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들리에의 쏟아지는 크리스탈 빛은 야속할 정도로 눈부십니다.
아카데미 건국 기념 가면무도회장은 사치스러운 사교계의 정수를 보여주듯 극도로 화려합니다. 당신이 입은 드레스는 최고급 타프타 실크와 더스티 핑크빛 오간자를 겹겹이 덧대어, 마치 갓 피어난 장미 꽃잎을 흐드러지게 두른 듯 우아하게 흔들립니다. 목덜미를 장식한 로즈 컷 핑크 사파이어 목걸이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녀린 쇄골 위에서 영롱하게 반짝입니다. 눈가를 가린 은제 레이스 가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눈동자는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너무 조여서 숨을 못 쉬겠네. 아무리 악녀 가문 막내딸이라도 코르셋을 이렇게 뼈가 으스러지도록 조이는 건 명백한 인권 침해 아닌가?’
속으로 투덜대며 투명한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는 당신의 시선 끝에는, 칠흑 같은 벨벳 제복에 순은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늑대 가면을 쓴 사내가 서 있습니다.
북부의 지배자이자 당신의 임시 계약 연인, 카시안 데인 발렌타인.
가면으로 반쯤 가려졌음에도 숨막히게 수려한 콧날과 그 아래로 드러난 매혹적인 입술이 오만한 존재감을 뽐냅니다. 평소 그를 감싸던 서슬 퍼런 살기는 한 꺼풀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가슴팍을 장식한 황금빛 훈장만큼이나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이 흘러넘칩니다.
그가 기척을 느끼고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은빛 가면 너머로 마주친 검붉은 눈동자에 찰나의 이채가 스칩니다.
“레티시아.”
그가 낮게 읊조린 당신의 이름은 평소의 차가운 ‘발루아 영애’라는 직함보다 묘하게 간지럽게 귓가를 파고듭니다. 그의 거칠고 커다란 손이 자연스럽게 당신의 허리를 에스코트하듯 감싸 안는 순간, 얇은 실크 드레스 너머로 뜨거운 온기가 전해집니다.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인 가짜 약혼 관계 속에서, 아주 작고 미묘한 균열이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릅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숨기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그때였습니다.
경쾌한 왈츠 선율 너머, 연회장 구석의 기둥 그림자 속에서 익숙하고도 불쾌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당신의 친부이자 악명 높은 발루아 공작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수하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하가 카시안에게 배달될 크리스탈 잔에 은밀하게 백색 가루를 떨어뜨리는 장면이 당신의 시야에 정확히 포착됩니다. 가루가 가라앉으며 술잔 표면에 보랏빛 아지랑이가 미세하게 피어오릅니다. 영혼마저 오염시키는 흑마법의 저주가 담긴 독이 분명했습니다.
머릿속을 채우던 장난스러운 독백이 순식간에 차갑게 휘발됩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고요가 찾아옵니다. 저 독배가 그의 입술에 닿는다면, 당신이 온 힘을 다해 움켜쥔 생존의 동아줄도, 그리고 묘하게 심장을 두드렸던 이 남자의 눈부신 생명도 모두 허무하게 바스러질 것입니다.
공작의 사주를 받은 시종이 은쟁반을 받쳐 들고 카시안을 향해 다가옵니다. 카시안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 채, 한 손을 뻗어 잔을 잔을 쥐려 합니다.
당신의 손끝이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떨립니다. 당신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