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용흥관의 무너진 성문 틈새로 들이친 것은 단순한 외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방의 동토가 토해낸 검붉은 살기이자, 조선의 빈약한 변방 방어망을 비웃는 파멸의 기운이었다.

"성문이…… 무너졌다! 용흥관이 함락되었다!"

군졸들의 비명이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발겼다. 치솟는 화염은 영흥의 밤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고, 대지를 울리는 수만 마리 말발굽 소리는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선은 코끝으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혈경을 거칠게 훔쳐냈다. 뇌리각혈의 여파로 관자놀이가 터질 듯이 박동했으나, 그의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마!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아직 숨을 놓으실 때가 아닙니다!"

서한주가 이선의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며 외쳤다. 그의 손에는 흙먼지가 묻은 도면이 쥐어져 있었다. 이선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방금 전 완성된 웅장한 무쇠 가마—증기 구동 장갑차의 차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정밀 설계의 혜안'이 다시금 푸른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물질의 미세한 격자 구조가 유기적으로 얽히며 뇌리 속에서 완벽한 형상으로 재조립되었다.

‘탄소 함량 일 리(0.1%)의 차이가 사선(死線)을 가른다.’

이선은 일찍이 영흥 야철장의 거대한 가마 벽면에서 발견했던 미세한 탄소 균열 구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철이 식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응력의 불균형, 그리고 탄소 분자가 조밀하게 얽히지 못해 생기는 아주 작은 틈새가 결국 고압을 견디지 못하고 폭열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

그 원리를 깨달은 이선은 이번 증기 화차의 고압 실린더를 주조할 때, 탄소 함유량을 정확히 0.8%에서 1.2% 사이로 극미세 조율하도록 최두칠에게 명한 바 있었다. 주조 직후 급랭하지 않고 달궈진 모래 속에서 서서히 온도를 떨어뜨리는 서랭(徐冷)의 법식이야말로, 철 내부의 미세 균열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실린더의 압화 현상은 없다. 우주의 이치(理)는 오차를 허용하지 않으니."

이선이 차분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대군으로서의 엄숙한 기품과, 만물의 물리 법칙을 손에 쥔 선구자의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서 선비, 공도회원들을 소집하라. 가도를 따라 후방 퇴각 진지인 독산 보루로 이동한다."

"마마, 조정의 방어선이 무너진 마당에 사사로이 병기를 움직이시면 사대부들이 참람죄로 몰아세울 것입니다!"

"사대부의 붓끝이 여진의 철기보다 매섭다 한들, 나라가 망하면 그 붓을 쥘 손가락조차 남아나지 않는 법이다. 가자."

서한주는 이선의 단호한 안광에 압도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품 안에서 영흥 부윤이 버려두었던 옛 가도 지적도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찍이 관아의 서고 구석에서 수습했던, 북방 국경지대의 구루마용 구 군치 가도 지적도 유실본이었다.

"이 유실된 군치 가도를 통하면 조정의 감시망을 피해 무거운 쇠 가마를 가장 빠르게 독산 보루의 둔덕 위로 올릴 수 있습니다. 지형이 험하나 지반이 단단하여 증기 화차의 하중을 견딜 것입니다."

"좋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선과 서한주가 이끄는 공도회의 무리가 어둠을 틈타 험준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최두칠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온 힘을 다해 이선의 증기 화차를 밀고 당기며 비탈길을 올랐다.

그러나 독산 보루의 후방 퇴각 진지에 입성하는 순간,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무리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시오! 유배된 대군이 사사로이 괴이한 무쇠 가마와 무장한 천민들을 이끌고 군진에 들다니, 이는 명백한 모반이자 역모요!"

횃불 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찰단의 잔당이자, 외척 민우식의 심복인 감찰관 이덕필이었다. 그는 용흥관이 뚫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이선의 행보를 감시하고 올가미를 씌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덕필이라 하였느냐."

