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 기록이 없어졌다고 하셨습니까?"
대회의실의 웅성거림을 단숨에 찢고 나간 것은 지독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였다.
백서진은 들고 있던 태블릿 화면을 대형 프로젝터에 페어링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화면을 터치하는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스우우웅-*
빔프로젝터가 켜지며 백색 광선이 대회의실 전면의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 눈부신 빛 속에서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대비된 데이터 스트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끄음, 윽……!"
바닥에 쓰러진 기획조정실장 민태구는 가슴을 움켜쥔 채 밭은 신음을 뱉어냈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은 이미 산소 부족으로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우관상동맥의 임계 폐색. 심장 근육으로 가야 할 혈류가 꽉 막힌 수도관처럼 멈춰 서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이사진은 쓰러진 민태구와 대형 스크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갈팡질팡했다.
"이, 이게 무슨……." "저 화면에 뜨는 게 대체 뭡니까?"
서진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세인대학병원 메인 서버의 실시간 데이터 트래픽 로그입니다. 원본 데이터는 한 번 생성되면 지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지워진 것처럼 보이도록 인덱스 테이블을 바꿀 뿐이지요. 책장 맨 앞의 목차 페이지를 찢어버린다고 해서, 책 속의 내용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화면 중앙에 붉은색 경고 박스가 점멸하기 시작했다.
[접속 IP: 10.110.4.152] [접속 ID: gye_sw09 (외과 레지던트 계승우)] [작업 내용: 환아 유준우 EMR(전문의료기록) 마취제 투여량 데이터 강제 수정 및 원본 로그 감춤 처리]
"어…… 어?"
참관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계승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건…… 이건 조작이야!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 내 계정을 도용한 거라고요!"
계승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얇게 찢어지며 회의실 천장을 때렸다.
"도용이라."
서진이 태블릿의 화면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두었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어두운 전산실 내부의 CCTV 영상이 재생되었다. 화면 우측 하단에 표시된 타임스탬프는 정확히 마약류 관리법 위반 혐의로 감사팀이 서진의 사물함을 습격하기 두 시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CCTV 화면 속의 인물은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며 전산실 단말기에 로그인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누군가의 실시간 지시를 받으며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화면 속 인물이 고개를 들었을 때, 카메라 렌즈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잡혔다.
계승우였다.
"전산실 출입 기록과 CCTV는 기획조정실의 보안 등급으로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영역이지요. 병원장 직속의 보안팀 협조를 받아 실시간으로 백업해 둔 원본입니다."
서진의 음성은 서늘했다.
"계승우 선생. 당신이 전산실 단말기를 조작하던 바로 그 시각, 당신의 스마트폰 수신 발신 기록 역시 기조실장실과 정확히 일치하더군요. 통신사에 등록된 기지국 위치 정보까지 대조를 마쳤습니다."
"이, 이 개자식이……!"
계승우가 서진을 향해 달려들려 했으나, 옆에 있던 보안요원들이 그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아 제지했다.
"이봐, 계승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민 실장이 시켜서 한 짓인가?"
감사팀장과 이사진의 날카로운 질문들이 비수처럼 계승우에게 꽂혔다.
그 시각, 바닥에 쓰러진 민태구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의 호흡은 거칠고 불규칙하게 변해갔다. *커헉, 컥…….*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탁한 숨소리가 회의실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마치 낡은 벨로우즈 펌프가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였다.
서진은 우측 안구에 가해지는 극심한 안통을 견뎠다. 기맥 투안을 가동한 대가였다. 망막 뒤쪽의 미세 혈관들이 과도한 부하로 인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오른팔 역시 마비 증세가 올라와 가운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이 굳어갔다.
하지만 서진은 주머니 속에서 불량 마이크로 성형 봉합용 바늘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자극하자, 일시적으로 마비가 풀리며 감각이 돌아왔다.
환자의 생사를 쥐고 뒤흔드는 이 짜릿한 지배욕. 전생의 구중궁궐 속에서 수많은 정적을 침 끝 하나로 주무르던 그 감각이 현대의 수술실과 청문회장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콰르릉!*
대회의실의 무거운 이중 마호가니 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두 비키시오!"
