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인간. 방금 그 한기는 대체 무엇이지?"

귓가를 때리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하은은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름을 간신히 억눌렀다.

블레이드 윈터우드 공작의 굳은 손아귀가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무섭게 쥐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굶주린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하은의 검은 모피 망토 깃자락에 정교하게 맺힌 하얀 서리꽃이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서 위태롭게 반짝였다.

단순한 겨울의 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력의 잔재였다.

하은은 입술을 깨물며 차오르는 신음 소리를 삼켰다. 온몸의 온기를 빨아들이는 '힐링 레시피 도감'의 페널티 탓에 손끝이 마치 얼음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나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 북부의 겨울바람이 워낙 매서워 뼈마디가 얼어붙은 모양이라고요. 인간의 몸이란 이토록 나약해서 틈만 나면 서리가 돋는 법이랍니다."

"거짓말을 하는군."

블레이드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하은은 제 손목을 타고 흘러드는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겉은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였지만, 그 속에 내포된 마력의 심핵은 태양보다 뜨거웠다. 그 미약한 접촉만으로도 얼어붙던 하은의 혈관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한 쾌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의심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때, 복도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아기 늑대의 울음소리가 공명했다. 루이의 방 바로 옆,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낡은 놀이방 방향이었다.

"앗, 아이가...!"

하은은 다급한 표정으로 블레이드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홱 빼내었다. 블레이드는 굳이 그녀를 다시 붙잡지 않은 채, 붉은 눈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하은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복도를 달렸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도착한 놀이방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의 대리석 벽면은 시퍼런 서리로 뒤덮여 있었고, 격자무늬 유리창은 사나운 북풍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가 있었다. 그 깨진 틈새로 영하의 칼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방 한구석, 낡은 목마 뒤에 잔뜩 움츠러든 아기 늑대 한 마리가 발바닥이 시린지 연신 발을 번갈아 들며 깽깽 울어대고 있었다.

"이런 곳에 아이를 방치하다니... 무책임해도 유분수지."

하은의 눈자위가 붉게 달아올랐다. 과거, 차가운 보육원 바닥에서 이불 한 장 없이 떨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단 한 명의 아이도 차가운 어둠 속에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맹세가 가슴을 짓눌렀다.

눈앞에 반짝이는 반투명한 책장, '힐링 레시피 도감'이 펼쳐졌다.

[보육 환경 상태: 극저온 (영하 9.2도)] [스트레스 지수: 89% / 마력 폭주 위험도: 경고] [추천 솔루션: 단열 마법석 벽지 연성 및 온기 장벽 구축] [연성 대가: 시전자 체온 1.5도 강제 소모]

체온 1.5도 소모. 현재 하은의 체온은 겨우 기준치를 넘긴 상태였다. 여기서 더 떨어지면 손끝이 마비되는 저체온증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해야 해. 저 아이가 얼어 죽기 전에.'

하은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도감 활성화. 단열 마법석 벽지, 연성 개시."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몽글몽글한 분홍빛 마법 입자들이 피어났다. 따스한 빛줄기가 춤을 추듯 흘러가 얼어붙은 석조 벽면을 부드럽게 감쌌다. 시퍼런 얼음장 같던 대리석 위로 보들보들하고 푹신한 살구색 가죽 질감의 벽지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은의 몸에 격렬한 오한이 들이닥쳤다.

"으윽...!"

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식어 내려갔다. 시야가 핑 돌며 바닥이 일렁였다.

[체온: 34.1도... 하강 중]

하은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벽을 짚었다. 손끝에 닿는 벽면은 이미 그녀가 연성한 단열 벽지 덕분에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변해 있었다. 깨진 창문 틈새로는 투명한 온기 장벽이 쳐져 지독한 북풍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상 22도까지 치솟았다.

"깽...?"

구석에서 떨던 아기 늑대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신기하다는 듯 발바닥을 따뜻해진 바닥에 대보았다. 그리고 이내 안심한 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하은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왔다.

