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령이 토해 낸 선혈이 야철장의 거친 흙바닥을 검붉게 물들였다. 요동의 매서운 북풍을 뚫고 달려온 군마는 거품을 물고 쓰러져 사지를 떨었고, 전령의 등에 박힌 여진족 특유의 거친 깃털 화살은 아직도 파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요동 너머…… 우량카이(兀良哈)의 약탈 대군이 국경 방벽을 허물었나이다! 기마 부대 수만 명이 이미 용흥관(龍興關)을 향해 남하하고 있사옵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영흥 야철장 위로 내려앉은 침묵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방금 전까지 대군 마마와 공도회를 연호하던 장인들과 민초들의 환호성은 찰나에 얼어붙었다. 조정의 감찰단이 들이닥쳤을 때의 긴장과는 궤를 달리하는, 날 것 그대로의 죽음의 공포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영흥 부윤 이석우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관복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으며 옆에 선 군관들을 돌아보았다.
"방벽이…… 방벽이 뚫렸다고? 변방의 정예병들은 대체 무엇을 하였기에 그 무지몽매한 오랑캐들의 말발굽을 막지 못했단 말이냐!"
"부윤 대감! 지금 책망을 하실 때가 아니옵니다!"
영흥 진관의 판관과 토병들을 거느린 군관 하나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환도 자루를 쥔 채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우량카이의 기동력은 바람과 같사옵니다. 용흥관이 무너지면 이곳 영흥까지는 단 이틀 길에 불과하옵니다. 관군의 수로는 그들의 철기(鐵騎)를 당해 낼 재간이 없사오니, 속히 읍성을 비우고 남쪽의 함흥이나 안변으로 몽진하셔야 하옵니다!"
"몽진이라니!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겠다는 말이냐!"
서한주가 서책을 쥔 손에 핏대를 세우며 도포 자락을 휘날렸다. 그의 눈에 분노의 안광이 떠돌았다.
"이곳 영흥은 북방의 요충지이자 만 개의 명줄이 얽힌 땅이거늘, 한 고을의 경비를 책임지는 장수라는 자가 적의 그림자도 보지 않고 퇴각을 논한단 말이냐! 이것이 조정의 녹을 먹는 자의 도리인가!"
"선비 놈이 어찌 전장의 무서움을 안다고 입을 놀리느냐!"
군관이 악에 받쳐 칼자루를 반쯤 뽑아 들며 포효했다.
"여진의 기마병들은 사람의 가죽을 벗겨 말안장을 꾸미는 악귀들이란 말이다! 우리 군관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들 저 성난 파도를 어찌 막겠느냐! 대군 마마, 속히 명을 내리소서. 이 유배지는 안전하지 않사옵니다!"
비겁함과 공포가 야철장을 잠식해 가던 그 순간, 이선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북방의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서는 수많은 톱니바퀴와 열역학 공식들이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피해망상에 가까운 그의 완벽주의적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도망친다? 조정의 감시를 받는 유배지 신분의 대군이 임지를 이탈하는 순간, 한양의 민우식을 비롯한 훈구 대신들은 즉각 '참람죄'와 '적전도주 및 반역'의 죄목을 씌워 자신을 멸문할 것이다. 도망은 죽음의 길이었다. 오직 이곳에서, 자신이 구축한 강철의 요새 속에서 적을 궤멸시키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방법이었다.
"입을 다물라."
이선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으나, 야철장의 소란을 단숨에 잠재울 만큼 엄숙한 격조가 실려 있었다. 장중한 사관의 기록처럼, 그의 안광은 흔들림이 없었다.
"군관은 칼을 거두라. 적이 오기도 전에 군심을 어지럽히는 자는 군법에 따라 참수함이 마땅하거늘, 내 한 번은 전령의 참상을 보아 참으리라."
이선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포졸들에게 결박당한 채 처분을 기다리던 형조참의 임준양의 앞으로 다가갔다. 임준양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흙바닥에 이마를 찧고 있었다.
이선이 가볍게 손짓하자, 최두칠이 야철장 창고 구석에서 흙먼지가 가득 묻은 가마니 하나를 거칠게 끌고 와 임준양의 발밑에 던졌다. 가마니가 터지며 그 안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철컥.