우렁찬 호통 소리와 함께 장영식 교수가 보좌관들을 대동하고 회의실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편으로 수십 명의 인파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어깨에 거대한 방송용 카메라를 멘 기자들과 수첩을 든 취재진, 그리고 보건복지부 특별조사팀의 파란색 재킷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장 교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기는 사내 징계위원회……."
징계위원장이 당황하여 소리쳤지만, 장영식은 단상 위에 놓인 마이크를 움켜쥐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내 징계위원회가 아니라, 국가적 의료 범죄 현장입니다!"
장영식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기자들이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사방에서 터지는 백색의 섬광이 회의실을 대낮처럼 밝혀냈다.
"보건복지부 의료정밀조사단과 검찰 특수부의 합동 수사가 개시되었습니다!"
장영식이 스크린에 띄워진 조작 로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세인대학병원 기획조정실은 그동안 혜민재학 카르텔의 불법 임상시험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환자의 진료기록을 조작해 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백서진 레지던트는 그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 스스로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뭐라고요?"
기자들이 일제히 속보를 송출하기 시작했다. 태블릿과 노트북을 두드리는 자판 소리가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속보: 세인대병원, 조직적 진료기록 조작 정황 포착] [보건복지부, 혜민재학 카르텔 전격 압수수색 개시] [민태구 기조실장, 청문회 도중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실시간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하는 기사들을 보며 이사진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민태구는 이미 산소마스크를 쓴 채 응급의학과 의료진에 의해 들것으로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의 감겨진 눈꺼풀 아래로 희미한 황달의 기운이 비쳤다. 신약 복용의 부작용으로 간이 완전히 망가졌음을 증명하는 징후였다. 서진은 실려 나가는 그의 맥상을 투안으로 읽어냈다.
'다음은 네 차례다, 민태구.'
서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계승우가 기어와 서진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백, 백 선생……! 제발, 제발 한 번만 살려줘. 다 삼촌이 시킨 짓이야!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계승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기득권의 오만함은 간데없고, 오직 파멸의 공포에 질린 나약한 인간의 형상만이 남겨져 있었다.
서진은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한 무감각한 시선이었다.
"계승우 선생."
서진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환자를 바둑돌로 쓴 대가다."
"어……?"
"의원이 환자의 생명을 자신의 안위를 위한 도구로 삼는 순간, 이미 의원으로서의 목숨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지. 네 손으로 조작한 그 데이터가 결국 네 목줄을 죄는 밧줄이 되었으니, 인과응보가 아니겠느냐."
서진은 냉정하게 계승우의 손을 뿌리쳤다.
"경찰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다. 가서 네가 지은 죄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거라."
"백서진! 이 독한 놈! 네가 그러고도 의사야? 네가 인간이냐고!"
뒤에서 들려오는 계승우의 절규를 뒤로한 채, 서진은 가운 깃을 정리하며 유유히 대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우측 안구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시야가 맑아졌다. 장영식 교수가 보좌관들과 함께 서진의 뒤를 따랐다.
"백 선생, 정말 대단하군. 자네가 심어둔 전산 추적 로그가 아니었다면 복지부 특조팀을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진입시키지 못했을 걸세."
장영식의 얼굴에 오랜만에 깊은 미소가 번졌다.
"이제 민태구의 카르텔은 완전히 끝장났네. 병원 이사회도 더는 혜민재학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못할 거야."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장 교수님."
서진이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잡초는 뿌리까지 완전히 뽑아내야 다시 돋아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들의 발걸음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건물 외벽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상공에서 들려왔다. 단순한 헬기의 소리가 아니었다. 군용 수송 헬기나 대형 구급 헬기에서나 들릴 법한 거대한 프로펠러의 마찰음이었다.
동시에 서진의 품속에 있던 무선 호출기가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삐---! 삐---! 삐---!*
화면에 붉은색 글씨로 긴급 재난 코드가 떠올랐다.
