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것은……!”
임준양의 턱관절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칼자루를 쥐고 있던 그의 손끝이 눈에 띄게 파르르 떨렸다.
대군 이선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 비단에 겹겹이 싸여 있던 작고 묵직한 마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으로 주조되어 가장자리에 정교한 매화무늬가 음각된, 조정의 감찰단 조장조차 사사로이 지닐 수 없는 밀령의 신표(信標)였다.
그 신표의 중앙에는 뚜렷하게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우(宇)’
조정의 영의정이자 외척의 거두인 민우식의 사가(私家)에서 오직 가신들에게만 내리는 비밀 신표였다. 왕실의 공적인 감찰을 수행해야 할 특별 감사단의 우두머리가, 조정의 공문이 아닌 권세가의 사사로운 밀령을 품고 내려왔음을 증명하는 가장 명백한 낙인이었다.
이선은 한 걸음 더 내딛으며 신표를 임준양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의 안광에는 상대의 영혼마저 꿰뚫어 볼 듯한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형조참의 임준양. 그대는 주상의 교지를 받들어 영흥의 역모를 밝히러 온 감사관인가, 아니면 일개 세도가의 가신이 되어 사사로이 대군을 도륙하러 온 자객인가?”
“이, 이것은 모함이오! 그것이 어찌 내 품에서 나왔단 말이오! 저놈들이 나를 음해하려 슬그머니 찔러 넣은 것이 분명하거늘!”
임준양의 음성이 갈라지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관아의 포졸들과 감사단의 군사들 사이에서 동요의 빛이 역력히 일어났다. 국법을 집행하러 온 관리의 품에서 세도가의 사사로운 신표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 감찰 자체가 조정의 공적인 행사가 아닌 사적인 청탁과 음모에 불과하다는 산증거였기 때문이다.
이선은 임준양의 비명을 가볍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야철장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야장 최두칠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보냈다.
“두칠아. 창고 구석, 세 번째 궤짝 밑바닥을 뜯어내어라. 그곳에 숨겨져 있던 ‘진짜’ 물건을 가져오너라.”
“예, 예! 대군 마마!”
최두칠이 번개같이 몸을 날려 야철장 한구석의 창고로 뛰어 들어갔다. 철저한 비밀주의자인 이선이 영흥에 은밀히 발을 들인 간작(間作)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삼십 일 전부터 숨겨두게 했던 또 다른 위조 엽전 주조 틀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최두칠이 흙먼지가 잔뜩 묻은 거친 무쇠 틀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뛰어왔다.
두 개의 주조 틀이 영흥 야철장의 붉은 쇳물 불빛 아래 나란히 놓였다. 하나는 임준양이 ‘현장 증거’라며 석탄 더미에서 캐낸 조잡한 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선이 미리 확보해 둔 간작의 진짜 위조 틀이었다.
이선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신경계가 요동치며 전생의 고차원 기계공학적 지식이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정밀 설계의 혜안(慧眼).’
순간, 극심한 과부하가 이선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두통이 뇌리를 찢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비린 혈경(血經)이 치밀어 올랐다. 이선은 어금니를 악물며 입 안으로 고인 검붉은 피를 삼켰다. 장포 소매 아래로 들어간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의 겉모습은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는 이 권능을 쓸 때마다 이선의 가슴속에는 역모의 누명으로 멸문당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피해망상과 이를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완벽주의적 투지가 동시에 솟구쳤다.
이선의 시야에 두 주조 틀의 미세한 분자 구조가 투시되어 들어왔다. 열역학적 에너지의 흐름과 금속 합금비의 차이가 투명한 형상으로 뇌리에 그려졌다.
“자,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은 똑똑히 보아라.”
이선이 두 개의 주조 틀을 가리키며 낭랑한 목소리로 공표했다.
“임 참의가 가져온 저 조잡한 틀과, 내가 미리 확보해 둔 간작의 틀은 외형상 비슷해 보일 것이다. 하나 그 내부의 야금(冶金) 성정은 완전히 다르다.”
