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어어어엉!
지하 감옥을 지탱하던 쇠창살이 비틀리며 찢겨 나갔다. 사방으로 튀는 불꽃 사이로,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는 가느다란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은빛 검날이 향한 곳은 정확히 하은의 목덜미였다. 겨우 한 푼의 거리도 남지 않은 곳에서 검이 멈춰 섰다. 서슬 퍼런 검기만으로도 하은의 여린 살결에 핏방울이 맺힐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감히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속삭인 거지, 인간."
블레이드 윈터우드 공작의 눈동자가 평소의 얼음 같은 청색이 아닌, 불길한 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마력이 지하 감옥 전체를 짓누르며 횃불의 불씨마저 하얗게 얼려 버릴 듯 휘몰아쳤다. 바닥의 돌타일이 쩍쩍 갈라지며 서리가 돋아났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맹수의 무자비한 위압감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심장이 마비되어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터였다. 목덜미에 닿은 차가운 쇠붙이의 감각이 털끝을 쭈뼛 서게 만들었지만, 하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턱을 치켜올렸다. 도망치거나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녀의 눈은 오롯이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푸른 책장, '힐링 레시피 도감'의 수치들을 훑고 있었다.
[대상: 루이 윈터우드 (아기 늑대 수인)] - 마력 폭주 안정도: 12% -> 45% (일시적 안정) - 신체 마력 순환율: 18% (극심한 불균형) - 영양 상태: 마력 소모 대비 단백질 및 필수 영양소 결핍 74% - 스트레스 수치: 88% (과도한 격리로 인한 정서적 피로)
하은은 목에 겨누어진 검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이 아이를 죽이고 있었던 건 제가 아니라, 공작 전하와 이 성의 방조입니다."
"뭐라?"
블레이드의 짙은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마샤를 비롯한 호위병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인간 계집이 공작의 면전에서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전하, 당장 저 불경한 인간의 목을 벨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마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으나, 하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품에 곤히 잠든 아기 늑대, 루이의 엉망이 된 털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루이 도련님의 마력 폭주가 왜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시겠습니까? 이 아이는 지금 굶주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폭주하는 동결 마력을 감당할 육체적 영양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북부에서 가장 귀한 설원 산양의 젖과 정제된 고기만을 급여했다. 사나운 야수에게 필요한 영양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블레이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은은 실소에 가까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대담한 태도에 오히려 블레이드의 검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늑대 수인의 아기들은 인간보다 세 배 이상 빠른 속도로 마력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 폭발적인 마력을 지탱해 줄 뼈와 근육의 발달 상태는 어떻습니까? 도감…… 아니, 제 눈에는 똑똑히 보입니다. 루이 도련님은 현재 극심한 영양 불균형 상태입니다. 설원 산양의 젖은 마력을 자극하기만 할 뿐, 그것을 체내에 안착시킬 정제된 '완충 영양소'가 전혀 없습니다. 쉽게 말해, 불을 피우는데 땔감은 주지 않고 기름만 들이붓고 계셨던 겁니다."
하은은 도감의 수치화된 장부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굴리며 말을 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루이 도련님이 섭취한 마력 대비 영양 흡수율은 고작 12%에 불과합니다. 몸 안에서 마력이 겉돌며 살을 깎아 먹고 있으니, 아이가 아프고 사나워질 수밖에요. 격리 구역에서 쇠사슬에 묶어두는 것 또한 정서적 스트레스를 극대화해 마력 폭주를 촉진하는 자살 행위입니다. 수치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문에서 고수해 온 그 야만적인 방식을 유지하신다면, 이 아이는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자멸할 것입니다."
지하 감옥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수치와 논리를 정밀하게 들이대는 하은의 기세는 단순한 살려달라는 애원이나 사기꾼의 감언이설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의학적 장부를 읊는 듯한 확신에 찬 어조였다. 블레이드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으나, 차마 베지 못했다. 그의 붉은 안광 너머로 격렬한 내적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하찮은 말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블레이드가 쪼개지는 얼음처럼 서늘하게 비웃었다.
"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제국 최고의 치유사들과 신관들을 불렀으나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굴러들어 온 인간 계집 하나가 마력의 순환을 논하며 가문의 방식을 지적해?"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며 하은을 압박했다. 얼음의 지배자다운 한기가 하은의 뺨을 스쳤다.
그 순간, 하은의 눈앞에 있는 도감 시스템이 요동쳤다. 사르르 펼쳐지는 도감의 보조 정보창이 블레이드의 신체를 스캔하듯 붉은빛으로 깜빡였다.
