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대지를 찢어발기며 질주하던 여진 철기 오천 기가 증기 압력 가동포의 웅장한 가속 기계음과 마주하기 불과 백 보 직전,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일제히 멈추어 섰다.

사나운 북풍을 뚫고 터져 나온 쇠가마의 괴성은 갓 도하를 마친 북방 야만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마들은 앞다리를 치켜들며 비명을 질렀고, 선두에 선 기마수들은 고삐를 쥔 손을 바르르 떨며 눈앞의 하얀 증기 장막을 경악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괴, 괴물이다! 조선 놈들이 산신을 불러냈다!"

대열의 후방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무색하게도, 언덕 위 독산 보루에 늘어선 강철의 형체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백색의 고압 증기 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무쇠의 총신과 톱니바퀴들은 오직 기하학적인 정밀함만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선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적진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영흥의 지세가 한 폭의 정밀한 삼차원 도면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며칠 전 서한주가 영흥 관아의 폐창고 구석에서 찾아내었던 빛바랜 지적도였다.

"한주야."

"예, 대군 대감. 준비는 끝났사옵니다."

서한주가 품에서 누렇게 바랜 가죽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것은 일찍이 영흥 부윤이 쓸모없다 여겨 방치해 두었던 북방 국경지대의 구루마용 구 군치 가도 지적도 유실본이었다. 조정의 공식 지도에는 늪지대로 기록되어 관군조차 우회를 포기한 곳이었으나, 이 가도에는 수백 년 전 고려가 동북 9성을 개척할 때 다져놓은 견고한 구거(溝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함경도의 진흙은 허명에 불과하다. 구 군치 가도의 지하 수로 유역은 바닥에 화강암 판석이 깔려 있어 십만 근의 쇳덩이도 거뜬히 버텨내지. 두칠이는 들으라."

"예, 마마! 대장간의 모든 장인들이 대기하고 있나이다!"

최두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우회조를 기동하라. 지적도에 표시된 수로의 둑길을 따라 증기철갑차 두 대를 적의 우익 측면으로 은밀히 진입시킨다. 저들이 언덕 아래에서 발이 묶인 이 찰나가 유일한 기회다."

"소인 최두칠, 대감마님의 정밀하신 혜안을 믿고 늪을 건너겠나이다!"

최두칠이 이끄는 정예 공장(工匠)들과 증기철갑 수레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증기 장막을 차폐막 삼아, 무거운 쇠바퀴들이 구 군치 가도의 숨겨진 판석 위를 구르는 소리는 적들의 마각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기계의 운용을 아는 자들만이 설계할 수 있는 완벽한 전술적 우회였다.

여진의 대장 아골타는 전열을 정비하려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기마대의 대열은 기괴한 무쇠 가마의 고동 소리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동요하지 마라! 조선의 허장성세일 뿐이다! 화살을 쏘아라! 저 해괴한 가마를 부숴라!"

아골타의 명령에 따라 수백 대의 시위가 울렸다. 철촉을 단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으나, 증기 화차의 외벽을 감싼 두꺼운 고탄소강 철판 앞에서는 단지 팅, 팅 하는 경쾌한 금속성 파열음만을 남길 뿐이었다.

"어리석은 지고."

이선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조소가 흘렀다.

그가 타고 있는 가동포의 심장부, 즉 증기 고압 실린더는 과거 영흥 야철장에서 그가 목숨을 걸고 구현해 낸 제철 기술의 결정체였다. 본래 조선의 주조 기술로는 연속 사격 시 발생하는 고열과 고압을 견디지 못하고 포신이나 실린더가 파열되기 일쑤였다. 이선은 첫 전생 각성 당시 야철장 가마 벽면의 미세 탄소 균열 구조를 혜안으로 투시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탄소 함유량을 미세하게 제어하고, 냉각 속도를 단계별로 조절하여 주조물 내부의 압화 현상을 완전히 억제한 고탄소강 정련의 비결. 그것이 바로 이 거대한 무쇠 괴물이 터지지 않고 버텨내는 근원적 힘이었다.

"가동포, 사격 개시."

이선의 명령과 동시에 측면의 전포장들이 방아쇠 레버를 당겼다.

콰아아앙-! 콰콰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격발음과 함께, 고압 실린더가 기계적인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증기 압축력이 추진판을 밀어내자, 포구에서 묵직한 강철 탄환들이 무서운 주기로 연속 사출되었다.