이선은 먼저 임준양이 가져온 틀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둔탁하고 탁한 무쇠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이 야철장 가마는 본 대군이 한양의 고루한 주조법을 타파하고, 고탄소강을 정련하기 위해 특수하게 설계한 곳이다. 내 일찍이 가마 벽면의 아주 미세한 탄소 균열 구조를 분석하여, 쇳물이 식을 때 발생하는 압화 현상을 막는 특수 합금비를 찾아내었느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영흥 야철장만이 지닌 고탄소강 정련의 비결이다.”
야장 최두칠의 눈이 광적인 경외감으로 빛났다. 대군이 언급한 미세 탄소 균열의 제어는 오직 신의 손끝에서만 가능한 영역이라 여겼던 기술이었다.
“그러나 보아라!”
이선이 임준양의 위조 틀을 들어 올렸다.
“이 틀의 자철석 함량은 턱없이 낮고, 잡철과 모래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야철장의 고온 정련로에 이 따위 조악한 쇳물을 부었다간, 식기도 전에 내부 탄소 배율의 불일치로 인해 스스로 균열이 가며 박살이 났을 것이다. 즉, 이 틀은 우리 영흥의 용광로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한양의 천박한 쇠붙이다!”
임준양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선은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 틀을 구워낼 때 사용한 흙이다. 이 흙은 평안도나 함경도의 거친 사토가 아니다. 오직 한양 조정의 공조(工曹) 주전소와 세도가의 사가 주조소에서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경기도 광주산 특수 고령토(高嶺土)다. 고령토의 미세한 점성과 열팽창 계수는 북방의 흙과 완전히 다르다. 또한, 이 틀의 측면을 보라.”
이선이 틀의 모서리에 새겨진 미세한 호형(弧形) 흔적을 손톱으로 긁었다.
“이것은 회전하는 기어(Gear) 장치를 이용해 거푸집을 압착할 때 발생하는 한양 공조 특유의 기계 흔적이다. 영흥에는 이러한 압착 기계를 소유한 장인이 없으며, 오직 한양 도성의 대형 주전소만이 이 기구를 다룬다. 즉, 이 위조 틀은 민우식의 사저에 있는 사사로운 주조소에서 제조되어, 감사단의 짐짝에 실려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 이 무슨 황당무계한 궤변이란 말이냐! 과학이니 야금이니 하는 요설로 국법을 기만하려 들지 마라!”
임준양이 최후의 발악을 하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이미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려 의복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 야철장 입구에서 장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궤변이 아니외다, 임 참의.”
흰 도포를 단정히 차려입은 유생 서한주가 영흥 부윤 이석우를 대동하고 군사들의 포위망을 뚫으며 걸어 들어왔다. 서한주의 눈에는 성리학의 공허한 말장난을 넘어, 우주의 실질적인 이치(理)를 기계와 물질로 증명해 낸 대군의 혜안에 대한 깊은 경탄이 서려 있었다.
서한주가 조정의 감사단을 향해 명분론의 방패를 치켜세웠다.
“주자학에서 이르기를, 이는 기의 주재요 기는 이의 그릇이라 하였습니다. 대군 마마께서 밝히신 철물의 성정과 흙의 기운은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만물의 이치를 실증한 학문이외다. 임 참의는 어찌 우주의 이치마저 부정하며 사사로운 음모로 왕실의 종친을 해하려 하십니까?”
영흥 부윤 이석우 역시 굳건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의 손에는 영흥 고을의 호적대장과 관청의 공식 인장이 들려 있었다.
“본 관할의 부윤으로서 선포하노라. 감사단은 조정의 합법적인 사찰 절차를 무시하고, 사사로운 권세가의 밀령을 받들어 영흥의 신성한 야철지를 무단 침범하였다. 이는 명백한 국법 위반이며, 왕실의 권위를 찬탈하려 한 불법 행동이다. 영흥의 포졸들은 무엇을 하느냐! 즉시 저 무단 침입자들을 포위하라!”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이선이 제시한 기술적, 법리적 증거와 서한주의 학문적 대의, 그리고 영흥 부윤의 행정적 권위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감사단을 옥죄었다.
