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마차 안,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가웨인의 손끝이 기괴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품속에서 꺼내진 마력 증폭 폭주 유도 장치는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불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장치를 꽉 움켜쥔 가웨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두고 봐라. 네년이 자랑하는 그 따뜻한 보금자리가 서로를 찢어발기는 지옥도로 변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지.”
그의 손끝에 실린 광기 어린 신성 마력이 장치 내부의 마핵을 사정없이 찔렀다.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장치에서 뿜어져 나온 보이지 않는 파동이 대지를 타고 혹한의 성채 지하 깊숙한 곳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웨인의 눈에 서린 독기가 어두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 * *
같은 시각, 성채의 가장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인 보육동의 주방. 주방 안은 따뜻하게 달궈진 오븐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하고 고소한 구운 빵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노르스름한 조명 아래서 하은은 선반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작은 항아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지난 일요일, 성채의 오래된 창고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붉은 양념 단지였다. 투박한 진흙으로 빚어진 단지 뚜껑을 열자, 시나몬과 말린 베리류를 한데 섞어 졸인 듯한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도감으로 확인했을 때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는데.’
하은은 단지 안의 붉은 가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힐링 레시피 도감의 미세한 주석에 따르면, 이 안에는 아주 미량이지만 어떠한 탁한 마력도 깨끗하게 정화해 주는 ‘고대 마력 중화 성분’이 숨겨져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잘 보관해 두었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하은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을 띤 ‘힐링 레시피 도감’의 홀로그램 창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붉은 경고등을 켜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경고! 성채 지하 마력로에 정체불명의 오염된 마력이 급격히 유입되고 있습니다!] [시스템에 일시적인 마력 과부하가 발생합니다!] [경보! 시스템 유지 마력원인 호스트의 체온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아윽!”
하은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추위는 지금까지 겪었던 저체온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뼛속 깊은 곳에 얼음송곳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오장육부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지독한 감각이었다. 하얗게 변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고, 바닥을 짚은 손끝이 시퍼렇게 질려갔다.
성채의 온도를 조절하는 마력로가 오염되자, 도감 시스템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 하은의 온기를 무자비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고 숨이 턱턱 막혔다.
“하은!”
마침 보육동의 겨울철 땔감 장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서던 블레이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의 굳건하고 넓은 어깨가 하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봐, 정신 차려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블레이드가 황급히 하은의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그의 단단한 몸 역시 평소의 얼음장 같은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은의 몸 안에서 불꽃을 피워내야 할 심장이 꽁꽁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무의식적인 생존 본능이 그녀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블레이드의 두꺼운 검은 코트 깃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그의 상의를 파고들어 목덜미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옷자락 틈새에 걸려 있던 은빛 체인 끝의 푸른 광석에 닿았다.
그것은 지난번 성채 깊은 곳에서 발견했던, 오직 하은의 손길에만 미세한 반응을 보이던 공작가의 비보, ‘심장 마력 핵석’이었다.
스아아아—!
하은의 얼어붙은 다섯 손가락이 핵석을 완전히 감싸 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껏 그 어떤 강한 마법사나 전사가 만져도 차가운 돌덩이에 불과했던 핵석이, 하은의 손길이 닿자마자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푸른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주방 전체가 푸른 은하수를 뿌려놓은 듯 신비로운 빛무리로 가득 찼다.
[시스템 안내: 고대 유물 '황제의 화로' 핵석과의 완벽한 공명을 감지했습니다.] [연결 성공: 호스트와 대상(블레이드 윈터우드) 간의 원거리 마도 온기 경로가 영구적으로 확립됩니다!]
“이건…….”
블레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심장 가장 깊은 곳, 평생 동안 차가운 동결 마력으로 꽁꽁 싸매어 가두어 두었던 가공할 만한 태양의 불꽃이 하은을 향해 요동치고 있었다. 아무리 스킨십을 해도 겉 표면의 냉기 장벽 때문에 전달하기 힘들었던 그 초고열의 화속성 마력이, 핵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고속도로가 뚫린 것처럼 거침없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쿵!