[돌발 분석: 대상 '블레이드 윈터우드'의 마력 상태] - 표면 속성: 극(極)동결 마력 (99%) - 내재 속성: 잠재적 초고열(超高熱) 불속성 마력 핵 (100% 충전 상태) - 상세: 신체의 동결 마력 장벽이 내면의 거대한 화산 같은 열기를 억누르고 있음. 시전자의 저체온증을 즉각적으로 치유하고 마력원을 충전할 수 있는 이 세계 유일의 '절대 난로'.
하은은 숨을 들이켰다.
'겉은 이렇게 얼음장처럼 차가운데, 속에는 온 영토를 태워버릴 만한 화산이 들어차 있다고?'
그의 차가운 눈빛 너머에 숨겨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의 실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하은의 손끝이 체온 저하로 인해 조금씩 아려오고 있었기에, 눈앞에 있는 이 거대한 '난로'의 존재는 본능적인 갈망을 자극했다.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아기 늑대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남자의 온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전하, 믿지 못하겠다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하은이 블레이드의 칼날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쇠붙이의 서늘함이 손끝에 닿자마자 미세하게 체온이 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게 사흘의 시간과 주방, 그리고 창고를 정비할 권한을 주십시오. 루이 도련님의 마력 폭주율을 수치상으로 안전지대까지 떨어뜨려 놓겠습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는 제 목을 베어 성벽에 걸어두셔도 좋습니다."
블레이드는 대답 대신 하은을 빤히 응시했다. 인간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흔들림 없는 강단과 기묘한 확신이 그의 오만한 이성을 두드렸다.
그때, 하은의 품에 안겨 있던 루이가 작게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으응…… 따뜻해…… 가지 마아……."
루이는 하은의 옷자락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꽉 움켜쥔 채, 그녀의 가슴팍에 볼을 부볐다. 아기 늑대의 귀가 쫑긋거리며 하은의 체온을 탐닉하듯 편안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문에서 가장 사납고 통제 불가능하다던 후계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기적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마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샤는 블레이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루이 도련님이 이토록 진정하신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비록 하찮은 인간의 달콤한 속임수일지라도, 도련님의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블레이드는 천천히 검을 거두어 검집에 밀어 넣었다. 챙강 하는 맑은 쇳소리가 감옥의 정적을 깨뜨렸다.
"사흘이다."
블레이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한겨울의 서리 같았다.
"사흘 안에 내 아들의 발작을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다면, 네 년은 물론이고 네가 말한 그 알량한 장부조차 불태워 버릴 것이다. 마샤, 이 여자를 감옥에서 꺼내어 보육 권한을 임시로 부여해라. 단,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을 잊지 말고."
"명령을 받듭니다, 전하."
하은은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감옥에서 풀려난 하은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채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식자재 창고였다. 마샤가 살벌한 눈빛으로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지만, 하은은 개의치 않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곰팡이 냄새와 뼈를 시리게 하는 냉기였다.
"이게…… 북부 최고의 공작가 창고라고요?"
하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창고 안은 온통 차갑게 얼어붙은 고기 덩어리들과 딱딱하게 굳은 정체불명의 곡물 자루들뿐이었다. 아기 수인들을 위한 부드러운 채소나 달콤한 과일, 온기를 더해줄 향신료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 삭막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아기 늑대들이 자랐으니, 마력 열병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북부는 일 년 내내 겨울입니다. 신선한 채소나 과일은 남부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들여와야 하는 사치품이지요. 전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강인한 체력을 유지해 줄 고기뿐입니다."
마샤가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대꾸했다.
하은은 대꾸하는 대신 도감의 '재고 관리 장부' 기능을 활성화했다. 푸른 빛이 창고 안의 식자재들을 빠르게 스캔해 나갔다.
[창고 분석 완료] - 동결된 산양육: 120개 (마력 자극도 높음, 소화율 낮음) - 호밀 가루: 80자루 (정제되지 않음, 위장 장애 유발 가능) - 동결 건조된 붉은 열매: 15박스 (산미 강함, 비타민 결핍 보완용) - 특이 사항: 구석진 선반 하단에서 미상의 마법적 고대 성분 감지.
'미상의 마법적 고대 성분?'
하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마샤의 시선을 피해 창고 깊숙한 곳,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선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낡고 깨진 잡동사니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단지 하나가 있었다.
흙으로 구워진 평범한 단지였지만, 뚜껑 틈새로 미세하게 은빛이 감도는 붉은 양념 같은 것이 흘러나와 굳어 있었다. 손을 가까이 대자, 도감의 알림창이 머릿속에 울렸다.