하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기 늑대를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털 뭉치의 촉감이 차가운 품을 조금이나마 채워주었지만, 여전히 뼛속까지 시린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대로는 위험해. 진짜 얼어 죽을지도 몰라.'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혀끝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이 성채에서 가장 뜨거운 마력원인 블레이드 공작과 접촉해야 했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

하은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침 공작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시종들의 대화를 엿들은 참이었다. 그녀는 깃털 먼지털이를 품에 안고, 집무실 청소를 돕겠다는 구실로 조용히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웅장하고 삭막한 집무실 내부에는 흑요석으로 깎아 만든 거대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한가운데, 붉은 비단 받침대 위에 올려진 주먹만 한 보석이 하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작가의 영지 보물이자 힘의 원천인 '심장 마력 핵석'이었다.

겉은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차디찬 푸른빛을 띠고 있었지만, 투명한 결정의 깊은 중심부에는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붉은 불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은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 먼지털이를 제대로 쥘 수조차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마력 핵석의 표면에 살포시 갖다 대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웅웅웅!

아무런 반응도 없던 마력 핵석이 하은의 손길이 닿자마자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있던 투명한 푸른 결정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푸른 빛을 발산하며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핵석의 중심부에서 용솟음치던 붉은 불꽃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요동쳤다. 그리고 아주 정교하고 부드러운 열기의 아지랑이가 하은의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

순간적으로 온몸의 혈관이 확장되며 짜릿한 온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얼음장 같던 손끝에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지독한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체온: 34.0도 -> 35.1도. 미약하게 상승 중]

하은은 황홀한 감각에 취해 핵석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마치 이 보석이 그녀의 냉기를 정화하고 온기를 나누어 주는 것만 같았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깊은 저음이 고요한 집무실을 갈랐다.

하은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문가에는 어느새 돌아온 블레이드가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반쯤 열려 빛을 발하고 있는 핵석과, 그 앞에 서 있는 하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블레이드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그 핵석은 윈터우드 혈통의 마력에만 반응하는 물건이다. 일개 인간인 네가 만져서 빛을 발할 리가 없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충격과 강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블레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하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만드는 그림자가 하은을 덮쳤다.

하은은 침착하게 먼지털이를 치켜들며 부드럽게 웃었다.

"전하, 오해이십니다. 보석이 워낙 신기하게 생겨 먼지를 털어내려던 것뿐이옵니다. 마침 제 손에 묻어 있던 마력 억제 가루가 닿아 잠시 빛이 난 모양이어요."

"마력 억제 가루라고?"

"예. 아기들의 폭주를 가라앉히기 위해 늘 보모복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는 소량의 가루입니다. 그것이 핵석의 차가운 표면에 닿아 화학적 반응을 일으킨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얕은 속임수이지요."

블레이드는 그녀의 군더더기 없는 해명에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눈치였지만, 핵석을 만져보아도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는 낮게 쯧,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당장 나가라. 내 서재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이는 자는 누구든 용서치 않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하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비록 의심은 샀지만, 핵석과의 공명 덕분에 죽음의 고비는 넘겼다. 이 신비로운 공명 현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도감을 통해 자세히 분석해 봐야 할 터였다.

***

보육동으로 돌아오는 하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보육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수석 시녀 마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샤는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오는 보육실 내부와, 구석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아기 늑대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은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방은 마법사들이 결계를 쳐도 냉기가 스며들던 곳인데... 왜 이토록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것입니까?"

마샤의 목소리가 경외감으로 잘게 떨렸다.

하은은 싱긋 웃으며 품에서 미리 준비해 둔 가죽 장부를 꺼내 마샤에게 건넸다. 도감의 경영 가이드를 바탕으로 밤새 정리한 '보육실 영양 원가 명세서'였다.

"마샤, 이것을 읽어보세요."

마샤는 의아한 표정으로 장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부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일목요연한 숫자들이 가득했다.

기존 시녀들이 아기 늑대들의 마력 열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제국에서 들여온 고가의 마력 억제제 구매 비용, 그리고 그 비용의 무려 70%가 시녀장의 개인 주머니로 들어간 횡령 정황이 붉은 글씨로 명명백백하게 적혀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시녀장 파벌이 이토록 거액의 예산을 빼돌리고 있었다니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은이 장부의 다음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배급된 식단은 영양가가 전혀 없는 딱딱한 호밀빵과 묽은 염소 젖뿐이었습니다. 마력 폭주는 신체 내부의 영양 불균형과 심리적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질병입니다. 저들은 고의로 아이들을 방치하고, 폭주를 유도해 더 많은 약값을 청구해 온 것입니다."