[CODE RED: 제1특별수술실 '천수각' 긴급 호출] [환자: 윤창선 (세인재단 명예이사장)] [증상: 급성 뇌지주막하 출혈 및 뇌기맥 대파열 임박]
서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윤창선.
세인대학병원의 최대 주주이자, 대한민국 정재계를 막후에서 주무르는 살아있는 거물.
민태구가 몰락하기 직전, 최후의 카드로 쥐고 흔들려 했던 권력의 심장이 지금 멈추기 직전의 상태로 병원 옥상 헬리패드에 내려앉고 있었다.
*위이이잉-!*
옥상으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붉은색 비상 경보등이 복도를 피처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을 향해 상승하는 동안에도 콘크리트 벽면을 뚫고 들어오는 프로펠러 소리는 점점 더 고막을 찢을 듯이 커졌다.
"윤창선 회장이라니……."
장영식 교수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평소 어떤 위기 앞에서도 태산처럼 묵직하던 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일고 있었다.
"혜민재학 재단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자, 세인대학병원의 설립 지분을 통째로 쥐고 있는 거물일세. 청와대 정무수석조차 그의 눈치를 살핀다는 소문이 돌 정도지. 민태구가 저지른 온갖 불법 임상시험과 비자금 조성조차 이 노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야."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야겠군요."
서진이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응시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가 죽으면 민태구의 카르텔은 꼬리 자르기로 끝날 겁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난다면,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자가 이 병원의 모든 권력을 지배하게 되겠지요."
"백 선생,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띵—*
경고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숨이 막힐 정도의 강풍이 불어닥쳤다. 옥상 헬리패드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붉은색과 청색의 비상 경광등이 밤하늘을 어지럽게 수놓았고, 대형 구급 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탄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키세요! 어시스트 대기하고, 펜타닐과 마니톨 미리 확보해!"
헬기 해치가 열리며 들것이 밀려 나왔다. 환자의 머리맡에는 인공호흡기를 연신 압박하고 있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과, 사색이 된 채 수액 백을 높이 치켜든 사복 차림의 수행원들이 엉켜 있었다.
서진은 단숨에 들것 앞으로 접근했다.
환자 윤창선은 여든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골격이 장대했으나, 지금은 그저 인공호흡기에 생명을 의지한 채 축 늘어진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의 얼굴은 산소 부족으로 인해 거무죽죽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마의 굵은 정맥들이 터질 듯이 팽창해 있었다.
"환자 바이탈 어떻게 됩니까?"
서진이 강풍을 뚫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GCS(글래스고 혼수 척도) 3점! 양측 동공 크기 부동(Anisocoria)에 대광반사 소실되었습니다! 5분 전 이송 중에 한 차례 호흡 정지가 와서 삽관 진행했습니다!"
구급 대원의 다급한 외침에 장영식이 입술을 깨물었다.
"뇌탈출(Herniation)이 시작되었군. 지주막하 공간에 차오른 피가 뇌간을 누르고 있어. 이대로 수술실로 가도 이송 도중에 심정지가 올 걸세!"
서진은 지체하지 않고 오른손을 뻗어 윤창선의 목덜미를 짚었다. 경동맥의 박동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동시에 서진의 우측 안구가 붉게 충혈되며, 동공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천연색의 줄기들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뇌기맥 투안(腦氣脈 透眼).*
세상의 소음이 한순간에 멀어지며 윤창선의 두개골 내부가 3차원 입체 영상처럼 투명하게 드러났다.
뇌저부의 전교통동맥(Anterior Communicating Artery) 부근에 주먹만 한 크기로 부풀어 오른 뇌동맥류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얇은 비닐봉지에 고압의 물을 가득 채워둔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외벽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붉은 기맥의 독소들이 뿜어져 나와 뇌척수액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수도관의 원선이 터져 지하실에 물이 차오르는 형국. 이대로 가다간 뇌압이 수축기 혈압을 넘어서는 순간, 뇌로 가는 혈류 자체가 완전히 차단되어 즉사하게 된다.
'시간이 없다.'
수술실까지의 이동 시간은 최소 3분. 하지만 윤창선의 뇌는 단 1분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악, 윽……!"