하은의 귓가에 블레이드의 심장 소리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직접적인 피부 접촉이 전혀 없었음에도, 오직 핵석을 쥔 손끝을 타고 들어온 푸른 빛의 파동이 그녀의 전신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얼음 성벽 같았던 그의 가슴속에서 피어난 따스한 봄바람이 하은의 혈관 속을 타고 흐르며 얼어붙었던 피를 부드럽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아늑한 난로 옆에 누워, 폭신하고 부드러운 거위 털 이불을 끝까지 덮어쓰고 있는 듯한 몽글몽글한 온기였다. 차갑게 굳어 있던 손가락 끝에 발그레한 핏기가 돌았고, 하얗게 질렸던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콤한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아…… 따뜻해…….”
하은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맑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매번 저체온증에 걸릴 때마다 그의 살을 맞대고 매달려야만 했던 고통스러운 제약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제는 이 핵석을 통한 정신적, 마력적 공명만으로도 그의 뜨거운 화속성 마력을 언제 어디서든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보이지 않는 끈이 서로의 영혼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느낌이었다.
블레이드는 자신의 가슴속 아궁이에서 뿜어져 나온 온기가 하은을 온전히 채우고 안정시키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늘 무겁고 고통스럽기만 했던 자신의 타고난 불꽃이, 이 작고 사랑스러운 인간 여성을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빛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그는 하은의 손을 덮어 잡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괜찮은 건가?”
“네, 전하……. 정말 신기해요. 이제는 닿지 않아도 전하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요.”
하은이 맑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블레이드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얼음 같던 그의 얼굴에 아주 미세하지만 다정한 온기가 어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은은 정신을 차리고 싱크대 위에 놓인 붉은 양념 단지를 바라보았다. 도감의 경고창은 여전히 붉게 깜빡이고 있었고, 지하 마력로의 오염 수치는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전하, 가웨인이 성채 아래에 무언가 짓을 꾸민 게 분명해요. 마력로가 오염되었어요. 하지만 다행히 제게 해결책이 있어요.”
하은은 붉은 양념 단지를 들어 올렸다.
“이 단지 안에 든 가루는 아주 특별한 고대 정화 성분이에요. 이걸 마력로의 중심부에 뿌리면 오염된 마력을 완전히 중화하고 성채의 결계를 다시 복구할 수 있어요.”
“그것이 정말이냐?”
“네, 제 눈에는 다 보여요. 이 가루가 가진 정화의 힘이요.”
블레이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기적 같은 능력은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좋다. 당장 기사들을 소집해 지하 마력로로 가겠다. 마샤에게도 경계를 강화하라고 일러두지.”
그가 몸을 돌려 수하들을 부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엄청난 진동과 함께 보육동 전체가 찌르르 흔들렸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유리 전등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바닥에 깔린 두꺼운 카펫마저 들썩이는 듯한 기괴한 충격파가 발밑을 휩쓸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지?!”
블레이드가 신속하게 하은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창밖에서 정체불명의 불길한 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와 따스한 주방 안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하은은 본능적으로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밀어젖혔다.
“전하, 하늘을 보세요!”
하은의 비명 섞인 목소리에 블레이드 역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 년 내내 하얀 눈보라만 몰아치던 북부의 푸르스름한 겨울 하늘 위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핏빛 붉은 마력 무지개가 거대한 장벽처럼 성채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가웨인이 작동시킨 유도 장치가 성채의 마력로와 반응하여 뿜어낸 광기의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그 붉은빛이 성채를 집어삼키는 순간.
“아아아아앙—!”
“깽! 깨갱!”