이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예리한 시선이 이덕필의 얼굴을 꿰뚫었다.

"나라의 국경이 무너져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늘, 너희는 여전히 한양의 세도가들이 던져준 고기뼈다귀를 물고 늘어지는구나. 참람이라 하였느냐? 역모라 하였느냐?"

"대군마마!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유배지에서 사사로이 화포와 기계를 제작한 것은 국법이 금하는 참람죄에 해당하며, 이는 즉시 참형에 처할 중죄입니다!"

이덕필이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군관들에게 손짓하려 했다.

이선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소맷자락 안에서 묵직한 무쇠 물건 하나를 꺼내 대리석 바닥에 던졌다.

쾅-!

둔탁한 쇠소리와 함께 굴러간 것은, 조잡하게 깎인 엽전 주조 틀이었다. 이덕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선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얼려버릴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야철장 구석에 네놈들이 몰래 숨겨두었던, 한양 조정식 위조 엽전 주조 틀이다. 너희는 내가 이 쓸모없는 쇳조각에 눈이 멀어 사사로이 전폐를 위조했다고 고변하려 했겠지. 그러나 이 주조 틀의 합금 성분과 거푸집의 정밀도는 호조의 극비 규격과 일치하더구나. 한양의 민우식 대감이 친히 하사한 물건이 아니라면, 변방의 간작들이 어찌 이리 정교한 조정을 흉내 낼 수 있겠느냐?"

"그, 그것이 무슨……!"

"이 위조 엽전 주조 틀은 내가 이미 조정에 보낼 상소문과 함께 밀봉해 두었다. 국난의 와중에 종친을 모함하기 위해 사사로이 전폐를 위조하고 군심을 어지럽힌 죄, 그 배후가 민우식 대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과연 주상전하께서 누구의 목을 먼저 치실 것 같으냐?"

이덕필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이선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든 민우식과 그 일파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법적 뇌관이었다.

"지금 당장 길을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여진의 칼날이 네 목을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이 위조 법전의 죄를 물어 네놈을 이곳에서 즉결 처형할 것이다."

이선의 서슬 퍼런 위엄에 군관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덕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이선의 기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마디의 논리로 조정의 음모를 완전히 박살 낸, 압도적인 사이다적 순간이었다.

"비, 비켜라……! 대군마마를 통과시켜라!"

이덕필의 굴욕적인 외침과 함께 퇴각 진지의 목책이 열렸다.

"최두칠! 증기 화차를 둔덕 위로 올려라!"

이선의 명령에 최두칠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이! 장인들은 들어라! 고정 고리를 단단히 박아라!"

쿠구구구구!

수천 근에 달하는 거대한 무쇠 가마, 조선 최초의 고압 증기식 회전 탄포 '증기 화차'가 둔덕 정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인들은 커다란 쇠망치를 휘둘러 화차의 사방에 설치된 안전 고정 고리(지주 닻)를 단단한 흙바닥과 암반에 박아 넣었다.

쾅! 쾅! 쾅!

쇠붙이가 부딪치는 웅장한 소리가 진지를 가득 채웠다. 고정 고리가 대지에 깊숙이 박히자, 증기 화차는 마치 대지와 일체가 된 듯 흔들림 없는 위용을 자랑했다.

현재 조선 조정의 방어 체계는 완전히 붕괴한 상태였다. 화약은 습기에 젖어 쓸모가 없었고, 전통 신기전은 발사대마저 소실되어 적의 철기대를 막아설 수단이 전무했다.

그러나 이선이 창조해낸 증기 화차는 달랐다.

그것은 화약의 폭발력이 아닌, 물이 끓어오르며 발생하는 고압의 증기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신개념의 병기였다. 또한, 들통나기 쉬운 검은 연기를 내뿜는 목탄 대신, 영흥의 풍부한 무연탄을 사용해 연기가 거의 나지 않는 연료 가열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었다.

이선은 증기 화차의 보일러실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정밀 설계의 혜안.’

