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르르릉!
대지를 흔드는 포성이 독산 보루의 흙벽을 사정없이 때렸다. 매캐한 연기와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와중, 적의 기마 대장은 명나라에서 밀수해 온 홍이포(紅夷砲) 계열의 대형 직사포 뒤에서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죽 투구 너머로 번들거리는 그의 탐욕스러운 눈빛은 오직 하나, 언덕 위에 우뚝 선 조선의 기괴한 강철 마차만을 겨누고 있었다. 적의 포수들이 붉게 달아오른 횃불을 격발선에 가져다 대는 찰나였다.
"마마! 보일러의 압력이 임계치를 넘었사옵니다! 이대로 가다간 포격에 맞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산산조각이 나옵니다!"
최두칠이 검은 그을음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이밀며 비명을 질렀다. 보일러 하부의 유입 밸브에 진흙과 거친 모래가 끼어 냉각수 순환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압력계의 바늘은 이미 붉은 파멸의 영역을 넘어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선의 귓가에 고주파의 이명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전생의 기억을 무리하게 동기화한 대가로 뇌 신경계가 타들어 가는 극통이 밀려왔다. 코끝에서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었으나, 이내 입안 가득 비린 혈향이 고였다.
"마마! 또 피를…!"
서한주가 경악하여 이선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이선은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푸른빛을 띠며 초상적인 인지 영역으로 진입했다. '정밀 설계의 혜안'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우주의 운행과도 같은 기계적 질서가 이선의 시야에 투명하게 펼쳐졌다.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르고 날아오를 적 포탄의 궤적, 대포 내부에서 가스가 팽창하는 열역학적 흐름이 분자 단위의 선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선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적들의 명나라산 대포, 그 두꺼운 청동 포신의 하부였다.
포신 내부의 미세한 틈새가 혜안의 투시안에 걸려들었다. 그것은 1화에서 야철장의 무너진 가마 벽면을 조사할 때 발견했던, 고탄소강 정련 과정의 치명적인 결함과 완벽히 일치하는 미세 탄소 균열 구조였다.
'불순물이 섞인 주조 공정의 한계다. 겉은 단단해 보이나, 고열의 화약 가스가 팽창할 때 내부의 결정 격자가 버티지 못하고 미세하게 갈라지고 있어.'
조선의 제철 기술을 혁신하기 위해 밤낮으로 매달렸던 야금학적 지식이 뇌리를 스쳤다. 고탄소강을 정련할 때 탄소의 분포가 균일하지 못하면 인장 강도가 급격히 저하된다. 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명나라산 대포는 이미 두 번의 격발로 인해 포신 내부에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 균열이 극도로 누적된 상태였다.
"두칠아."
이선이 목구멍으로 끓어오르는 피를 삼키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예, 예! 마마!"
"우측 차륜의 구동 기어를 완전히 물리고, 차체를 좌측으로 정확히 이십이 도 회전시켜라. 궤도식 전면 장갑판을 비스듬히 눕혀 저들의 포선을 받아내야 한다."
"예? 장갑을 비스듬히 하라뇨? 정면으로 단단히 버텨야 포탄을 막지 않겠습니까?"
최두칠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조선의 상식으로는 방패란 자고로 적의 공격을 정면으로 굳건히 막아서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선은 현대 군사 공학의 기초인 '경사 장갑(Sloped Armour)'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수직으로 마주한 장갑판은 포탄의 운동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파괴되지만, 일정 각도로 기울어진 장갑판은 포탄의 충격력을 흘려보내고 도탄(跳彈)을 유도할 수 있다. 물리적인 두께를 늘리지 않고도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내 말을 믿어라. 이십이 도다. 단 일 분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당장 구동축을 돌려라!"
이선의 추상같은 호령에 최두칠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알겠사옵니다! 쇠 가죽을 당기듯이 돌리겠나이다!"
최두칠이 증기 압력 레버를 거칠게 젖히고, 수동 회전 핸들을 온 힘을 다해 돌렸다. 끄으으응- 하는 육중한 강철 마찰음과 함께, 증기 화차의 전면에 덧대어진 고탄소강 철갑판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적의 포신과 예각을 이루었다.
그 직후였다.
쾅-!
명나라산 대포가 불을 뿜었다. 육중한 쇠뇌 모양의 철환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대기를 찢으며 독산 보루를 향해 쇄도했다. 적 기마 대장은 마침내 가증스러운 대군의 철갑 마차가 고철 덩어리로 화할 것이라 확신하며 쾌재를 불렀다.
두구구구-!
포탄이 정확하게 증기 화차의 전면 장갑판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적들이 기대했던 굉음과 파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끼이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 비명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포탄이 이십이 도로 기울어진 강철 장갑판의 표면을 타고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경사면에 부딪힌 포탄은 그 무시무시한 운동 에너지를 상실한 채, 장갑판 표면에 길고 붉은 불꽃 궤적만을 남기고 하늘 위로 퉁겨 나가 버렸다. 도탄이었다.
"어… 어찌 저런 일이!"
언덕 아래에서 지켜보던 여진족 군관들과 조정의 변절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철환이 강철판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비껴 날아간 광경은 그들의 얕고 낡은 군사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인 이적(異蹟)이었다.