보육동 지하와 1층 놀이방 쪽에서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아기 늑대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성채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수십 마리의 아기 늑대 수인들이 일제히 타고난 마력 폭주 상태에 빠져들며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에는 하은의 디저트로 얌전하게 가라앉아 있던 아이들의 폭주율 수치가 도감 화면 위에서 일제히 붉은색 수직 상승 곡선을 그리며 폭발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위험해요!”
하은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걱정이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붉은 무지개 아래로, 성채의 평화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전하, 보육실로 가야 해요! 루이와 아이들이……!”
하은은 품에 꼭 안고 있던 붉은 양념 단지를 가슴에 품은 채 주방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를 달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하얗게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에 요란하게 울렸다. 블레이드는 그녀의 뒤를 바짝 쫓으며, 성채 내부의 방어 결계를 가동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성채의 심장부인 마력로가 오염된 탓에, 고대의 방어 체계는 완전히 오작동하고 있었다.
“틀렸군. 성채의 비상 격리 격벽이 제멋대로 내려앉고 있다!”
블레이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하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보육동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평소라면 몽글몽글하고 폭신한 비눗방울과 달콤한 쿠키 향기로 가득했을 보육실이, 지금은 시뻘건 마력의 스파크로 가득 차 타들어 가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으아앙! 아파, 아프단 말이야!”
“깽! 깨갱……!”
솜사탕처럼 하얗고 보드랍던 아기 늑대들의 은빛 털이 붉은 마력 폭풍에 휩쓸려 거칠게 뻗쳐 있었다. 가장 상태가 심각한 것은 루이였다. 가문의 정통 후계자답게 타고난 마력이 가장 강했던 루이는, 제 몸집보다 세 배는 더 큰 거대한 은빛 늑대의 환영을 허공에 띄운 채 울부짖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루이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핏빛으로 번뜩였다.
[경고! 루이 윈터우드의 마력 폭주율 95% 돌파!]
[보육동 내 아기 수인 12마리의 집단 폭주가 임박했습니다!]
[특수 돌발 퀘스트: '정화의 라즈베리 젤리'를 대량 연성하여 광역 폭주를 진정시키십시오.]
[필수 재료: 고대 마력 중화 가루(붉은 양념 단지), 신선한 겨울 딸기.]
[소모 체온: 현재 체온의 85%. 연성 시 전신 동결 상태에 빠질 극도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몸이 얼어붙을지도 모른다는 경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과거 보육원 화재 사고 당시, 뜨거운 불길 속에서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서 소중한 아이들을 잃지 않겠어.’
그녀의 눈동자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하은은 단지 속의 붉은 가루를 주방 가판대 위에 쏟아붓고, 보육동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던 딸기들을 꺼냈다.
“하은, 멈춰라! 그 정도의 연성은 네 생명을 완전히 갉아먹을 거다!”
블레이드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육실 천장에서 쿠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묵직한 강철 격벽이 무서운 속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오염된 성채의 마법이 폭주하는 아기 늑대들을 위험 요인으로 판단하고, 보육실 전체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해 사살하려는 고대 방어 프로그램이 작동한 것이었다.
쾅—!
“하은—!”
블레이드의 절규가 울려 퍼졌으나, 두꺼운 강철 격벽은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은은 폭주하는 아기 늑대들과 함께 격실 내부에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물리적 장벽에 가로막힌 탓인지 가슴속에 흐르던 블레이드의 따스한 온기 경로가 가늘게 떨리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경고: 물리적 차단으로 인해 '심장 마력 핵석'의 공명 효율이 20%로 급감합니다!]
[체온 보충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연성을 시작할 경우 심장 마비의 위험이 있습니다.]
사방에서 붉은 마력이 불꽃처럼 튀었고, 이성을 완전히 잃은 루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채 하은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가르렁거림 속에서, 하은의 손끝은 이미 하얗게 얼어붙어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연성을 시작하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했다. 하지만 하은은 눈물 흘리는 루이의 얼굴을 보며, 떨리는 손으로 붉은 가루를 쥔 채 가마솥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