“이럴 수가…… 우리가 도리어 역도가 된단 말인가?”
임준양의 뒤에 서 있던 감사단의 포졸들이 무기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임준양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마마, 대군 마마! 살려주십시오! 저는 오직 영의정 대감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결국 임준양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오만한 기색은 간데없고, 오열과 함께 흙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자비를 구하는 가련한 처지로 전락했다. 음모로 대군을 죽이려 법리를 들이대던 자들이, 대군의 초상적인 야금학 지식과 철저한 빌드업 앞에 스스로 자멸한 순간이었다.
이선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속내에서는 이미 다음 단계의 정밀한 설계가 완료되어 있었다. 이들을 여기서 단순히 죽이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조정의 왕권을 쥐고 있는 형 이진의 신뢰를 합법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는, 이 가련한 사냥개들을 역용해야 했다.
“너희를 여기서 참형에 처하는 것은 국법의 엄숙함을 더럽히는 일이다.”
이선이 장포를 펄럭이며 선언했다.
“너희를 영흥의 지하 옥사에 유폐할 것이다. 단, 일주일 동안이다.”
임준양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유, 유폐라 하심은……?”
“그동안 너희는 내가 작성한 ‘기계론적 신유학 논문’의 사본을 필사하게 될 것이다. 기계야말로 우주의 이치를 형상화한 도구임을 증명하는 상소문이다. 너희는 이 논문을 들고 한양으로 올라가, 주상 전하께 직접 상주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한 자라도 어긋나거나 중간에 도망칠 생각을 한다면, 너희 품에서 나온 민우식의 밀령 신표와 이 위조 엽전 틀의 실체가 조정 천하에 폭로될 것이다. 그리되면 너희 삼족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임을 명심하라.”
이것은 완벽한 덫이었다. 임준양과 감사단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이선이 주장하는 ‘기계론적 신유학’의 전령사가 되어 한양 조정에 이선의 혁신을 합법화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민우식의 이념 공세를 그의 심복들의 손으로 직접 무력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역용술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사오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임준양을 비롯한 감찰관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포졸들이 그들을 결박하여 영흥 관아의 지하 옥사로 끌고 가자, 야철장 마당에는 승리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군 마마 만세!”
“공도회 만세!”
장인들과 백성들이 이선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이선의 곁에 선 서한주와 최두칠의 얼굴에도 깊은 안도와 긍지가 서려 있었다. 영흥의 제철 기지는 이제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라, 조선 최초의 합법적 기술 혁명의 성지로 거듭날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러나 이선은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도 웃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특유의 완벽주의적 경계심과 피해망상은 여전히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하나의 위기가 지나가면, 반드시 더 큰 폭풍이 몰려오는 법이었다.
그때였다.
투두둑, 투두둑.
야철지 가도 너머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가 정막을 깨고 들려왔다. 단순한 관아의 전령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군마의 거친 숨소리와 다급한 쇠북 소리가 영흥의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피투성이가 된 변방의 수색대 전령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며 야철장 마당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의 등에는 여진족의 깃털 화살이 거꾸로 박혀 있었고, 갑옷 틈새로 붉은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 보고드립니다……!”
전령이 피를 토하며 이석우 부윤과 이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로 뒤덮여 있었다.
“요동 너머…… 여진족의 약탈 대군이…… 국경 방벽을 허물고…… 기마 부대 수만 명이 영흥을 향해 남하하고 있습니다! 이미 국경 가도가 돌파당했습니다!”
순간, 야철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선의 시선이 전령의 핏빛 가득한 손을 지나, 저 멀리 붉게 물들어가는 북방의 하늘을 향했다. 조선의 존망을 뒤흔들 피바람이, 그가 창조해 낸 강철 기계들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대지를 뒤흔들며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