[아이템 획득: 붉은 소금 단지] - 상세: 극소량의 고대 마력 중화 성분이 함유된 천연 암염 조미료. 마력의 급격한 폭주를 일시적으로 억제하는 효능이 있으나, 현재는 단순한 붉은 양념으로 방치되어 있음. - 용도: 추후 특정 레시피의 핵심 비법 재료로 활용 가능.
하은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나치게 눈에 띄면 마샤가 압수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단지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머, 이건 그냥 오래된 양념 단지인가 보네요. 고기 잡내를 잡을 때 쓸 수 있겠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보관하며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마샤는 단지를 힐끗 보더니 코방귀를 꼈다.
"가치 없는 잡동사니로군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조미료 따위로 도련님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두고 보시면 알겠지요."
하은은 싱긋 웃으며 붉은 양념 단지를 제 앞치마 깊숙한 주머니와 연결된 개인 시스템 보관함에 쏙 집어넣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유용하게 쓰일 비장의 무기가 될 터였다.
***
창고 정리를 대강 마친 하은이 임시로 배정받은 보육동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이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였다.
"싫어!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루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가구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었다. 시종들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가운데, 아이의 온몸에서 서늘한 냉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거실의 소파와 커튼이 이미 하얗게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루이 도련님! 제발 진정하십시오! 약을 드셔야 합니다!"
시종이 억지로 붉은 물약이 든 병을 들이밀려 하자, 루이는 으르렁거리며 컵을 쳐날려 버렸다. 챙그랑! 유리 파편이 바닥에 사방으로 튀었다.
"전부 다 싫어! 차갑고 맛없어! 아프단 말이야!"
아이의 마력이 다시 폭주하려는 찰나, 방 안으로 들어선 하은이 단호하게 외쳤다.
"모두 물러서세요!"
하은의 목소리에 방 안의 시종들이 멈칫했다. 루이 역시 익숙하고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은의 손에는 방금 주방에서 연성해 온 따뜻한 단호박 수프와 부드러운 우유 푸딩이 들려 있었다.
"루이 도련님."
하은이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루이는 경계하듯 꼬리를 바짝 세우고 으르렁거렸지만, 하은의 손끝에서 풍기는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온기와 달콤한 향기에 코를 씰룩였다.
"이리 오세요. 아픈 거 싹 낫게 해줄게요."
하은이 부드럽게 양팔을 벌렸다.
루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홱 달려와 하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작은 앞발로 하은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버둥거렸다.
"웅…… 안 갈래. 이 이간(인간) 냄새 좋아. 맛있는 냄새 나……."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보육동 입구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블레이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역시 루이의 폭주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참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제 아비인 자신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아들의 온순한 응석이었다.
블레이드는 느리게 걸어 나와 하은의 앞에 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하은과 루이를 덮었다.
"인간."
블레이드가 낮게 읊조렸다.
"내 아들이 너를 이토록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흘 동안 똑똑히 증명해 보여라. 만약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한다면……."
그는 말을 아꼈지만, 그의 눈빛에 담긴 살기는 경고로 충분했다.
"사흘간의 유예를 주마. 그동안 이 아이의 정식 보모로서 보육동의 전권을 위임한다."
[퀘스트 완료!] [임시 보모 권한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육동의 일부 시설 제어 권한이 개방됩니다.]
하은은 루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블레이드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공작 전하."
블레이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려 보육동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하은은 마침내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살았다…….'
최악의 위기는 넘겼고, 정식으로 아이를 돌볼 권한까지 얻어냈다. 이제 도감의 레시피를 활용해 루이를 완벽하게 치료하고, 자신만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면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스르륵.
하은의 시야 밑바닥에서부터 불길한 붉은색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화면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며 날카로운 경고음이 귓가를 때렸다.
[시전자 생명 위험 경고!] [연속적인 마력 연성 및 냉기 노출로 인해 체온이 급격히 하강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전자의 체온: 34.5°C (저체온증 2단계 진입)] [경고: 1시간 이내에 마력원(블레이드 윈터우드)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 온기를 충전하지 않을 경우, 신체 활동이 영구 정지(사망)됩니다!]
"……어?"
하은은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손톱 밑이 퍼렇게 죽어가고 있었고, 손가락 끝마디부터 감각이 마비되며 딱딱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뼛속을 파고드는 지독한 한기가 심장을 향해 기어올라 오고 있었다.
방금 나간 공작의 차갑고도 뜨거운 온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멀어져 가고 있었고, 하은의 몸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