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스스로 목을 매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군, 계 선생."

어둠을 찢고 흘러나온 서진의 나직한 음성에, 계승우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서버실 내부를 가득 채운 수백 대의 냉각 팬이 뿜어내는 거대한 금속성 고주파 소음 속에서도, 서진의 목소리는 고막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계승우의 눈동자가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마스터 보안 USB를 뽑아내려 손을 뻗는 찰나,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서진의 손이 그의 오른목을 무자비하게 낚아챘다.

철컥.

"아악!"

계승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진의 손아귀는 단순한 완력이 아니었다. 요골 신경과 척골 신경이 교차하는 요충지를 정확히 압박하는 손길이었다. 마치 펜치를 조이듯 파고드는 지독한 압박감에 계승우의 오른팔 전체가 마비된 듯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서진은 다른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스마트폰의 액정을 계승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파란색 LED 불빛을 받아 번뜩이는 액정 위에는, 방금 전까지 계승우가 타이핑했던 텍스트와 마우스 커서의 궤적이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었다.

[Key-Log Active: 'Yoo Jun-woo' -> 'Modify Order' -> 'Change Drug: Heparin to 10x Dose']

"이, 이거 놔! 이 미친 자식이……!"

계승우가 이를 악물고 발버둥 쳤지만, 서진의 손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진의 손가락 끝이 계승우의 손목 안쪽, 신문혈(神門穴)을 강하게 누르자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며 그의 무릎이 꺾였다.

"헤파린 투여량을 열 배로 늘린다라."

서진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못해 서늘했다.

"뇌저동맥류 클리핑 수술을 마친 소아 환자에게 헤파린을 기준치의 열 배로 주입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허울뿐인 전문의라 하더라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헤파린은 혈액 응고를 막는 강력한 항응고제다. 미세한 균열을 막아둔 뇌혈관에 이 약물이 과다 투여되는 것은, 약해진 제방의 수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는 것과 같다. 환아의 뇌 속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멈추지 않는 유혈의 바다로 변할 것이고, 결국 출혈성 뇌졸중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성공한 수술을 처방 실수라는 유치한 칼날로 난도질하려는 수작이었다.

"처방 오더 조작을 통한 의료 과실 유도. 그리고 그 책임을 온전히 집도의인 내게 지우려는 속셈이겠지."

"무, 무슨 소리야! 난 그냥…… 처방 시스템에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려던 것뿐이야! 이거 놓지 못해?"

계승우가 붉어진 얼굴로 악을 썼다. 하지만 그의 비명은 서버실의 육중한 방화문 너머로 흘러나가지 못했다.

그때, 닫혀 있던 방화문이 조용히 열리며 또 하나의 그림자가 걸어 들어왔다. 신경외과 전문의 한채원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에는 깊은 경악과 실망이 서려 있었다.

"계승우 선생……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한채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준우 환자는 겨우 고비를 넘긴 아이예요. 의사로서 어떻게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이런 조작을……!"

"한, 한 과장님! 이건 오해입니다! 저 자식이 날 협박하는 거예요!"

계승우가 매달리듯 소리쳤지만, 한채원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외면했다. 이미 서진의 스마트폰에 기록된 실시간 키 로그와 화면 녹화 데이터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존재하고 있었다.

서진은 계승우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서서히 풀었다. 물리적인 구속을 풀었음에도, 계승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감히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전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진은 품 안에서 빳빳하게 접힌 마닐라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주저앉은 계승우의 무릎 위로 툭 던졌다.

"궁중의 어두운 구석에서는 늘 이런 일이 일어났지."

서진이 낮게 읊조렸다.

"주군의 안위를 위해 사냥개를 사지로 몰고, 일이 틀어지면 가장 먼저 그 사냥개의 목을 잘라 제단에 바치는 일 말이다."

계승우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세인대학병원 기획조정실의 공식 로고가 박힌 서류가 들어 있었다.

`[세인대학병원 기획조정실 - 내부 감사 보고서: 소아 외과 레지던트 계승우의 단독 마약류 유출 및 처방 오더 오입력 건]`

그 보고서의 상세 내역을 읽어 내려가던 계승우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확장되었다.

"이, 이게…… 이게 왜 여기에……?"

"민태구 실장이 작성한 내부 결재 초안이다."

서진이 계승우를 내려다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더군. 너의 학술적 열등감과 개인적인 일탈로 인해 처방이 조작되었으며, 펜타닐 앰플 유출 역시 네가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결론이지. 기획조정실은 병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너를 즉각 파면하고 형사 고발 조치하겠다는 권고안까지 친절하게 첨부되어 있더군."

"거짓말이야! 삼촌이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계승우의 서늘한 비명이 서버실의 차가운 금속 벽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위조라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기획조정실 마스터 서버에 등록된 결재 문서 번호 '기조-202X-0947'을 지금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아라. 민태구 실장의 자필 서명과 전자 직인이 찍힌 엄연한 진본이다."

