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 하급 놈이 더는 전산망에 접속하지 못하게 EMR 비밀번호를 즉시 소급 변경하고 서버를 완전히 격리해라. 내 허가 없이는 단 한 바이트의 데이터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묶어버려."

어두컴컴한 VIP 병동 복도 끝, 비상구의 두꺼운 철문 뒤에서 민태구 기획조정실장의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전산실장의 다급한 대답이 들려오자, 민태구는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의 손끝이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렸다.

그의 지시는 즉각적인 실행으로 이어졌다. 세인대학병원 본관 지하 2층에 위치한 전산실 메인 서버실에서는 이미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환자 정보가 담긴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의 백본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치익―"

서버 랙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공조 바람 사이로, 백서진의 계정을 차단하고 신경외과와 소아외과 서버를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격리 프로세스가 기동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 백서진의 손발을 묶으려는 기득권의 차가운 사슬이었다.

하지만 그 시각, 신경외과 의국 구석에 앉아 있던 백서진의 눈동자는 이미 그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다.

"웅―"

서진의 주머니 속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그가 꺼내 든 스마트폰 화면에는 허가되지 않은 시스템 변경 시도를 감지하는 전산 모니터링 스크립트가 기동해 있었다. 화면 위로 붉은색 로그 텍스트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Warning: Unauthorized configuration change detected on Server Node-NEURO.] [Target IP: 10.105.2.14 (Planning & Coordination Dept.)] [Access Privilege: Administrator Override applied.]

민태구가 내린 격리 명령의 실시간 경로가 고스란히 추적되고 있었다. 서진은 이미 며칠 전, 병원 전산망의 취약점을 분석해 이중 조인(Double-Joined)된 모니터링 스크립트를 은밀히 매설해 둔 상태였다. 적들이 자신을 가두기 위해 성문을 닫는 순간, 오히려 그 성문이 닫히는 궤적을 통해 적들의 사적인 침투 경로를 역추적하는 덫이었다.

'어리석군.'

서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전생의 조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던 훈구파의 무리 역시 이와 같았다. 그들은 법과 제도를 자신들의 전유물이라 여겼으나, 법이라는 것은 결국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덫을 밟는 자의 목을 죄는 도구에 불과하다.

"윽……."

순간, 서진은 오른손으로 우측 안구를 감싸 쥐었다.

'기맥 투안'의 과도한 사용이 남긴 대가였다. 안구가 뒤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안통이 뇌리를 찔렀다. 망막 뒤쪽의 미세 혈관들이 급격히 수축하며 시야의 절반이 암전되는 현상. 그와 동시에 오른팔 전체로 찌릿한 마비감이 번져 나갔다. 손끝이 제멋대로 떨려왔다. 침을 쥐고 메스를 잡아야 할 의원의 손이 통제력을 잃어가는 감각은, 전생에 황제를 지키지 못했던 깊은 심연의 공포를 자극했다.

"백 선생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즉시 떨리는 오른손을 가운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표정을 지웠다.

들어온 사람은 신경외과 전문의 한채원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보온병과 소독용 알코올 스왑, 그리고 강력한 알코올 향이 풍기는 손 소독 탈취제가 들려 있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수술 후에 바이탈 체크하러 갔다가 불이 켜져 있기에 와봤어요."

한채원은 서진의 굳어 있는 안색과 붉게 충혈된 우측 눈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다가와 책상 위에 보온병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쌉싸름하면서도 따뜻한 쑥 향이 의국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이거 마셔요. 쑥차예요. 혈액 순환이랑 미세 신경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집에서 우려왔어요. 그리고……."

그녀는 손 소독 탈취제를 서진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주머니 속 오른손을 흘낏 보았다.

"수술실에서 손 떨리던 거,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아무리 천재라도 인간의 몸이에요. 무리하게 신경을 쓰면 말초 신경에 과부하가 걸리는 법이죠. 일시적인 허혈성 증상일 테니, 억지로 버티지 말고 이거 쓰면서 손 마사지라도 하세요."

