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입김이 하얗게 부스러지며 얼음 바닥에 흩어졌다.

손가락 끝이 시리다 못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려 왔다. 영하 20도. 살을 베어 물 듯한 칼바람이 몰아치는 이곳은 북부의 지배자, 윈터우드 공작가의 지하 감옥이었다.

조금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애견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이 시린 석조 감옥에 갇혀 있었다. 온몸을 감싼 얇은 리넨 원피스는 혹한을 막아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웅크린 무릎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때, 철창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고요한 어둠을 갈랐.

"아아아악! 싫어, 싫어어!"

짐승의 울음소리가 섞인, 앳된 아이의 울부짖음이었다.

하은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벽 모퉁이 너머, 또 다른 쇠창살 안쪽에서 은빛 털 뭉치 하나가 미친 듯이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있었다. 사방으로 튀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니었다. 아이의 조그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퍼런 서리 마력이었다.

"흐읍, 흑……!"

아기 늑대 수인이었다. 은빛 털 위로 시퍼런 얼음 결정이 돋아나며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이가 바닥을 긁을 때마다 발톱이 깨져 나갔고, 그 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감옥벽을 얼려 붙였다.

저건 그냥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고통에 겨워 스스로를 파괴하는 몸부림이었다.

하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릿속에서 매캐한 연기와 붉은 불길, 그리고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겹쳐 흘렀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또 눈앞에서 잃을 수는 없어.’

하은은 창살을 붙잡고 외쳤다.

"얘야! 멈춰! 제발 멈추렴!"

하지만 아기 늑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력이 폭주해 심장이 얼어붙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절박한 순간, 하은의 시야 전면에 맑고 투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딩롱-*

눈앞에 몽글몽글한 파스텔톤의 빛무리가 피어나더니, 도톰한 가죽 표지의 책 한 권이 허공에 출현했다. 동화책처럼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오직 하은의 눈에만 보이는 신비로운 장부였다.

[‘힐링 레시피 도감’이 각성합니다.]

[감옥 내 생명체의 극심한 고통을 감지했습니다. 정밀 분석을 시작합니다.]

눈앞의 책장이 스르륵 넘어가며, 아기 늑대의 머리 위에 아기자기한 손글씨체로 쓰인 수치들이 둥실 떠올랐다.

[대상: 루이 윈터우드 (아기 늑대 수인)] - 마력 폭주율: 98% (임계치 돌입! 10분 뒤 자폭 위험) - 정신적 스트레스: 95% (극도의 공포 및 고립감) - 신체 온도: 영하 5.2℃ (동결 진행 중) - 처방 필요성: ★★★★★ (안정제 투여 시급)

[맞춤형 레시피를 제안합니다!] ▶ '온기 가득 통밀 쿠키' (진정 성공률 100%) - 필요 재료: 거친 잡곡 가루 100g, 염소 우유 한 모금, 마음 한 스푼. - 연성 대가: 시전자 체온 -1.0℃. (현재 체온: 36.5℃ -> 연성 시 35.5℃로 하강)

※ 경고: 체온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시전자는 동사할 위험이 있습니다. 온기를 충전하려면 '극양(極陽)의 마력원'과의 물리적 접촉이 필요합니다.

"체온을 대가로 준다고?"

하은은 자신의 파랗게 질린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저체온증이 올 것만 같은 추위 속에서 체온을 더 잃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저 너머에서 끅끅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아기 늑대의 작은 발이 보였다. 얼음 가시가 돋아나 살을 찌르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는 아주 작은 온기라도 붙잡고 싶은 듯 제 꼬리를 꼬꼭 깨물고 있었다.

망설일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구해야 해."

하은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옥 한구석, 죄수용 배급 식량으로 던져졌던 거친 통밀가루 보울이 보였다. 옆에는 마시다 남은 시큼한 염소 우유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있었다. 창고 깊숙한 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붉은 양념 단지 따위가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지금 쓸 수 있는 건 이 세 가지뿐이었다.