이미 서진은 장영식 교수와의 연대를 통해 기획조정실 내부망의 일부 권한을 우회 확보해 둔 상태였다. 민태구는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인물이다. 백서진을 매장하려는 공작이 만에 하나 실패하거나 외부로 폭로될 경우, 모든 책임을 조카인 계승우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꼬리를 자르기 위한 '비상용 방책'을 이미 수립해 두었던 것이다.

권력의 생리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사냥개를 부리지만, 사냥이 끝나면 솥에 넣어 삶는 법이다.

"삼촌을 위해…… 내가 어떻게 했는데……."

계승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자신이 절대적인 구원자이자 동반자라 믿었던 친삼촌 민태구가, 자신을 언제든 내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채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처음 서진이 서버실로 향할 때, 그저 사적인 복수나 적의 파멸만을 바라는 잔혹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정교한 심리전을 보며, 그녀는 깊은 전율을 느꼈다.

서진의 눈빛에는 사사로운 증오가 없었다. 오직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부패한 종양을 완벽하게 도려내겠다는 집도의의 차갑고 고독한 이성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저 조작의 거대한 몸통인 민태구를 잡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며 적의 내부를 붕괴시키는 책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전율과 동시에, 서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이 썩어빠진 병원 정치의 판을 뒤흔들 수 있는 자는 오직 이 사내뿐이라는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계 선생."

서진이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계승우의 턱을 구두 끝으로 툭 쳤다. 계승우가 초점 없는 눈으로 서진을 올려다보았다.

"살고 싶은가?"

"……."

"네가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사냥개의 이빨을 주인의 목덜미로 돌려라."

계승우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배신감과 두려움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자신은 마약 유출범이자 환자를 죽이려 한 살인미수범으로 낙인찍혀 의사 면허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갈 터였다. 삼촌은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 나한테……."

계승우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개인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숨겨진 클라우드 폴더를 열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야…… 삼촌이 나한테 지시한 것들, 전부 혹시 몰라서 녹음해 뒀어. 날 버릴 때를 대비해서……."

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익숙하고 오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민태구 기획조정실장의 목소리였다.

[- 승우야, 이번 한 번만 백서진 그 건방진 놈을 처리하면 소아외과 수석 자리는 네 거다. 펜타닐 건은 내 선에서 보안팀을 움직여 완벽히 덮어줄 테니 지시대로 움직여. 실패하면? 난 널 도울 방법이 없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

서버실 내부에 흐르던 민태구의 음성은 명백한 교사 및 직권남용의 증거였다.

서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훌륭하군."

서진은 계승우의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 데이터를 자신의 기기로 전송했다.

"이것으로 네 목숨줄은 내 손에 쥐어졌다. 만약 조금이라도 딴마음을 먹는다면, 이 녹취와 방금 전의 키 로그 데이터는 즉각 보건복지부와 검찰로 송부될 것이다."

"하,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면허만은…… 의사 면허만은 살려줘……."

계승우가 서진의 가운 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서진은 그의 손을 무정하게 쳐내며 차갑게 돌아섰다.

"내일 아침, 네 주인이 판을 벌일 것이다. 그때 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짖으라고 할 때 짖고, 물라고 할 때 삼촌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

서진은 가운을 휘날리며 서버실을 나섰다. 한채원이 그 뒤를 따랐고, 홀로 남겨진 계승우는 차가운 서버 장비들의 푸른 불빛 아래서 처량하게 몸을 웅크렸다.

* * *

다음 날 아침 8시.

세인대학병원 전체가 이른 아침부터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본관 로비의 대형 모니터는 물론, 전 병동의 게시판과 인트라넷 시스템에 붉은색 글씨로 작성된 공고문이 일제히 송신된 것이다.

`[긴급 고지: 소아외과 백서진 전공의의 무면허 의료 행위 및 마약류 관리법 위반 혐의에 따른 영구 출교 및 형사 고발 심의 긴급 청문회 소집의 건]`

"이게 무슨 일이야? 백서진 선생이 마약을 밀반입했다고?"

"유 의원 손자 수술도 무단으로 집도한 거라는데? 완전히 미친 거 아니야?"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웅성거렸다. 민태구가 설계한 덫이 마침내 그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것이다. 병원장과 이사회의 권력을 등에 업은 기획조정실이 백서진을 단숨에 매장하기 위해 소집한 단심제(單審制) 청문회였다.

서진은 정형외과 병동 복도 끝에 서서, 벽에 붙은 청문회 고지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 장영식 교수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준비는 끝났나, 백 선생?"

장영식의 목소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민태구의 칼날은 예리했고, 이번 청문회는 사실상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고요하여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적이 판을 짜두었으니, 들어가서 그 판을 깨부수어야지요."

서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기맥 투안의 잔여 과부하로 인한 물리적인 떨림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의 안광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여주지요. 이 병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서진은 긴 복도를 지나, 기획조정실 대회의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승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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