그녀의 말투는 짐짓 퉁명스러웠으나, 그 안에는 깊은 염려와 의학적 동반자로서의 신뢰가 담겨 있었다. 서진의 기계 같은 완벽함 뒤에 숨겨진 육체적 한계를 눈치채고도, 그것을 약점으로 잡는 대신 지탱해주려는 배려였다.

서진은 보온병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생의 내의원에서 탕약을 달이며 맡았던 약초의 향이 겹쳐 흘렀다. 철저한 기계가 되어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하려 했던 그의 방어기제가, 아주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켰다.

서진은 주머니에서 천천히 오른손을 꺼냈다.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보온병을 쥐었다.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마비된 감각을 조금씩 깨워냈다.

"……고맙소."

서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평소의 날 선 존댓말이 아닌, 전생의 어조가 섞인 나직한 혼잣말이었다. 그의 입가에 아주 잠깐, 스치듯 미미한 미소가 머물렀다. 한채원은 그 생경한 모습에 잠시 멍하니 서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무리하지 말라는 소리예요. 유준우 환아는 방금 전 중환자실에서 완전한 안정을 찾았으니까요."

"환자의 생사는 이미 집도하는 순간 결정된 것입니다. 사후 관리는 그저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는 과정일 뿐이지요."

차가운 어조로 돌아온 서진은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켜고, 혜민재학 카르텔이 관리하는 VIP 환자들의 임상 원격 데이터를 띄웠다.

"하지만, 이 궤도를 강제로 이탈시키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채원이 한 걸음 다가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세인대학병원 특별 병동 '천수각'에 입원 중인 유력 정재계 인사들의 뇌혈관 조영술(TFCA) 영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서진의 우측 안구가 기맥 투안의 잔상을 머금고 다시금 미세하게 푸른빛을 띠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VIP들의 뇌정맥 구조는 기묘할 정도로 일관된 병리적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들의 미세 혈관을 보십시오. 혈전이 형성되는 위치가 일반적인 혈류 역학적 흐름과 정반대입니다."

서진의 손가락이 화면 속 미세 뇌동맥의 분기점을 짚었다.

"일반적인 뇌혈전은 혈류가 정체되는 만곡부나 분기점에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환자들의 미세 혈전증(Microthrombosis)은 압력이 가장 높은 직경 100마이크로미터 이하의 소동맥 내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관찰되고 있습니다. 마치 의도적으로 혈관 내피세포를 자극해 혈소판을 응집시킨 것처럼 말입니다."

"이건…… 자연 발생적인 병변이 아니에요."

한채원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전문의로서 그녀 역시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바를 즉시 이해했다.

"특정 합성 펩타이드나 미승인 항혈소판 촉진제가 체내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인위적 혈관 손상 패턴입니다. 혜민재학은 자신들이 독점 개발 중이라는 신약의 효능을 입증하기 위해, 혹은 VIP들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약물 의존성을 만들기 위해 이 가짜 임상 약물을 투여해 온 것입니다."

"미친 짓이에요……! 이건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살인 청부나 다름없잖아요!"

"의술을 권력의 시녀로 삼은 자들이 부리는 흔한 기예일 뿐입니다."

서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가운 안쪽에서 낡은 가죽 침구 파우치를 꺼냈다. 파우치를 열자, 그 안에서 유독 이질적인 금속 광택을 내뿜는 물건이 나타났다.

세부 규격이 미세하게 다른, 마이크로 성형 봉합용 불량 바늘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흘린 꼬리 중 하나지요."

서진은 바늘의 허리에 아주 미세하게 각인된 로트 번호를 손톱 끝으로 가리켰다.

"로트 번호 'SU-4105-B'. 계승우가 지난 수술에서 내 도구 상자에 섞어놓았던 불량 바늘입니다. 일반적인 마이크로 바늘보다 인장 강도가 15% 낮게 제작되어, 미세 혈관 봉합 시 뇌조직 안에서 부러지도록 설계된 물건이지요."

"이걸 아직도 가지고 계셨어요?"

