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가 금모래처럼 흩날리는 아카데미 대도서관의 심처. 유선형으로 굽어치는 호두나무 서가 사이, 창백하게 부서지는 햇살을 등진 채 당신은 숨을 삼킵니다.
머리 위에는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라벤더 빛의 실크 조젯 드레스 자락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깃에 촘촘히 박힌 담수 진주와 머리를 장식한 장미 금빛 아메시스트 핀이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도정 벽면으로 오색 빛깔의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누가 보아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백작가의 응석받이 막내딸의 모습. 하지만 당신의 속사정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중입니다.
'와, 눈빛 좀 봐. 저건 사람이 아니라 방금 냉동고에서 꺼낸 고기 써는 칼날이야.'
서가 그늘에 기댄 채 당신을 내려다보는 사내, 북부의 진정한 지배자이자 가공할 권력을 쥔 대공자 카시안 보르헤스. 그의 검은 제복에 수놓인 은사 번개 장식은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뜩입니다. 흑청색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신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싱클레어 영애.”
그가 천천히 입을 뗍니다. 낮고 서늘한 음성에 척수가 짜릿하게 얼어붙는 착각이 듭니다. 영주의 위엄을 고스란히 담은 음성은 서가 사이의 공기마저 무겁게 짓누릅니다.
“아카데미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내 동선을 밟아 온 대가가 고작 길을 막고 서 있는 유희는 아니길 바랍니다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가문이 파멸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미래의 백지화가 바로 이 남자, 카시안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요. 당신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습니다. 레이스가 화려하게 달린 부채를 살며시 접어 올리는 동작만큼은, 혹독한 예법 수업에서 살아남은 귀족 영애답게 우아하고 도도하게.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
가까이 다가선 순간, 오래된 양장본의 가죽 냄새 사이로 차가운 박하향과 묵직한 설원의 향취가 훅 끼쳐옵니다. 그의 시선이 당신의 눈망울에서부터 보랏빛 아메시스트 귀걸이로, 그리고 가만히 맞잡은 하얀 손끝으로 아주 느리게 이동합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대도서관의 정적 속에서, 고작 두 사람의 호흡만이 가늘게 얽힙니다.
남들이 보면 숨이 막힐 듯한 로맨틱한 대치 구도겠지만, 실상은 생존을 건 눈치 게임의 절정. 당신은 입가에 가장 달콤하고도 위험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보통의 제안으로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가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그 어떤 화려한 보석보다도 은밀하고도 파괴적인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은 호흡을 가만히 가다듬으며, 준비해 온 치명적인 제안을 머릿속으로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