그것은 조잡하게 깎인 황동제의 주조 틀이었다. 언뜻 보아도 한양 조정에서 주조하는 엽전의 형태를 흉내 낸, 정교하지 못한 위조 조판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선의 나직한 질문에 임준양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했다.
"이것은 한양의 민우식이 보낸 간작(間作)이 야철장 창고 깊숙한 곳에 몰래 숨겨두었던 위조 엽전 주조 틀이다. 너희 감사단이 들이닥쳐 '대군이 사사로이 전폐를 위조하여 군자금을 모았다'며 역모로 몰아가기 위해 미리 안배해 둔 덫이었겠지."
"마, 마마! 그것은 소인이 계획한 것이 아니옵니다! 모두 정승 대감의 지시였을 뿐……!"
임준양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3화에서 간작의 은밀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보관해 두었던 이 위조 엽전 틀은, 이제 감사단의 목줄을 완벽히 죄는 무쇠 사슬이 되었다.
"임준양, 너는 이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선이 허리를 숙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 같았다.
"이 위조 주조 틀과 너희가 가공한 거짓 상소문을 들고 한양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겠느냐. 살고 싶다면, 조정에 보낼 장계에 똑바로 적어라. 영흥은 대군의 지휘 아래 굳건히 국경을 수호하고 있으며, 조정의 훈구 세력이 군수 지원을 고의로 지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그리하겠나이다! 쓰라면 백 번이고 쓰겠나이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임준양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서약했다. 배후의 실체를 폭로하는 고도의 역용술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선은 임준양을 옥사에 다시 가두라 명한 뒤, 마당에 모인 공도회 장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도회 장인들이여, 그리고 영흥의 백성들이여."
이선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야철장 전체로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조정은 우리를 버렸다. 저기 도망치려 하는 군관들의 눈을 보라. 저들은 너희의 처자식이 오랑캐의 칼날에 찢기는 동안 가장 먼저 말머리를 돌릴 자들이다.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 하늘의 이치는 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우리 손으로 달군 강철과, 우주의 법칙을 담아 도는 기계 장치뿐이다!"
이선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불화로를 열어라! 증기 엔진의 피스톤에 불을 지펴라! 오늘 밤부터 우리는 잠들지 않는다!"
"오오오오!"
순간, 도망치려던 고을의 군관들은 부끄러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었고, 천대받던 야철장의 장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각자의 자리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겁한 도망 대신, 강철과 증기의 포효로 대지를 채우겠다는 선언이었다. 석탄 가루가 날리고 화로의 불길이 대낮처럼 영흥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때, 야철장의 어둠을 틈타 한 사내가 그림자처럼 이선에게 접근했다. 사내의 품에는 국왕의 어인이 찍힌 밀서가 소중히 품어져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국왕 이진이 은밀히 파견한 극비 첩보관이었다.
"대군 마마, 주상 전하의 밀서이옵니다."
첩보관이 무릎을 꿇고 나지막이 아뢰었다. 이선은 밀서를 받아 펼쳤다. 서한에는 한양 조정의 급박한 정세가 담겨 있었다. 민우식을 기수로 한 훈구파가 북방의 전황을 고의로 왜곡하여 영흥에 대한 조정의 원군 지원을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차단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밀서의 가장 깊은 곳에는 뜻밖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황동으로 정교하게 주조된, 왕실 전용 위례부(衛禮部)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무제한 비밀 군령 통행증(通行牌)이었다.
'이것이 있으면 함경도의 모든 관군과 물자를 대군의 명으로 징발하고 통제할 수 있다…….'
이선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형 이진은 자신을 감시하면서도, 동시에 이 북방의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가 동생의 '기괴한 기계'에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판을 깔아준 것이다. 이선은 통행 패를 품속 깊은 곳에 갈무리했다.
"전하의 뜻을 받들겠노라."
이선이 첩보관을 물린 뒤, 즉시 최두칠과 서한주를 불러 모았다.
"최두칠, 서한주. 지금부터 우리는 적의 철기대를 분쇄할 '장갑 수송 가차(駕車)'를 제작한다."
