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 루이를 품에 안고 느꼈던 몽글몽글한 안도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야 아래편에서 쉴 새 없이 깜빡이는 핏빛 경고창이 하은의 망막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시전자 생명 위험 경고!] [연속적인 마력 연성 및 냉기 노출로 인해 체온이 급격히 하강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전자의 체온: 34.5°C (저체온증 2단계 진입)] [경고: 1시간 이내에 마력원(블레이드 윈터우드)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온기를 충전하지 않을 경우, 신체 활동이 영구 정지(사망)됩니다!]
싸늘한 이명이 귓가를 웅웅 맴돌았다. 하은은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루이에게 줄 딸기 우유 푸딩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발그레한 빛을 띠던 손톱 밑이, 어느새 퍼렇게 죽어 있었다. 손가락 끝마디부터 감각이 하나둘씩 지워지며 딱딱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지독한 한기가 혈관을 타고 심장을 향해 느릿느릿 기어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품 안에서 딸기 우유 푸딩을 웅얼웅얼 받아먹던 루이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하은을 올려다보았다. 아기 늑대의 보드라운 귀가 힘없이 쳐지며 하은의 가슴팍에 보들보들한 이마를 비벼왔다. 마력 열병이 가라앉아 노곤해진 탓이었다.
"루이, 착하지…… 잠시만 요 잎새 같은 침대에 누워 있을까?"
하은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다스리며 루이를 푹신한 아기 침대에 눕혔다.
옆에 서 있던 유모 마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늘 칼날처럼 꼿꼿하던 마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하은이 루이를 살려내는 기적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리라.
"하은 님, 얼굴빛이 무척 창백하십니다. 혹시 무리를 하신 건……."
"아니에요, 마샤. 잠시……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올게요."
하은은 이가 맞부딪쳐 덜덜 떨리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필요한 건 따뜻한 이불이나 벽로의 불꽃이 아니었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포악하고 차갑지만, 동시에 심장 깊은 곳에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불꽃 마력을 품고 있는 단 한 사람. 방금 전 보육동을 나간 블레이드 윈터우드 공작의 온기만이 이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어.'
과거 보호소에서 일어났던 시뻘건 화염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는 힘이 부족해 소중한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겨우 루이를 구했고, 나만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갈 첫걸음을 뗐다. 이대로 눈밭 위의 성냥불처럼 허무하게 꺼질 수는 없었다.
하은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보육동의 두꺼운 참나무 문을 밀어 열었다.
회색빛 석조 벽면마다 푸르스름한 성에가 끼어 있는 성채의 복도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음 송곳이 발바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정강이를 타고 올라왔다.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리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현재 시전자의 체온: 34.2°C] [심장 박동 수가 저하되고 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눈앞이 가뭇하게 흐려지며 복도의 전경이 뱅글뱅글 돌았다. 저 멀리, 거대한 어둠처럼 흔들리는 인형이 보였다.
블레이드였다.
그는 어깨에 시커먼 흑호의 모피 망토를 걸친 채, 호위 기사들을 거느리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빠르고 단호했다. 마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먼 나라의 얼음 조각상처럼 차가운 뒷모습이었다.
"전, 하……."
목구멍이 꽁꽁 얼어붙어 쇳소리 섞인 바람 빠지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는 차가운 복도의 정적 속으로 힘없이 가라앉았다.
블레이드와의 거리는 대략 서른 걸음. 하지만 하은이 걷는 속도보다 그가 멀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대로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면, 하은은 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얼음 인형이 되어 발견될 터였다.
'달려야 해.'
하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씨를 쥐어짜 내듯 발바닥으로 얼음 바닥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닥, 타닥.
불규칙하고 위태로운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블레이드의 곁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리며 기민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블레이드 역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반쯤 돌렸다. 그의 날카로운 적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하은의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쳤다.
"……?"
블레이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하은은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다리의 통제권은 상실한 지 오래였다. 무릎이 꺾이고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에서 하은의 몸이 그대로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었다.
"앗……!"
하은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넘어지는 궤적을 블레이드가 서 있는 방향으로 비틀었다. 살기 위한 본능적인 육탄 돌격이었다.
포악한 늑대 공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평소라면 자신에게 접근하는 그 어떤 생명체라도 마력 장벽으로 날려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나풀거리는 하얀 앞치마와, 붉은 딸기 우유 향기를 풍기며 부서질 것처럼 쓰러지는 인간 여자를 본 순간, 그의 몸은 기이하게도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은의 머리가 블레이드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읍……!"
하은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허리께를 꽉 움켜쥐었다. 흑호 모피의 거친 촉감 너머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한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발견한 모닥불 같기도 했고,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식빵의 속살 같기도 했다. 하은은 살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더욱 깊숙이 움켜쥐며, 제 얼어붙은 뺨을 그의 가슴팍에 꾹 문질렀다.
"이게 무슨……!"
블레이드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그의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주변에 있던 호위 기사들은 검을 절반쯤 뽑아 든 채로 석상처럼 멈춰 섰다. 감히 북부의 지배자이자, 건드리기만 해도 살이 얼어 터진다는 빙결 마력의 소유자인 공작을 대낮에 정면으로 껴안은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간, 당장 놓지 못할까!"
블레이드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하은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손이 하은의 어깨에 닿는 순간, 블레이드는 기이한 감각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손바닥에 닿은 하은의 어깨는 단순한 추위로 식은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만년설 깊은 곳에서 갓 꺼낸 얼음덩어리를 만지는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딱딱했다. 그녀의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온도는 이미 살아 있는 생명체의 것이 아니었다.
'이 온도는 대체 뭐지?'
