망하거나 활동 불능 상태가 된다면, 보육동의 모든 시스템은 정지합니다. 제 식단표와 힐링 푸드가 없다면 아이들은 다시 마력 폭주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그것은 원치 않으시겠지요?"

철저하게 계산된 행정적이고 경영적인 접근이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가문의 존속과 아이들의 안위를 담보로 한 완벽한 협상 카드.

블레이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나약한 인간 여자는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몸을 난로처럼 사용하겠다는 당돌한 거래를.

"그래서,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지?"

"전속 계약을 제안합니다."

하은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에 최소 세 번. 제가 연성을 마친 후 체온이 떨어질 때마다 전하의 온기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손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오늘처럼 심각한 위기 상황에는... 더 깊은 신체 접촉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공식적인 계약으로 보장해 주십시오."

블레이드는 하은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과거의 상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 가문의 아이들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굳은 결의가 그 맑은 눈동자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없다면 가문은 다시 암흑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그것은 장군이자 공작인 그가 결코 허용할 수 없는 파멸이었다.

"...좋다."

블레이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무거웠지만, 그 안에는 묘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하루 세 번, 네가 원할 때마다 내 온기를 내어주지. 손이든, 그 이상이든 관계없다. 내 가문의 보육장을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그가 말을 마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뺨과 달리, 쫑긋 솟은 늑대의 귀끝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하은은 놓치지 않았다.

'성공이다.'

하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로써 가장 확실한 '생존 난로'를 영구적으로 확보한 셈이었다. 앞으로 어떤 힐링 푸드라도 체온 걱정 없이 연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문득 지난번 창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던 먼지 쌓인 붉은 양념 단지를 떠올렸다. 도감의 분석에 따르면 그 안에는 극소량의 고대 마력 중화 성분이 들어 있었다. 평범한 향신료처럼 방치되어 있었지만,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위기를 해결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평화로운 온실의 온기와 달리, 윈터우드 공작가의 장벽 너머 북부 영지 외곽은 전혀 다른 음모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공작가 영지 경계선 근처에 위치한 신성제국의 임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차가운 달빛이 제단 위를 비추고 있었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사내, 가웨인 셀레스티아가 광신적인 미소를 지으며 어두운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의 손에는 보랏빛으로 불길하게 빛나는 작은 시약병이 들려 있었다.

"더러운 짐승들의 소굴이 감히 따뜻한 온기를 품으려 하다니."

가웨인의 부드러운 목소리 가득 뼈를 찌르는 듯한 독기가 묻어났다.

"보육동의 아이들이 모두 폭주하여 스스로 그 성채를 잿더미로 만들 때, 신의 구원이 그곳에 임할지어다. 그 잘난 인간 보모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기폭제가 되게 해 주지."

그가 시약병의 마개를 열자, 지독하게 달콤하면서도 매캐한 냄새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아기 늑대들의 마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켜 미쳐 날뛰게 만들 최악의 독약이었다. 가웨인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성당의 지하 벽면을 타고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