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가마솥 아래로 붉은빛 불꽃이 사납게 튀어 올랐다. 이성을 잃고 으르렁거리는 아기 늑대 루이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뺨을 스치는 공기는 살을 에는 듯 차가웠으나, 하은의 손끝은 이미 감각을 잃고 새하얀 성에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경고: 현재 체온 34.2℃. 저체온증 2단계 진입.]

눈앞이 가늘게 떨리며 흐려졌다. 하지만 하은은 주저하지 않았다. 보육원 화재 속에서 아이들의 손을 놓쳐야 했던 과거의 붉은 불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두 번 다시는 소중한 아이들을 잃지 않겠다던 다짐이 차갑게 식어가는 심장을 쿵쾅쿵쾅 두드렸다.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가판대 위에 놓인 붉은 양념 단지를 움켜쥐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고추장 단지 같았으나, 그 안에는 고대 마력 중화 가루가 숨겨져 있었다. 뚜껑을 열자 알싸하면서도 고소한 흙내음이 은은하게 번졌다. 그녀는 붉은 가루를 가마솥 안으로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치이익—!

가루가 차가운 물에 닿자마자, 검붉게 끓어오르던 마력의 독기가 몽글몽글한 분홍빛 거품으로 변하며 향긋한 딸기 향을 풍기기 시작했다. 하은은 얼어붙어 굳어가는 손가락으로 주걱을 저었다. 달콤하고 따스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가슴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시스템이 연성에 필요한 마력을 그녀의 체온에서 강제로 고갈시키기 시작했다.

[경고: 체온이 위험 수치인 31.5℃까지 급감합니다! 심장 마비 기능이 가동될 수 있습니다.]

턱끝이 덜덜 떨렸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가파르게 흩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품 안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던 푸른 빛의 보석, 공작의 심장 마력 핵석이 갑자기 고동치기 시작했다.

둥, 둥.

격벽 너머에서 블레이드가 주먹으로 강철 문을 내리치는 진동과 정확히 일치하는 울림이었다. 하은의 가슴팍에 닿은 핵석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을 발산했다. 그 푸른 빛은 차가운 얼음 장벽을 뚫고 들어오는 가을날의 햇볕처럼, 하은의 얼어붙은 혈관 속으로 뜨겁고 다정한 온기를 흘려보냈다.

지독한 한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멈춰 서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공작의 뜨거운 불속성 마력이 핵석을 매개로 하은의 손길과 공명한 것이었다.

[시스템 알림: '심장 마력 핵석'과의 기적적인 공명으로 체온이 36.5℃로 완전히 복구되었습니다!]

따스한 활력이 온몸에 가득 차오르자 하은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가마솥 안에서 투명하고 말랑말랑한 '정화의 라즈베리 젤리'가 완성되어 오색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은은 완성된 젤리를 한 움큼 집어 루이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으르렁거리던 루이가 달콤한 딸기 향에 킁킁거리더니, 이내 젤리를 핥아 삼켰다. 붉게 물들었던 루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맑은 바다색으로 돌아왔다. 루이는 하은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낑낑거렸다.

쿵—!

그 순간, 블레이드가 마력으로 격벽을 통째로 뜯어내며 방 안으로 본체를 드러냈다. 그의 거친 호흡이 보육실 안의 달콤한 공기와 섞였다. 블레이드가 하은의 어깨를 짚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하은! 무사한 건가!”

“전 괜찮아요, 독공작님. 하지만…….”

하은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성채 상공에 기괴할 정도로 붉고 푸른 마력 무지개가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 무지개 밑으로, 성채 곳곳에 격리되어 있던 수십 마리의 아기 늑대들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폭주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붉은 마력의 잔상이 성채 전체를 집어삼킬 듯 일렁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성채 중앙 광장으로 통하는 회랑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울부짖는 어린 수인들의 비명과 그들을 제지하려는 경비병들의 고함이 엉켰다. 그리고 그 혼란의 한가운데, 털 가죽을 걸친 완고한 원로회의 늙은 늑대 세력이 지팡이를 짚은 채 들이닥쳤다.

“공작!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 발칸이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리쳤다. 그의 은빛 털이 분노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인간 계집을 보모로 들였을 때부터 알아봤네! 저 계집이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여 아이들의 마력을 오염시킨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온 성채의 아이들이 동시에 이렇게 미쳐 날뛸 수 있단 말인가!”

원로들의 뒤편에서, 백색 사제복을 입은 가웨인이 가식적이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성수가 들려 있었다.

“가여운 수인의 아이들이 이단 마법에 오염되어 신음하고 있군요. 공작 전하, 이 인간 여성은 신성 제국을 위협하는 이단이며, 아이들을 제물로 삼아 가문을 찬탈하려는 간첩입니다. 당장 저 여성을 구금하고 성스러운 불꽃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가웨인의 뱀 같은 목소리가 원로들의 공포와 분노를 자극했다. 원로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하은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이 억센 기운을 뿜어냈다.

블레이드가 가차 없이 검을 뽑아 들며 하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동결 마력이 원로들의 기세를 짓눌렀다.