마샤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려갔다. 수십 년간 공작가에 헌신해 온 그녀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추악한 배신이었다.

"하은 님이 새로 작성하신 이 예산안은..."

"예. 기존 억제제 비용의 단 10%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완벽한 단열 환경을 제공하고 신선한 유제품과 과일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수치로 증명해 드리지요."

하은의 단호하고 주도면밀한 목소리에 마샤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단순한 나약한 인간인 줄 알았건만, 하은은 그 어떤 귀족 행정관보다도 철저하고 유능한 경영자였다.

"하은 님..."

마샤가 하은의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예의상 하던 인사가 아닌, 진심 어린 존경과 복종의 의미였다.

"이 늙은이가 눈이 멀어 가문의 어린싹들이 시들어가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하은 님의 혜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보육동의 모든 살림과 행정 권한은 전적으로 하은 님을 따르겠습니다. 그 누구도 하은 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기존 시녀들의 학대성 방치를 완벽한 수치 장부와 공간 혁신으로 한 방에 박살 낸 통쾌한 순간이었다.

***

"앙! 하은이 왔어?"

루이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서 꼬리를 팽이처럼 돌리던 루이가 폴짝 뛰어내려 하은의 품으로 안겼다. 보들보들한 은빛 털이 하은의 턱끝을 간질였다.

"우리 루이, 누나 기다렸어?"

하은은 루이를 안아 들고 준비해 온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앙증맞은 유리 컵에 담긴 '따끈따끈 딸기 우유 푸딩'이 놓여 있었다. 몽글몽글한 분홍빛 푸딩 위로 달콤하고 고소한 우유 향이 김을 타고 피어올랐다. 하은이 마력을 불어넣어 연성한 특제 힐링 디저트였다.

루이의 코끝이 실룩였다.

"이거... 냄새 조아. 달콤해!"

"루이 입맛에 맞게 따뜻하게 만들었어. 어서 먹어봐."

하은이 은숟가락으로 푸딩을 한 술 크게 떠서 루이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루이는 붉은 입술을 쩍 벌려 푸딩을 쏙 받아먹었다.

부드러운 푸딩이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며 달콤한 딸기 향과 고소한 우유의 풍미가 입안 가득 번졌다. 따뜻한 온기가 루이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전신에 퍼졌다.

그 순간, 루이의 몸을 감싸고 있던 미세한 붉은 마력 오라가 눈 녹듯 사라졌다.

[루이 윈터우드: 마력 폭주율 0% (완전 진정)] [호감도 수치: 급상승!]

"앙! 너무 마시써! 하은이 최고야, 진짜 최고!"

루이는 신이 나서 하은의 품에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보들보들한 귀가 하은의 뺨에 닿을 때마다 몽글몽글한 행복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아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이 차가웠던 응어리를 녹여내렸다.

도감의 화면에 초록색 알림이 연신 떠올랐다.

[보육 시설 안정도: 최상] [영지 내 평판 지표: 상승 중]

하은은 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소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제 이 차갑고 삭막한 요새에 자신만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 평화롭고 따뜻한 순간.

-쾅!

보육실의 튼튼한 참나무 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렸다.

달콤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문가에 나타난 인물은 화려한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잔뜩 독기를 품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차남 파벌의 사주를 받은 시녀장, 가웨인의 수하였다.

그녀의 뒤에는 차가운 철제 갑옷을 입은 공작가 사병들이 칼자루를 쥔 채 서 있었다.

"사악한 인간 보모년이 감히 가문의 보육동을 제멋대로 개조하고 아이들을 세뇌하고 있었구나!"

시녀장이 손에 든 황금빛 인장이 찍힌 위임장을 치켜들며 사납게 짖어댔다.

"대공 전하의 특별 위임을 받아 보육동의 모든 권한을 회수한다! 저 불경한 인간 보모를 당장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사병들이 일제히 구두 굽 소리를 내며 하은을 향해 좁혀 들어왔다. 루이가 하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지만, 시녀장의 비열한 미소는 깊어질 뿐이었다.

하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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