피스톤이 전진하고, 가스가 배출되며, 다음 탄환이 약실로 장전되는 일련의 과정이 눈부신 속도로 반복되었다. 그것은 현대의 자동 화기를 조선의 수공업 기술로 재현해 낸 열역학적 기적이었다.

푸슈욱! 콰앙!

사출된 강철 탄환들은 음속을 넘나들며 여진의 정예 기마 전열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말과 사람이 한데 엉켜 허공으로 솟구쳤고, 단단한 가죽 갑옷은 강철의 물리적 운동공학 앞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전열의 선두에 섰던 기병 백여 명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분오열하며 길을 열었다.

"이, 이것이 정녕 인간의 무기란 말이냐!"

아골타의 눈이 뒤집혔다. 신기전이나 화차가 뿜어내는 화약의 불꽃과는 격이 달랐다. 화약의 그을음도 없이, 오직 차가운 강철의 고동과 함께 밤하늘을 가르는 무쇠 구슬들이 아군을 말 그대로 갈아마시고 있었다.

이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 뒤편에서는 또 다른 기계적 질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제1조, 탄환 장전! 제2조, 황동 카트리지 수거 및 냉각! 서두르지 마라, 공도회의 율조를 기억하라!"

서한주가 목청을 높이며 사격대원들을 진두지휘했다. 대원들은 전장에서 흔히 보이는 허둥지둥하는 군병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선이 영흥에 도입한 '분업 계약제'의 생산 규율을 그대로 전투에 이식한 결과였다. 탄환을 나르는 자, 실린더의 압력을 확인하는 자, 윤활유를 주입하는 자가 기계의 부속품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탄약의 카트리지 외피는 유난히 누런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한주는 탄피를 약실에 밀어 넣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훈구의 무리들이 우리를 역모로 몰기 위해 숨겨두었던 위조 엽전 주조 틀이, 도리어 북방을 지키는 강철의 껍데기가 되었으니 참으로 천리(天理)의 순환이로다."

그것은 조정에서 보낸 간작이 야철장 창고 구석에 몰래 숨겨두었던 조잡한 한양 조정식 위조 엽전 주조 틀을 녹여 정밀 가공한 황동 슬리브였다. 이선은 감찰단의 음모를 분쇄한 뒤, 그들이 남겨둔 다량의 구리와 황동 주조 틀을 압수하여 증기포의 기밀성을 유지하는 탄피와 실린더 밀봉재로 완벽히 재활용했다. 민우식 일계가 대군을 파멸시키기 위해 쳐둔 덫이, 이제는 여진족의 가슴을 뚫는 기계 문명의 심장이 되어 고동치고 있는 것이다.

"마마! 우회조가 적의 우측 방어선을 돌파했나이다!"

전령의 보고와 함께, 과연 여진군 우익의 진흙탕 너머에서 거대한 증기 철갑차 두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갑차의 전면에 부착된 거대한 회전 강철 갈퀴가 증기력으로 회전하며 여진의 말들을 가차 없이 들이받았다. 측면이 완전히 무너진 여진군은 우왕좌왕하며 서로 엉켰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독산 보루의 가동포가 다시 한번 불을 뿜었다.

콰콰콰쾅-!

"으아악! 도망쳐라! 철귀(鐵鬼)다!"

오천 기의 천하무적이라 자부하던 여진 선봉대는 단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패퇴하기 시작했다. 피와 살점이 튄 진흙밭 위에 버려진 무기들이 기계의 승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해냈사옵니다, 마마! 우리가 저 무시무시한 야만인들을 단숨에 꺾었나이다!"

최두칠이 얼굴에 검은 기름때를 묻힌 채 만세를 불렀다. 장인들과 공도회 유생들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격정의 빛이 서렸다. 그것은 주자학의 공리공론이 아닌, 실체적인 기(氣)의 힘으로 이(理)를 증명해 낸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선의 표정은 여전히 마른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은 완벽주의적 불안과 피해망상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민우식 그 유음(遺陰)한 자가 북방의 빗장을 열어주었을 때는, 필시 이보다 더 확실한 패를 준비했을 터.'

이선은 품속을 지그시 눌렀다. 비단 옷자락 안쪽에는 주상 전하이자 형님인 이진이 밀서와 함께 보내온, 왕실 전용 위례부 도장이 찍힌 무제한 비밀 군령 통행증이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증표는 언젠가 한양의 성문을 열고 들어갈 때의 무기가 되겠지만, 지금 눈앞의 전장을 정리하지 못하면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둥. 둥. 둥.