하은은 통밀가루가 담긴 나뭇그릇에 염소 우유를 부었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가루를 뭉치기 시작했다.

반죽을 치대는 손길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차가운 밀가루가 우유를 머금고 동글동글하게 뭉쳐지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하은은 눈을 감고, 과거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구웠던 고소하고 따뜻한 간식의 냄새를 떠올렸다.

‘부디 이 아이에게 닿기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반죽을 빚는 순간, 도감에서 따스한 주황색 빛송이가 번져 나와 반죽 속으로 쏙 스며들었다.

[연성을 시작합니다. 대가인 체온 -1.0℃가 차감됩니다.]

"읏……!"

심장 부근에서 무언가 훅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가슴을 관통했다. 온몸의 털끝이 쭈뼛 서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어 들어갔다. 입술의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하얗게 질렸다. 너무 추워서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기적이 일어났다.

거칠고 딱딱했던 밀가루 반죽이 순식간에 노릇노릇하고 바삭하게 구워진 황금빛 쿠키로 변해 있었다. 오븐도 없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갓 구워낸 듯 촉촉하고 따스한 온기를 품은 통밀 쿠키 세 조각이 완성된 것이다. 은은하게 퍼지는 고소한 버터 향과 달콤한 곡물의 냄새가 삭막한 감옥 안을 순식간에 동화 속 빵집처럼 채워 나갔다.

하은은 떨리는 몸을 이끌고 쇠창살 틈새로 손을 뻗었다.

"얘야, 이것 좀 볼래? 아주 맛있는 과자야."

"으르르……!"

루이가 붉은 눈을 치켜뜨며 이빨을 드러냈다. 가시 돋친 서리 마력이 하은의 손등을 스치며 차가 상처를 냈다. 찌릿한 통증이 일었지만 하은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콤하고, 아주 따뜻해. 먹으면 아픈 게 전부 날아갈 거야."

바삭하게 구워진 쿠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소한 향기가 아기 늑대의 코끝을 스쳤다. 루이의 젖은 코가 씰룩였다. 본능적인 굶주림과, 마력 폭주를 진정시키는 압도적인 온기가 아이의 이성을 무너뜨렸다.

덥석!

루이가 하은의 손가락째로 쿠키를 물어뜯다시피 낚아채 갔다.

하은은 손가락이 씹히는 고통을 참으며 가만히 루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거칠고 날카롭던 은빛 털이 손끝에 닿았다.

와작, 바삭.

작은 입으로 쿠키를 씹어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감옥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루이의 몸을 뒤덮고 있던 시퍼런 얼음 가시들이 눈 녹듯 스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 위로 떠오른 상태창의 숫자들이 요동쳤다.

[마력 폭주율: 98% -> 60% -> 25% -> 3%] [정신적 스트레스: 95% -> 8%] [신체 온도: 36.6℃ (정상 범위 회복)]

"앗…… 따뜻해……."

루이의 목구멍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 대신, 몽글몽글한 아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 시뻘겋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원래의 맑고 푸른 보석 같은 빛깔로 돌아왔다. 폭주하던 마력이 순식간에 진정되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 듯 루이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쇠창살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 하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비벼댔다. 갓 구운 식빵처럼 부드럽고 말랑해진 은빛 털 뭉치가 하은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시러, 혼자 두지 마아……."

웅얼거리는 아기 늑대의 호흡은 이제 더없이 평온했다. 가문에서 '괴물'이라 부르며 낙오자로 낙인찍어 감옥에 가둔 아기 수인이, 고작 인간이 만든 쿠키 한 조각에 온순한 양처럼 길들여진 순간이었다.

하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이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극한의 오한에 하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체온 1도를 잃은 대가는 참혹했다. 손끝이 감각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육중한 감옥의 철문이 고압의 마력에 밀려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자욱한 먼지와 퍼런 빙결 안개 사이로, 묵직한 군화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살기가 공간을 압도했다.

"루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내려앉았다.