“감히 내 성에서 내 사람에게 손을 대려 하는가. 원로회라 할지라도 선을 넘는다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공작! 자네마저 저 마녀에게 홀린 것인가!”

원로들의 고함이 이어지는 가운데, 하은은 블레이드의 등 뒤에서 차분하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품에는 여전히 몽글몽글하게 빛나는 '힐링 레시피 도감' 장부가 안겨 있었다. 하은의 맑은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원로님들, 그리고 가웨인 사제님. 제가 아이들을 오염시켰다고 하셨습니까?”

하은은 가웨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웨인은 여전히 자비로운 사제의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매여. 당신이 만든 가짜 치료제 때문에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 죄를 자백하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참으로 눈물겨운 연기군요.”

하은이 피식 가벼운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품에 안긴 도감의 표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면 이 서류들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지 보지요.”

하은이 도감의 연성 장부 탭을 활성화하자, 도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의 빛이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을 만들어냈다. 그 스크린 위로, 가웨인이 그동안 은밀히 포섭했던 공작가 전령의 거래 내역과 함께, 전령의 백금 깃털 사이에 숨겨져 있던 비밀 편지의 내용이 선명하게 투사되었다.

그것은 가웨인의 개인 백금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밀서였다.

[—공작가의 마력로에 제국산 마력 폭주 유도제를 투입하라. 아이들이 폭주하면 이단 보모의 소행으로 몰아 영지를 혼란에 빠뜨린 뒤, 마력 광산의 점유권을 접수하겠다. — 가웨인 셀레스티아]

광장에 정적이 흘렀다. 원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가웨인의 자비롭던 미소가 순식간에 쩍쩍 갈라졌다.

“이, 이것은 조작이다! 감히 이단 마법으로 내 인장을 위조하다니!”

가웨인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하은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도감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스크린에는 가웨인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공작가 내부 시종들의 명단과 그들이 마력로 주변을 서성거리며 약물을 투입하던 날짜, 시간, 그리고 가웨인으로부터 받은 금화의 일련번호까지 수치화되어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에 적힌 금화들은 모두 신성 제국의 국고에서 발행된 특수 금화들입니다. 공작가의 창고에는 존재할 수 없는 물건들이죠. 마샤 님, 지금 당장 저기 서 있는 시종들의 품을 수색해 주시겠습니까?”

하은의 지시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마샤가 매서운 눈빛으로 경비병들에게 손짓했다.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가웨인의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을 덮쳐 그들의 품을 뒤졌다. 시종들의 품 안에서 제국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묵직한 주머니와 붉은 약병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이, 이건……!”

발칸 원로가 쏟아진 물건들을 보며 부르르 떨었다. 물증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가웨인의 부하 시종 중 하나가 두려움에 질려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울부짖었다.

“살려주십시오! 제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가웨인 사제님이 시켜서 마력로에 약물을 넣은 것뿐입니다! 약을 넣지 않으면 저희 가족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이겠다고 협박하셨습니다!”

“이 미련한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가웨인이 시종의 뺨을 갈기며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의 성스러운 백색 사제복 아래 숨겨진 추악한 탐욕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가웨인의 이중적인 도덕성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 바닥을 뒹굴었다.

원로들은 멍하니 허공의 스크린과 바닥의 증거물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거친 얼굴에 서서히 깊은 충격과 자괴감이 차올랐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체온까지 바쳐가며 헌신했던 인간 보모를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정작 가문을 파탄 내려는 뱀 같은 사제의 감언이설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가장 완고했던 원로 발칸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뒤를 이어 다른 원로들도 하나둘씩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었다.

“……하은 보모님.”

발칸의 거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우리가 어리석었소. 눈이 멀어 가문의 은인이자 아이들의 유일한 구원자를 모함하려 들다니. 이 늙은이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오. 앞으로 보육동의 모든 권한과 식량 공급망은 온전히 보모님께 일임하겠소. 제발…… 우리 아이들을 살려주시오.”

늙은 늑대들의 진심 어린 애원과 사죄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윈터우드가의 최고 권력층인 원로회가 한낱 인간 보모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은의 가슴속에 묵직한 성취감과 잔잔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하하…… 하하하하!”

광장 구석에서 기괴하고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웨인이 완전히 이성을 잃은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튀어나올 듯했다.

“이 더러운 수인의 앞잡이 년이…… 감히 내 계획을 망쳐? 감히 신의 대리인인 나를 파멸시켜?!”

가웨인이 품 안에서 붉은빛이 흉포하게 요동치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북부 마력 광산의 심장부에서만 추출되는 극도로 불안정한 대포식 광산 마석 폭탄이었다. 그 안에는 성채 전체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폭발적인 마력이 압축되어 있었다.

“다 같이 지옥으로 가자꾸나!”

가웨인이 광소를 터트리며 마석 폭탄의 안전장치를 강제로 파괴했다. 마석이 시뻘건 빛을 뿜으며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웨인은 망설임 없이, 아기 늑대들이 피신해 있는 보육동 건물을 향해 그 치명적인 폭탄을 힘껏 던졌다.

붉은 마석 폭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보육동의 열린 창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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