그가 의아해하는 찰나, 하은의 손길이 닿은 블레이드의 가슴 안쪽에서 이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평소 블레이드는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끓어 넘치는 초고열의 동결 마력 핵 때문에 늘 내면의 갈증과 두통에 시달려 왔다. 겉으로는 얼음 같은 마력을 쓰지만, 본질은 너무 뜨거워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불꽃이었기에 그의 심장은 늘 터질 듯이 요동치곤 했다.
그런데 하은이 제 가슴에 이마를 대고 매달린 순간, 그 뜨겁고 잔인한 마력의 파도가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성난 파도 위에 부드러운 눈가루가 내려앉아 수면을 평평하게 다듬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울려 대던 두통이 싹 사라지고, 머릿속이 더할 나위 없이 맑아졌다.
웅웅웅.
블레이드의 품속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푸른 심장 마력 핵석이, 하은의 얼어붙은 손가락 끝과 공명하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푸른빛이 아주 잠깐, 그의 얇은 셔츠 깃 너머로 아련하게 번졌다가 사라졌다.
[체온 급속 충전 중!] [34.5°C... 35.2°C... 36.0°C...]
하은의 귓가에 경쾌한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꽁꽁 얼어붙어 굳어 가던 손가락 끝마디에 찌르르한 통증과 함께 붉은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혈관이 따뜻한 봄바람을 맞은 시냇물처럼 졸졸졸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지독한 한기가 물러가고, 공작의 품에서 흘러나오는 장작불 같은 온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아아…… 살 것 같다……."
하은은 자신도 모르게 황홀한 한숨을 내쉬며 블레이드의 품에 뺨을 더 깊이 부벼댔다.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해서 이대로 잠들고 싶을 정도였다.
"……."
블레이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분노라기보다는, 난생처음 겪는 해괴한 상황에 뇌의 사고 회로가 정지해 버린 자의 표정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윈터우드 공작이, 고작 제 가슴팍에 매달려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는 인간 여자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파르르 떨렸다.
"지금…… 내게 매달려 아양을 떠는 것인가?"
블레이드가 이빨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나지막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서리가 서려 있었지만, 그를 오랫동안 보필해 온 마샤조차 저토록 당황한 공작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접촉 3초 경과." [체온: 36.5°C (정상 체온 회복 완료)] [온기 동력이 완충되었습니다! 도감의 연성 기능이 정상화됩니다.]
머릿속에서 완충 신호가 울리자마자 하은은 번쩍 눈을 떴다.
손끝에 감각이 완벽하게 돌아왔고, 얼굴에도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다. 살았다. 정말로 살았다.
하은은 슬그머니 블레이드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오동통한 손을 모아 다소곳하게 배 위에 올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작 전하."
하은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흘 동안 루이 도련님을 돌보려면 제 몸이 성해야 할 텐데, 북부의 바닥이 생각보다 너무나 차갑고 미끄럽더군요. 그만 중심을 잃고 전하의 고귀한 가슴팍을 버팀목 삼아 버렸습니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나를 안았다고?"
블레이드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전하께서 마침 그곳에 든든한 바위처럼 서 계셔 주신 덕분에, 제 연약한 머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은은 뻔뻔하리만큼 차분하고 다정하게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주변의 기사들은 턱이 빠질 듯한 표정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공작에게 육탄 돌격을 감행해 놓고 저토록 당당하게 넉살을 부리는 인간은 제국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공작의 살기에 짓눌려 오줌을 지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블레이드는 붉어진 귀 끝을 숨기기 위해 검은 모피 망토를 거칠게 여미며 하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나약한 인간 주제에 혓바닥만 살았군.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을 댔다간, 그 손가락을 전부 얼려 부숴버리겠다."
말은 험악하게 했지만, 블레이드는 자신을 밀어내던 하은의 손끝이 닿았던 가슴께를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에 기이한 온기가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매번 자신을 괴롭히던 불꽃 마력의 폭주가, 그녀의 손길 한 번에 이토록 차분하게 가라앉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그럼 저는 루이 도련님의 오후 간식을 준비하러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은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육동을 향해 돌아섰다. 온기가 채워지니 온 세상이 다시 몽글몽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보육동 입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은을 맞이했다.
"하은 님, 정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공작 전하께서 진노하시어 당장 목을 베라 하실 줄 알았습니다."
"에이, 마샤도 참. 전하께서는 보기보다 따뜻하신 분인걸요."
하은이 장난스럽게 찡긋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블레이드는 제자리에 굳건히 선 채, 멀어지는 하은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하은의 발걸음이 닿았던 대리석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가 미끄러졌다고 주장하던 그 자리에는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꽉 움켜쥐었던 검은 모피 망토 깃자락에 시선이 닿는 순간, 블레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검은 털실 끝마다, 얇고 정교한 하얀 서리꽃이 피어나 있었다.
단순히 추위에 노출되어 생긴 서리가 아니었다. 마치 아주 강력한 빙결 마법사가 마력을 불어넣어 정교하게 빚어낸 듯한, 완벽한 결정체의 서리꽃이었다.
'인간의 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그것도 자신의 끓어오르는 불꽃 마력을 완벽하게 상쇄하고 진정시킬 정도의 지독하고 순수한 냉기였다.
블레이드는 제 가슴께를 가만히 짚어보았다. 방금 전 그녀가 안겼을 때 느꼈던, 머릿속이 맑아지던 생경한 감각이 여전히 심장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 여자는 단순한 인간 보모가 아니다.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의심의 실타래가 엉키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보육동 안쪽, 루이가 잠들어 있는 방 너머의 깊은 복도 끝에서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아기 늑대의 울음소리가 성채를 흔들며 울려 퍼졌다. 루이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더 광포하고, 통제되지 않은 마력이 폭발하는 불길한 파동이었다.
하은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