그의 두뇌가 다시 한번 한계를 시험하듯 급격히 회전했다. 뇌 신경계가 미래의 고차원 물리 법칙과 동기화되면서, 이선의 목구멍으로 끈적한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컥……!"

이선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옷소매로 닦아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멈추지 않았다. 보일러 내부의 증기 압력은 현재 25기압. 연소실의 온도와 증기 도관의 팽창 한계를 분자 단위로 투시했다.

"압력이 과하다. 우측 조절 밸브를 미세하게 열어 압력을 22기압으로 유지하라. 급수 펌프의 순환 주기를 0.2초 늦춰라!"

이선의 정밀한 지시에 서한주가 재빠르게 밸브를 조절했다.

쉬이이이이—!

보일러 측면에서 가늘고 하얀 고압의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압력이 안정되었다. 화약의 매캐한 연기와 불꽃 대신, 오직 물과 불의 조화로 만들어진 순수한 열에너지가 무쇠 실린더 내부를 꽉 채웠다.

전통 신기전의 화력과 사거리를 아득히 초과하는, 무연탄 가열식 고압 증기 추진체. 회전 탄포의 포신 내부에는 정밀한 강선이 파여 있어, 탄환이 회전하며 엄청난 직진성과 파괴력을 지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온다……! 적들이 밀려옵니다!"

둔덕 아래를 감시하던 초병의 절규가 들렸다.

이선은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구—!

지평선 끝에서부터 거대한 검은 장막이 펼쳐지듯, 우량카이의 오천 철기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폭풍처럼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흉포한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온 천지를 뒤흔들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들판을 헤매던 조선의 유민들이 그들의 칼날 앞에 맥없이러지고 있었다.

여진족의 기마대장 아골타는 저 멀리 둔덕 위에 서 있는 기괴한 무쇠 가마를 발견하고 콧방귀를 꼈다.

"조선의 겁쟁이들이 기껏 가마솥 따위를 끌고 나와 우리를 막으려 하는구나! 짓밟아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그들의 눈에는 조선의 대군이 끌고 나온 기계 장치가 그저 오합지졸의 마지막 발악, 혹은 기이한 제례용 솥단지로 보일 뿐이었다.

여진 철기대가 둔덕을 향해 가속을 붙였다. 그들의 거리가 이백 보, 백오십 보로 좁혀졌다. 대지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마마! 적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최두칠이 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장인들은 긴장감에 손에 땀을 쥐었고, 서한주는 이선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이선의 입가가 가볍게 호선을 그렸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군진 전체를 울릴 만큼 또렷했다.

"우주의 이치를 담은 가마가, 너희 야만인들에게 하늘의 노여움을 보여줄 것이다."

이선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증기 밸브, 최대 개방!"

"밸브 개방—!"

최두칠이 고함을 지르며 거대한 무쇠 레버를 힘껏 잡아당겼다.

칙-!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둔덕 위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웅장한 가속 기계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증기 화차의 거대한 무쇠 몸체에서, 용의 숨결과도 같은 하얀 고압 증기가 사방으로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얗고 거대한 증기 장막이 순식간에 독산 보루 전체를 감싸 안으며,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인 위용을 완성했다.

그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우주의 법칙과 기계공학의 정수가 결합하여 탄생한, 조선의 새로운 신화였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증기 피스톤의 고동 소리와 대지를 뒤덮는 백색의 증기 폭풍.

맹렬하게 질주하던 여진 철기 오천 기는, 난생처음 듣는 기괴하고 웅장한 기계음과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용의 숨결 같은 증기 장막 앞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히히힝-!"

선두에 섰던 말들이 거칠게 앞다리를 들며 울부짖었다. 오천 기의 철기대가 증기 압력 가동포의 가속 기계음과 마주하기 불과 100보 직전,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일제히 멈춰 섰다.

여진족의 눈동자에 전례 없는 경악과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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