투안을 유지하는 순간, 서진의 머릿속으로 송곳을 비벼 넣는 듯한 극심한 안통이 들이쳤다. 전두엽의 신경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과부하. 그의 오른팔 전체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가며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서진은 주머니 속에서 불량 마이크로 바늘을 움켜쥐었다. 바늘끝이 손바닥의 연부 조직을 깊숙이 파고들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날카로운 침습적 통증이 뇌의 통각 경로를 교란하자, 기적적으로 손끝의 미세 마비가 일시적으로 억제되었다.
"이동 침대 멈춰 세우십시오."
서진이 차갑게 명령했다.
"뭐라고요? 지금 1초가 급한 상황인데 여기서 멈추라니!"
수행 비서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서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금빛 배지가 번쩍였다.
"당신 누구야? 일개 레지던트 주제에 회장님 몸에 손대지 마! 당장 신경외과 과장 불러와!"
"비키십시오."
서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과장을 부르는 동안 환자는 사망합니다. 지금 뇌실 내부의 압력을 즉각 낮추지 않으면, 수술대 위에 눕히기도 전에 뇌사 상태에 빠질 겁니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이 건방진 놈이 어디서……!"
"비키라고 하지 않았나!"
장영식 교수가 비서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내며 소리쳤다.
"이 친구는 세인병원에서 뇌동맥류 클리핑을 가장 완벽하게 집도하는 백서진 선생이다! 환자를 살리고 싶다면 아가리 닥치고 뒤로 물러서!"
장영식의 기백에 비서가 주춤하는 사이, 서진은 이미 윤창선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 교수님, 14G(게이지) 카테터 침 두 개와 생리식염수 주십시오."
"옥상에서 뇌실 천자(Ventricular Puncture)를 하겠다는 건가? 무균 시설도 없는 곳에서 이건 미친 짓이네!"
"뇌막염으로 죽는 것보다, 뇌탈출로 1분 뒤에 죽는 게 더 빠릅니다. 도구를 주십시오."
서진의 망설임 없는 눈빛을 마주한 장영식은 침묵했다. 그는 즉시 응급 카트에서 굵은 카테터 바늘을 꺼내 서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진은 윤창선의 정수리에서 약간 우측으로 비껴간 지점, 즉 '코흐 점(Kocher's point)'을 손가락 끝으로 짚어냈다. 머리카락을 깎을 시간조차 없었다.
투안을 통해 뇌실의 위치와 최단 경로가 천연색 기맥으로 실시간 매핑되었다.
'두개골의 두께는 7밀리미터. 전두동을 피해 측뇌실 전각(Anterior horn of lateral ventricle)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5.5센티미터.'
보통의 의사라면 CT나 MRI 장비 없이 맨눈으로 감히 찌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조금이라도 각도가 틀어지면 운동 신경을 관장하는 내포(Internal capsule)를 관통해 영구적인 반신마비를 유발하거나, 대뇌 정맥을 건드려 치명적인 대출혈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서진에게 현대의 카테터 바늘은 전생의 은침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내부 관이 뚫려 있어 기와 혈을 방출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신물(神물)이었다.
서진이 카테터 바늘을 쥐고 윤창선의 전두부에 위치를 잡았다. 그의 떨리던 손끝은 바늘을 쥐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백 선생……."
지켜보던 장영식마저 숨을 죽였다.
*서걱.*
바늘이 두피를 뚫고 들어갔다. 서진은 손끝의 미세 운동 감각을 극대화했다. 뼈의 단단한 저항감이 바늘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서진은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회전력을 주며 두개골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들었다. 마치 단단한 암반 사이에 숨겨진 수맥을 찾아가는 기수(技手)처럼, 그의 바늘은 뇌의 미세한 고랑(Sulcus)을 따라 저항 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툭.*
미세한 저항의 소실.
정확히 측뇌실 전각에 바늘이 도달한 순간이었다.
서진이 철심을 뽑아내자, 카테터의 투명한 튜브를 통해 검붉은 뇌척수액과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어……!"