"적의 목을 벨 칼날을 굳이 버릴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서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 바늘의 발주처를 추적한 결과, 병원 기획조정실의 특별 예산 항목으로 등록된 혜민재학 소속의 유령 유통사였습니다. 계승우가 이 바늘을 사용해 수술 실패를 유도하려 했다는 사실과, 그 배후에 민태구 실장이 있다는 명백한 물증이지요. 이제 이 불량 바늘의 로트 번호는 계승우의 목을 옭아맬 가장 완벽한 올가미가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의국 벽면에 설치된 원내 전산 상태 모니터에 황색 경고등이 들어왔다.

"삐― 삐―"

날카로운 기계음이 침묵을 깨뜨렸다. 서진의 스마트폰 화면 위로 실시간 위치 추적 로그가 새롭게 업데이트되었다.

[Alert: Access detected from Central Server Room (B2).] [User Credential: Dr. Kye Seung-woo (Surgeon ID: 90214).] [Target File: Patient 'Yoo Jun-woo' - Post-operative Nursing & Direct Order Logs.]

한채원이 화면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계승우……? 이 시간에 왜 지하 중앙 서버실에 있는 거죠? 게다가 준우의 사후 간호 기록에 접근하고 있어요!"

"사냥감이 덫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중입니다."

서진은 담담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오른손 떨림은 이미 한채원이 준 쑥차의 온기와 지압 덕분에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퇴출 직전에 몰린 계승우는 민태구의 암묵적인 지시를 받고 마지막 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서진이 완벽하게 끝마친 소아 환자 유준우의 사후 간호 기록과 투약 오더를 소급 조작하여, 마치 서진이 수술 후 치명적인 약품을 잘못 처방한 것처럼 위장하려는 음모였다. EMR 시스템이 물리적으로 격리된 지금이 기록을 조작할 유일한 기회라고 믿었으리라.

"가시지요. 적이 스스로 파놓은 무덤에 흙을 덮어줄 시간입니다."

서진은 가운을 휘날리며 의국 문을 나섰다. 한채원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 * *

지하 2층, 중앙 서버실로 향하는 복도는 차가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오직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만이 주기적으로 깜빡이며 미세한 고주파 소음을 내고 있었다.

"웅웅웅웅―"

두꺼운 방화문 너머로 수백 대의 서버가 뿜어내는 거대한 열기와 팬 소음이 복도까지 진동하고 있었다.

계승우는 땀에 젖은 손으로 관리자용 보안 카드를 리더기에 접촉했다.

"띠리릭―"

문이 열리자, 파란색 LED 불빛이 가득한 기계의 숲이 드러났다. 계승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가장 안쪽에 위치한 메인 콘솔 데스크로 다가갔다. 그의 호흡은 가빴고, 눈동자는 불안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만 조작하면 끝난다. 삼촌이 전산망을 완전히 격리했으니, 지금 여기서 수정하는 기록은 외부 로그에 남지 않아. 백서진…… 네놈이 아무리 천재라도, 환자의 사후 약물 처방 오더가 바뀐다면 의료 과실을 피할 수 없을 거다.'

계승우는 품 안에서 민태구 실장에게 양도받은 마스터 보안 USB 키를 꺼냈다. 승인받지 않은 비공식 보안 키가 콘솔의 USB 포트에 삽입되는 순간, 시스템 화면에 관리자 권한을 우회하는 특수 프로그램이 구동되었다.

"타닥, 타다닥!"

계승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유준우의 환자 등록 번호를 입력하고, 집도의 백서진의 처방 내역을 수정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메인 서버실의 차가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등 뒤, 어둠 속에서 백서진이 조용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서진이 쥐고 있던 스마트폰의 검은 액정 위로, 계승우가 타이핑하는 모든 텍스트와 입력 값, 심지어 마우스 커서의 좌표까지 실시간으로 재구성되어 한 자 한 자 완벽하게 기록되기 시작했다.

[Key-Log Active: 'Yoo Jun-woo' -> 'Modify Order' -> 'Change Drug: Heparin to 10x Dose']

서진은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내리누르며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스스로 목을 매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군, 계 선생."

어둠을 찢고 흘러나온 서진의 나직한 음성에, 계승우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