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기사들이 오가는 황실 아카데미의 서쪽 연무장. 하지만 이곳 북부대공의 전용 연무장은 섬뜩하리만치 고요합니다. 당신은 라벤더빛 타프타 실크 드레스의 자락을 정돈하며 마른침을 삼킵니다. 소맷자락을 장식한 벨기에산 최고급 발랑시엔 레이스가 긴장으로 잘게 떨리지만, 가슴팍에서 흔들리는 물방울 모양의 자수정 펜던트만큼은 우아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연무장 안으로 발을 디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쉬익―!*
고막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서늘한 검풍이 뺨을 스칩니다.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푸르스름한 안광을 뿜어내는 실버 템퍼드 강철 검날이 당신의 목덜미 바로 앞에 딱 멈춰 섭니다. 살을 비집고 들어올 듯한 예리한 칼끝이 쇄골 언저리에 닿을 듯 말 듯 가깝습니다.
*잠시만요, 북부대공 전하? 아무리 북부의 예법이 야생 날것 그대로라지만 초면부터 다짜고짜 목을 겨누는 건 반칙 아닌가요? 오늘 아침에 시녀가 장미 오일로 무려 사십 분 동안 공들여 마사지해 준 내 소중한 목이란 말입니다! 저 시퍼런 검날은 또 왜 저렇게 번쩍거리는 건데요. 무슨 적들의 눈물이라도 모아서 연마한 건가요?*
머릿속으로는 비명을 지르며 온갖 앙탈을 부리고 있지만, 겉으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합니다. 검 자루를 쥔 손의 주인, 카시안 보르헤스를 아주 천천히 올려다봅니다. 훈련의 열기로 땀에 젖어 이마에 거칠게 흘러내린 칠흑 같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혹한의 겨울 바다를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시린 청안이 당신을 꿰뚫어 봅니다.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검은 제복 셔츠 너머로 단단한 흉근이 사납게 들썩입니다. 그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밤안개처럼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려보냅니다.
"아카데미에 길을 잃은 나비가 있군. 제 발로 사냥꾼의 덫을 밟은 바보인가, 아니면……."
칼끝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미지근한 당신의 목덜미 피부를 살짝 누릅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감촉에 로코코풍의 유쾌한 망상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집니다. 연무장을 지배하는 것은 압도적인 강자의 살기와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그의 체열뿐. 숨이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당신의 보랏빛 눈동자와 그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날카롭게 맞물립니다.
이 남자는 진심입니다. 여기서 한 치의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원작의 비참한 최후가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앞당겨질 것입니다. 목줄을 쥔 거대한 흑랑을 마주한 채, 당신은 살기 가득한 대공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술을 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