패퇴하는 여진 선봉대의 뒤편,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먹구름과 같은 본대의 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봉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 최소 삼만은 되어 보이는 대군이었다.

그리고 그 본대의 중심부에, 조선의 군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기괴한 형체의 수레들이 늘어서 있었다.

"저, 저것은…!"

서한주의 안색이 단숨에 창백하게 질렸다.

"홍이포(紅夷砲)…! 아니, 명나라의 고성능 대포가 어찌 저들의 수중에 있단 말입니까!"

포신에 붉은 천을 두른 거대한 청동 대포들이 여진족 본대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었다. 조선의 조정조차 함부로 구하지 못하는 명나라의 최신식 화포였다. 사대부의 거두이자 조정의 실세인 민우식이 북방의 이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명나라 국경의 밀무역상들과 내통하여 불법 조달한 뒤 여진 세력에게 넘겨준 금단의 병기들이었다.

"기계를 천시하며 예치를 부르짖던 사대부의 영수가, 결국 외세의 화포를 들여와 동포를 죽이려 하는구나."

이선의 목소리에 뼈를 깎는 듯한 분노와 냉소가 실렸다.

여진의 본대 장수가 소리치며 횃불을 높이 들었다. 시커먼 포구들이 일제히 독산 보루의 증기 화차를 향해 조준되었다. 고온의 초열을 머금은 격발선에 불꽃이 닿기 직전의 찰나,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화기(火器)의 도화선에 내려앉은 불꽃은 가차 없었다.

쉬이익 하는 도화선의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공기의 진동을 타고 독산 보루의 언덕바지까지 시리게 전해졌다. 적들의 포구 끝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일어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쿠구구구콰앙-!

대포의 포효는 가동포의 증기음과는 결이 다른, 가공할 폭발력을 품고 있었다.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명나라제 대형 철환들이 음속에 준하는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포탄이 지나간 자리의 공기가 붉은 열기로 일그러졌다.

"대피하라-! 포격을 피해라!"

관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콰앙! 쾅!

첫 번째 포탄이 보루 전면의 흙벽을 강타했다. 수백 년 동안 단단히 다져진 성토가 단숨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며 사방으로 흙먼지가 폭풍처럼 휘날렸다. 두 번째 포탄은 아슬아슬하게 증기 화차의 우측 상단을 스쳐 지나가며, 보루 뒤편의 군막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흐윽…!"

서한주는 날아드는 파편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감쌌으나, 눈은 여전히 이선을 향해 있었다.

이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동공이 기이하게 수축되며,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변색되기 시작했다. 묵직한 쇳덩이와 화약의 연소 가스로 가득 찬 전장이 분자 단위의 미세한 구조로 해체되어 그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밀 설계의 혜안.'

머릿속 사영기(寫影機)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날아오는 적 포탄의 궤적, 명나라산 청동포의 포신 두께와 화약의 배합 비율, 그리고 아군 증기 화차를 감싸고 있는 고탄소강 장갑판의 잔존 응력(殘存應力)이 실시간으로 계산되어 수식의 폭포를 이루었다.

'두께 삼 분의 고탄소강판. 직사로 맞으면 이 보일러는 견디지 못한다. 압력이 역류하여 내부에서 대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전생의 고차원 물리 법칙과 재료역학의 수식들이 조선의 뇌 신경세포와 강제로 동기화되는 순간, 어김없이 파멸적인 대가가 그의 육체를 덮쳤다.

"아, 윽…!"

머릿초가 통째로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뇌혈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팽창했고, 고막 너머로 쿵쾅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이선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와 그의 가슴팍을 붉게 적셨다.

"마마! 또 뇌리가…!"

서한주가 서둘러 품에서 수건을 꺼내 이선의 얼굴을 닦으려 다가섰으나, 이선은 피 묻은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잡아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핏줄이 터져 광기 어린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러서라.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다."

이선은 피를 머금은 목소리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두칠아! 우측 구동 차륜의 증기 밸브를 즉시 닫고, 좌측 보일러의 역압(逆壓) 레버를 당겨라! 차체를 우측으로 이십오 도 기울여야 한다!"

"예? 마마, 차체를 기울이면 화차가 전복될 수도 있사옵니다!"