"장갑 가차라 하심은…… 증기 엔진의 힘으로 바퀴를 굴려 움직이는 강철 수레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서한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다. 목재 판자로는 여진족의 강궁과 기습 폭약을 막아낼 수 없다. 차체 전체를 고탄소강의 장갑판으로 둘러싸야 한다. 적의 화살은 튕겨내고, 아군의 조총과 탄열 무기는 내부에서 안전하게 사격할 수 있는 움직이는 요새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마마,"
최두칠이 거친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한 두께의 강철판을 단시간에 주조해 내면, 쇠가 식는 과정에서 내부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적의 도끼나 폭약 한 방에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고 마옵니다. 저희 기술로는 그토록 단단하면서도 질긴 장갑판을 만들 재간이 없사옵니다."
"아니, 방법이 있다."
이선이 눈을 감았다. 머릿속의 동기화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 차가운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정밀 설계의 혜안, 기동.'
순간, 이선의 시야가 흑백으로 반전되며 물리적 세계의 장막이 걷혔다. 야철장의 타오르는 용광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물의 분자 운동이 열역학적 에너지의 흐름으로 치환되어 그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고차원적 물리 공학 지식이 가혹한 조선의 원시적 환경과 충돌하며 뇌 신경계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윽……!"
이선이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코와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와 은빛 도면에 얼룩을 남겼다. 수명을 깎아내는 신경 과부하의 고통이었다.
"마마!"
서한주가 비명을 지르며 이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이선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거칠게 닦아내면서도, 눈물 어린 눈으로 도면을 이선의 코앞으로 밀어붙였다.
"쓰러지지 마소서! 아직 도면의 수치가 완성되지 않았사옵니다! 마마께서 가르쳐 주신 이지의 세계가 눈앞에 있거늘, 여기서 멈추실 셈이옵니까!"
"하하…… 그래, 멈출 수 없지."
이선이 핏물이 섞인 침을 뱉어내며 눈을 부릅떴다. 혜안의 투시 속에서, 그는 1화에서 야철장 가마 벽면을 관찰했을 때 발견했던 미세한 탄소 균열 구조를 떠올렸다.
급격한 온도 변화가 철의 격자 구조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고탄소강 정련 시 탄소 함유량을 0.8%에서 1.2% 사이로 극도로 미세하게 조율해야만 경도와 인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우주의 이치(理).
"최두칠! 가마의 온도를 천이백도까지 끌어올려라! 쇳물을 부을 때 황토와 모래의 배합비를 1대 3으로 맞추고, 주조 직후 물에 담그지 말고 달궈진 모래 속에서 서서히 식혀라! 서랭(徐冷)의 과정을 거쳐야만 철 내부의 격자 구조가 안정되어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
"예, 예! 마마!"
최두칠은 이선의 광기 어린 지휘에 압도되어 망치를 치켜들었다.
이선은 피를 토하면서도 혜안의 시뮬레이션을 멈추지 않았다. 장갑판의 두께는 정확히 12밀리미터. 적의 철갑 화살이 충돌할 때 가해지는 충격 에너지를 분산시키기 위해 장갑판의 각도를 15도 경사지게 배치하는 비경사 장갑(Sloped Armor)의 원리를 도입했다.
"여기를 깎아라! 0.1푼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오차가 생기면 그 틈새로 적의 화살이 파고들 것이다!"
이선의 살벌한 외침에 장인들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쇳물을 붓고 망치질을 해댔다.
칙-! 콰아아아!
증기 펌프의 압축 실린더가 고압의 증기를 뿜어내며 마침내 완성된 장갑 가차의 차체를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철광의 빛을 발하는 강철의 괴수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선의 흙과 맨손에서 탄생한 최초의 증기 구동 장갑차였다.
그러나 승리의 감격을 누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영흥 유배지의 대지를 흔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저 멀리 북방의 국경선, 험준한 산맥 사이에 우뚝 솟아 있던 영흥의 천연 요새 용흥관 쪽에서 붉은 화염이 밤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올랐다.
쾅-!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수백 년 동안 국경을 지켜온 용흥관의 육중한 성문이 여진족 철기대가 준비한 기습 폭약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져 내렸다. 화면 너머로 처참한 불길이 타오르고, 변방의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환영이 이선의 혜안에 스치듯 지나갔다.
"성문이…… 성문이 뚫렸습니다!"
누군가의 절규가 밤하늘을 찢었다.
불타오르는 용흥관의 성문 너머로, 검은 연기를 뚫고 우량카이의 수만 철기대가 피에 굶주린 이빨을 드러내며 영흥을 향해 폭풍처럼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