안개 너머에서 걸어 나온 사내는 거대한 풍채의 지배자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은발과, 얼음 장벽처럼 차갑고 무자비한 청안을 지닌 남자. 윈터우드 공작, 블레이드였다.

그의 한 손에는 서슬 퍼런 마력이 서린 거검이 들려 있었다. 검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파란 마력 광이 하은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블레이드는 텅 빈 철창과, 그 옆에서 인간 여자의 품에 안겨 잠든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불꽃이 일었다.

"인간 따위가 내 아들에게 무슨 주술을 부린 거지?"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시퍼런 검날이 하은의 가녀린 목덜미에 닿기 직전, 공기마저 얼어붙는 잔혹한 살기가 그녀의 전신을 짓눌렀다.

가느다란 목덜미 바로 앞에서 검날이 뿜어내는 서릿발이 살갗을 아릿하게 베어 물었다.

조금만 숨을 크게 쉬어도 목뼈를 관통할 듯한 서슬 퍼런 침묵이 감옥 안을 무겁게 짓눌렀. 블레이드의 청안은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거대한 빙벽 같았다. 그 안에는 오직 침입자를 향한 가차 없는 처단과,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야수 같은 경계심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인간."

그가 나직이 읊조릴 때마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어 하얀 결정으로 바스라졌다.

"대답해라. 가문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네년이 어떻게 루이의 마력을 가라앉힌 거지? 무슨 간악한 주술을 부린 거냐."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지만, 동시에 대지를 얼려 버릴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명백한 살의였다.

하지만 하은은 그의 위압감보다 더 무서운 한기와 싸우고 있었다.

딱, 딱, 딱.

의지와 상관없이 턱뼈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시야가 온통 하얗게 번지며 주변의 사물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손끝은 이미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제 살을 꼬집어도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위험! 시전자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습니다.] [현재 체온: 33.8℃ (중증 저체온증 진행 중)] [마력원 고갈로 인한 생체 기능 정지까지 남은 시간: 5분]

머릿속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사정없이 깜빡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작의 검에 베이기 전에 심장이 멈춰 얼어 죽을 판이었다.

하은은 떨리는 시선을 들어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서리 마력은 분명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하은의 눈앞에 떠오른 '힐링 레시피 도감'은 전혀 다른 정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석 완료: 대상 ‘블레이드 윈터우드’] - 마력 속성: 극양(極陽)의 불꽃 (외면은 동결 마력으로 위장됨) - 온기 충전 가능 수치: 최대 100% - 접촉 시 예상 체온 회복률: 초당 +1.5℃

‘저 남자가…… 태양보다 뜨거운 마력을 품고 있다고?’

눈으로 보는 차가운 얼음과, 도감이 알려주는 뜨거운 진실 사이의 괴리가 하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살기 위해선 그를 만져야 했다. 하지만 저 서슬 퍼런 검날을 앞에 두고 어떻게 몸을 부딪친단 말인가.

그때, 하은의 품에 안겨 있던 은빛 털 뭉치가 조금 전의 거친 숨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작고 고운 숨을 내쉬며 웅얼거렸다.

"웅…… 냐아……."

루이는 하은의 허벅지에 제 작은 머리를 꼭 묻은 채, 달콤한 꿈을 꾸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이의 이마에서 피어나던 살벌한 서리 가시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확인한 블레이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매번 마력 열병이 찾아올 때마다 제 몸을 찢고 울부짖던 아들이었다. 가문의 그 어떤 마법사도, 그 어떤 신성한 치유사도 진정시키지 못해 결국 이곳 지하 감옥에 격리할 수밖에 없었던 폭주였다. 그런데 지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하고 평온한 얼굴로 인간 여자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공작의 검끝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아이가 잠든 건가?"

블레이드의 목소리에 서려 있던 살기가 한풀 꺾였다. 불신과 의혹이 가득했지만, 아들의 안위를 확인한 아비의 본능적인 안도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은은 흐려져 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혀끝을 스치며 아주 잠깐 이성이 돌아왔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끝이었다.