하지만 이선의 반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퉁겨 나간 쇳덩이는 이선이 혜안으로 계산한 궤적을 따라, 그대로 적들의 포진지 바로 옆 암석 지대에 격돌했다.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적의 포수들을 덮쳤다.
동시에 이선은 적 대포의 포신 미세 균열이 한계에 달했음을 간파했다. 방금 전 격발로 인해 발생한 고열과 내부 압력이 균열을 타고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서 선비."
이선이 피가 묻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적 대포의 포구 안쪽을 향해 신기전 화살을 집중 격발하라. 포신 내부의 열기를 자극해 폭발을 유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기포병들은 들으라! 적의 포구를 조준하여 일제 사격하라!"
서한주의 명과 함께, 증기 화차의 측면 포트가 열리며 공도회의 장인들이 급조한 신식 기포(氣砲)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화약 대신 고압 수증기의 힘으로 발사되는 철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피유우웅-! 피유웅!
수십 발의 강철 화살이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를 유린했다. 그중 한 발이 방금 격발을 마쳐 내부 가스가 가득 차 있던 적 포구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고압의 화살이 포신 내부의 균열을 강타한 순간, 팽창하던 고열의 가스가 균열을 찢고 밖으로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명나라산 대포의 포신이 사방으로 날카로운 파편을 뿌리며 폭발했다. 포진지를 지키고 있던 여진족 기마병들과 한양에서 파견된 비밀 포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화포의 잔해와 불길이 포진지 전체를 집어삼켰고, 화약 상자에 불이 옮겨붙으며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아아아악! 마귀다! 조선의 대군이 마귀의 군세를 부린다!"
여진족의 선봉 대장들이 일그러진 시체 더미 앞에서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자신들이 아끼던 최정예 기마대와 천금 같은 홍이포가 고작 단 한 대의 기괴한 강철 마차 앞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광경을 본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퇴각하라! 북방으로 퇴각하라!"
여진족 대군이 혼비백산하여 전면 퇴각선을 구축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흘린 붉은 피가 영흥의 차가운 흙바닥을 적셨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다!"
"공도회의 승리다! 대군 마마 만세!"
독산 보루 위에서 공도회 회원들과 조선의 수성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선은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뇌 신경의 과부하로 눈앞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매 안쪽을 더듬었다. 주상의 위례부 도장이 찍힌 무제한 비밀 군령 통행증의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아직 이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주야… 잔해를 수색하라."
이선이 핏물이 섞인 침을 뱉으며 지시했다.
"저들이 남긴 흔적 중에… 한양의 흔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서한주가 급히 공도회원들을 이끌고 불타는 적의 포진지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찾아낸 물건을 들고 돌아왔을 때, 보루 위의 공기조차 얼어붙었다.
서한주의 손에 들린 것은 검게 그을린 가죽 주머니였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한양 조정의 호조(戶曹)에서 사용하는 인장과 함께, 조잡하게 깎인 위조 엽전 주조 틀이었다.
"이것은…!"
서한주가 눈을 부릅떴다.
"야철장 창고 구석에 간작이 숨겨두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주조 틀이옵니다. 한양의 외척 민우식 일파가 마마께 위조 전폐 누명을 씌우려 했던 물증이, 어찌하여 이 여진족의 포진지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네."
이선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우리 증기 화차의 우회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이선은 품속에서 영흥 부윤의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수습했던 '구 군치 가도 지적도 유실본'을 꺼내 들었다.
"민우식 일파는 조선의 지적도에서 삭제된 이 옛 군사 도로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험난한 고지를 통해 증기 화차를 끌고 올라올 수 없으리라 확신했겠지. 자신들이 가진 낡은 지식의 한계가 곧 그들의 무덤이 된 것이다."
공도회 회원들은 마침내 모든 음모의 궤적을 깨달았다. 민우식은 여진족과 내통하여 대군을 북방에서 살해하고, 영흥의 제철 지대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한양에서는 위조 전폐 누명까지 조작하여 대군을 역모로 몰아가려 했다.
"참으로 잔악무도한 자들이옵니다. 어찌 조정의 대신이라는 자가 나라를 팔아 대군을 해하려 한단 말입니까!"
최두칠이 주먹을 쥐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때였다.
보루 아래의 가도에서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깃발을 앞세운 한 무리의 기마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해 왔다. 그들이 입은 의복은 북방의 변방 군사들이 아니었다. 한양 도성을 수호하는 국왕의 친위대, 금군(禁軍)의 복색이었다.
"도평대군은 들으라!"
금군의 선두에 선 사포(司捕) 한 명이 말 위에서 안장을 박차며 차가운 서찰을 들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승리의 기쁨 대신, 가혹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조정의 명을 받들어, 사사로이 군사를 모으고 불온한 기계를 제작하여 반역을 도모한 도평대군 이선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노라! 저 기괴한 쇠 마차가 바로 그 반역의 증거다!"
그의 손에 들린 서찰 밑바닥에는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한 조작된 참람죄 법률 조항이 붉은 인장과 함께 박혀 있었다.
사포들의 칼날이 일제히 이선을 향해 겨누어졌다. 완벽한 승리의 순간에 들이닥친, 한양 수구파의 마지막 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