최두칠이 경악하며 외쳤으나, 이선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우주의 이치에 예각(銳角)과 둔각(鈍角)이 존재함은 만물이 서로를 비끼어 흐르게 하기 위함이다! 경사 장갑의 각도를 맞추지 않으면, 다음 포격에 우리 모두는 고철 더미와 함께 가루가 될 것이다! 당장 당겨라!"

이선의 추상같은 호통에 최두칠은 이를 악물고 무쇠 레버를 힘껏 꺾었다. 장인들이 일제히 우측 차륜의 압력 방출 밸브를 개방하자, 쉭-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우측 현수장치가 가라앉았다. 동시에 좌측의 고압 피스톤이 강하게 가동하며, 거대한 강철 화차가 우측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졌다.

정확히 이십오 도의 경사각.

그 순간, 여진족 진영의 청동포들이 두 번째 일제 사격을 가했다.

쿠구구광-!

시뻘건 불덩어리들이 대기를 뚫고 날아와 이선이 탑승한 증기 화차의 정면 장갑을 강타했다.

깡-!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 파열음이 독산 보루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포탄은 정면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 이선이 정밀하게 계산해 낸 이십오 도의 경사면을 따라, 날아들던 철환들은 미끄러지듯 빗겨 나가며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피탄경시(避彈傾視)의 물리적 법칙이 조선의 전장에서 완벽히 구현된 순간이었다.

"튕겨 나갔다! 대포의 알맹이가 쇳덩이를 뚫지 못하고 하늘로 날아갔다!"

조선군 진영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여진족의 포수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명나라의 기술자들이 '천하를 깨부수는 신포'라 자랑했던 화포의 위력이, 기괴하게 기울어진 조선의 무쇠 가마 앞에서 무력하게 비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저것은 필시 마법이거나 요술이다!"

아골타가 칼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선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혜안의 무리한 사용으로 인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입안 가득 비린 혈향이 맴돌았다. 다리가 풀려 쓰러지려는 이선을 서한주가 어깨로 단단히 부축했다.

"대군 대감, 기력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소첩이 이 도면을 이어받을 터이니, 제발 무리하지 마옵소서."

서한주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이선의 피 묻은 뺨 위로 떨어졌다. 이선은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호흡을 내뱉었다.

"아직… 적의 진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저 화포들의 배후를 보아라."

이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본 서한주와 최두칠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여진족 본대의 기마대 틈바구니에서, 말을 탄 채 포수들을 독려하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여진족의 가죽 갑옷이 아닌, 조선 조정의 정규 군관들이 착용하는 융복(戎服)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소매 안쪽으로 언뜻 보이는 표식은 다름 아닌 한양의 병조(兵曹)와 외척 민우식의 가문에서 사용하는 사가(私家)의 문장(紋章)이었다.

"나라를 지키라 보낸 군관들이, 적의 앞잡이가 되어 대군을 저격하고 있었단 말인가…"

서한주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다.

민우식은 단순히 여진족에게 화포를 넘겨준 것에 그치지 않고, 화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조정의 비밀 포수들과 군관들까지 직접 북방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대군 이선을 확실하게 제거하여 역모의 싹을 자르고, 영흥의 제철 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수구파의 추악한 탐욕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아군 증기 화차의 하부에서 기괴한 기계적 마찰음과 함께 붉은 경고음과 같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끼이이이익!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하부 보일러실에서 검은 그을음을 뒤집어쓴 최두칠이 급히 기어 나왔다.

"수로 가도를 통과할 때 바퀴에 묻은 진흙과 모래가 보일러의 냉각수 유입 밸브에 끼어 들어갔나이다! 급수가 차단되어 압력솥 내부의 열기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사옵니다!"

"무엇이라?"

이선이 급히 화차 내부의 압력계를 바라보았다. 황동으로 만든 압력 바늘이 이미 붉은색 파멸의 선을 향해 빠르게 치닫고 있었다. 냉각수가 유입되지 않는 보일러는 거대한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수 분 내에 증기 화차 전체가 폭발하여, 보루에 있는 공도회 회원들과 조선군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게 될 판국이었다.

"급수관을 수동으로 열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장갑판 밖으로 나가 진흙을 긁어내야 하는데…"

서한주가 밖을 내다보았다. 언덕 아래의 여진족 군관들이 다시 한번 화포의 격발선에 횃불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적의 세 번째 포격이 가해지기 직전의 찰나.

동시에 기계의 심장은 과열로 터지기 직전이었고, 이선의 몸은 뇌리각혈의 여파로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들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진퇴양난의 거대한 어둠이 영흥의 독산 보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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