수행원들과 응급의학과 의료진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압으로 갇혀 있던 뇌척수액이 방출되자마자, 모니터의 혈압 수치가 210에서 150으로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대광반사가 돌아오며 윤창선의 수축되어 있던 동공이 서서히 정상 크기로 돌아왔다.
"바이탈 안정화됩니다! 맥박 정상 범주로 진입!"
"성공이야…… 맨손으로 뇌실 천자를 성공시켰어!"
장영식이 흥분하여 소리쳤지만, 서진은 카테터를 고정하며 냉정하게 지시했다.
"뇌실 배액관 유지한 채로 즉시 제1특별수술실 천수각으로 이송합니다. 한채원 선생에게 연락해 하이브리드 수술대와 미세 현미경 세팅하라고 하십시오."
서진이 몸을 일으켰다. 우측 안구에서 핏물이 한 방울 흘러내려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손바닥에는 바늘에 찔린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가운을 붉게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가시지요. 세인병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줄 때가 되었습니다."
들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로 다시 밀려 들어갔다.
***
제1특별수술실 '천수각'의 자동문이 열렸다.
수술실 내부는 이미 한채원을 비롯한 정예 간호 인력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초정밀 미세 수술 로봇과 하이브리드 수술대의 금속성 광택이 무영등 아래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서진 선생! 환자 상태는?"
한채원이 멸균 가운을 입은 채 다급히 다가왔다. 서진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상처를 본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서진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뇌실 천자로 임시 감압은 마쳤습니다. 하지만 전교통동맥의 뇌동맥류가 다시 터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즉시 개두술(Craniotomy) 및 동맥류 결찰술(Clipping) 들어갑니다."
서진이 멸균 세척대로 향하며 손을 씻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솔로 손을 문지르는 마찰음이 수술실의 긴장감을 더했다.
그때, 수술실의 인터콤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술실 내부의 의료진은 즉시 집도를 중단하십시오. 반복합니다. 즉시 집도를 중단하십시오.]
수술실 유리창 너머의 참관석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중심에는 민태구 기조실장의 최측근이자 병원 이사회의 실세인 부원장 송민우가 서 있었다.
[백서진 레지던트. 당신은 현재 마약류 관리법 위반 및 무면허 의료 행위 혐의로 징계위원회에서 직무 정지 처분이 내려진 상태요. 또한 윤창선 회장님의 수술은 본원 신경외과 과장단과 외부 초빙 권위자가 집도하기로 이사회에서 결정했소. 당장 수술실에서 퇴실하시오!]
참관석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송민우의 목소리는 탐욕스럽고도 단호했다. 민태구가 쓰러진 틈을 타, 윤창선 회장의 생명줄을 자신들이 장악하겠다는 노골적인 정치적 야욕이었다.
수술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채원과 간호사들이 서진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했다. 이사회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의사 면허 박탈을 의미했다.
서진은 젖은 손을 멸균 타월로 천천히 닦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참관석 유리창 너머의 송민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전생의 궁중에서 수많은 역모를 진압하던 어의의 살벌한 기백이 서려 있었다.
"송 부원장님."
서진이 마이크를 켜고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수술실 내부의 모든 기계 소음을 압도할 정도로 차분하고 무거웠다.
"이 환자의 뇌동맥류는 앞으로 정확히 7분 뒤에 대파열을 일으킬 겁니다. 내가 이 수술실을 나가는 순간, 윤창선 회장은 사망합니다. 그리고……."
서진이 유리창에 바짝 다가섰다.
"그 사망의 법적, 정치적 책임은 집도를 방해한 송 부원장님과 이사회에 귀속될 것입니다. 내가 작성한 실시간 환자 상태 기록과 뇌실 천자 데이터는 이미 보건복지부 특조팀과 검찰에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으니까요."
[뭐, 뭐야……?]
송민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환자를 살려 내 절대의권을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의 얄팍한 권력 싸움의 제물로 바쳐 파멸할 것인가."
서진이 손가락 끝으로 메스를 가리켰다.
"선택하십시오. 시간은 이제 6분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