"이 아이는…… 가둬 두어야 하는 괴물이 아니에요."

하은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한 자 한 자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에서 차가운 얼음 조각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저…… 너무 춥고, 무섭고, 배가 고파서…… 아팠던 것뿐이에요."

"뭐라?"

"따뜻한 걸 먹고…… 마음이 편해지면, 이렇게…… 착한 아기인걸요……."

말을 마친 하은의 몸이 스르륵 앞으로 기울었다. 한계였다. 체온이 한계점 이하로 떨어지며 뇌가 작동을 멈추려 하고 있었다.

툭.

하은의 상체가 무너지며, 검끝을 피해 블레이드의 단단한 흉판 쪽으로 엎어졌다.

"비켜라, 무슨 짓을……!"

블레이드가 황급히 그녀를 밀어내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하은의 가냘프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블레이드의 가죽 장갑이 벗겨진 맨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화아아악-!

찰나의 접촉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살결이 닿는 순간, 감옥 안의 공기가 기이하게 요동쳤다.

블레이드는 제 손목을 타고 들어오는 이질적인 감각에 숨을 들이켰다. 얼음 장벽처럼 단단히 닫혀 있던 그의 마력 회로가, 인간 여자의 손끝이 닿자마자 마치 봄날의 강물처럼 출렁이며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뜨겁게 끓어오르던 그의 내면 마력이, 그녀의 차가운 몸속으로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물리적 접촉 감지! '극양의 마력원'으로부터 온기 충전을 시작합니다.] [체온 급상승: 33.8℃ -> 34.5℃ -> 35.2℃……]

"으, 읍……!"

하은의 입에서 뜨거운 더운 숨이 새어 나왔다. 얼어붙었던 혈관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짜릿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 따스한 열기가 돌았다. 마치 한겨울 노천탕에 온몸을 담근 것처럼, 뼛속까지 스며들던 추위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극상의 희열이었다.

반면, 블레이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에 온몸의 근육을 굳혔다.

자신의 마력을 빼앗기는데도 불쾌하기는커녕, 늘 자신을 괴롭히던 내면의 과도한 열기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평생을 '얼어붙은 괴물'로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이 여자의 손길은 마치 구원과도 같은 온도를 품고 있었다.

그가 멍하니 하은의 파리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사이, 철창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작 전하! 루이 도련님은 무사하십니까?!"

감옥을 지키던 호위병들과 가문의 전통을 수호하는 엄격한 수석 메이드, 마샤가 횃불을 들고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한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스스로를 파괴하며 폭주하던 아기 늑대 루이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얼굴로 인간 여자의 품에 안겨 있었고, 얼음보다 차가운 고고한 지배자 블레이드는 그 하찮은 인간 여자의 손에 손목을 붙잡힌 채 굳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마샤의 손에 들려 있던 횃불이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경악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은의 품에 안겨 있던 루이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아이는 제 아비를 바라보는 대신,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하은의 옷자락을 꼭 쥐며 웅얼거렸다.

"가지 마아…… 냄새 좋아……."

아기 늑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맹수의 으르렁거림이 아닌, 주인을 따르는 온순한 가축의 어리광이었다.

공작가의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기적 같은 변화에 지하 감옥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블레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여전히 제 손목을 꽉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청안에 깊은 이채가 서렸다. 이 나약하고 부서질 것 같은 인간 여자가, 대체 공작가에 무슨 바람을 몰고 온 것인가.

그때, 하은의 눈앞에 있는 '힐링 레시피 도감'이 푸른빛을 발하며 새로운 페이지를 강제로 펼쳤다.

[돌발 퀘스트 발생!] [공작 블레이드의 마력 핵석이 시전자의 잔여 온기와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경고: 일시적인 체온 충전은 완료되었으나, 근본적인 마력 통로가 개방되며 공작의 마력이 폭주할 위험이 감지되었습니다!]

하은의 손바닥 아래로, 블레이드의 손목맥박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의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순간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가며,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파괴적인 마력이 성채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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