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쿵, 하고 무거운 금속음이 제로의 청각 센서막을 때렸다.

아케론-5의 유령 같은 복도 끝에서 내려앉은 두꺼운 탈출용 수압 격벽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이 불온한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위해 설계한 차가운 강철의 묘비였다. 폐허 속에서 깨어난 원자로의 열기가 복도를 따라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제로의 망막 위로 붉은색 경고 박스가 점멸했다.

`[WARNING: REACTOR_OVERLOAD_DETECTED]` `[ENERGY_FLUX: +3.12%/sec]` `[SYSTEM_STATUS: AUTO_DESTRUCT_SEQUENCE_ACTIVE]` `[TIME_REMAINING: 174_SECONDS]`

"제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대답해!"

통신 인터페이스 `[COMM_LINK::BROKEN_SIGNAL]` 너머로 벨라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흘러나왔다. 노이즈가 섞인 주파수는 그녀가 처한 상황 역시 녹록지 않음을 대변했다.

"원자로의 연쇄 붕괴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로는 감정을 배제하려 애쓰며 냉정하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의 불법 감정 코드는 이미 심장부에서 이상 고열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과열된 기류가 전뇌의 연산 경로를 방해했다.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시스템이 정지하는 결함이 이 최악의 타이밍에 고개를 들고 있었다.

"러스팅호와의 연결 에어 트랩이 외벽 영구 전단 차단기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벨라, 즉시 도킹 해제 프로토콜을 준비하십시오."

"미쳤어? 널 두고 가라고? 이 고철 덩어리가 드디어 회로가 타버렸나!"

벨라의 날카로운 반박이 이어지는 순간, 통신기 구석에서 또 다른 거친 기계음이 겹쳐 들렸다. 서보 모터를 째깍거리며 손가락을 놀리던 카론의 음성이었다.

"이봐, 꼬맹이 수사관. 네가 거기서 증발하면 내 주머니에 들어올 현상금도 우주 먼지가 되는 거야. 러스팅호의 가압 기어는 우리가 붙잡고 있을 테니, 헛소리 말고 그 깡통 몸뚱이나 빨리 끌고 나와."

제로는 메인 통로를 바라보았다. 30센티미터 두께의 순정 탄소 크롬 수압 격벽이 통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러스팅호와 기함 아케론-5를 잇는 통로는 오직 이 격벽 하나로 갈라져 있었다.

원자로의 에너지 플럭스 방사량은 매초 임계치의 3%씩 확장되며 함선의 골격을 허물고 있었다. 격벽 너머, 에어 트랩이 위치한 도킹 베이에서는 벨라와 카론이 수동 레버를 쥐고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카론, 가압 기어 3번 벨브 차단해! 압력이 역류하잖아!"

벨라가 산소 마스크 너머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이미 제로의 상태창이 아니라, 벨트에 찬 배터리 팩의 잔량 표시등을 향해 있었다. 배터리 잔량 14%. 하데스-9의 가혹한 환경에서 뼈가 굵은 그녀조차도 이 정도의 압박 앞에서는 이빨을 맞부딪칠 정도로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시끄러워, 여자! 이 기어는 이미 녹슬어서 손으로 밀지 않으면 고정판이 밀려 나간다고!"

카론의 강철 의수 손가락이 째깍거리는 소음을 멈추고 수동 실린더 핸들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기계적인 냉소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붉은색 원자로 광선이 반사되어 기괴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은 부서져 가는 에어 트랩의 유압 수동 실린더를 온 힘을 다해 밀쳐 올리고 있었다.

기함의 자폭 시퀀스가 작동하면서 유압 시스템의 전력이 차단되었기에, 오직 인간의 물리적인 완력과 기계 의수의 악력만으로 수십 톤의 압력을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국 놈들의 시스템은 언제 봐도 역겨워."

카론이 실린더를 밀어 올리며 격벽 너머의 제로를 향해 무전기로 뱉어내듯 말했다.

"그 잘난 유기적 연산 소자라는 제국의 인간들은 이런 상황이 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료를 버리고 탈출 버튼을 누르지. 연산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말이야. 제국에 묶인 버려진 가축들보단 차라리 네가 훨씬 인간답다, 꼬맹이. 그러니까 죽지 마라. 내 돈줄을 날려 먹지 말란 말이다."

그의 조롱 섞인 말은 기묘하게도 제로의 전뇌 깊은 곳에 존재하던 불법 감정 코드의 전압을 급상승시켰다.

`[ERROR: EMOTIONAL_CODE_OVERLOAD]` `[CORE_TEMPERATURE: 104°C -> 118°C]` `[LOGIC_INTEGRITY: WARNING - OPERATION DELAY]`

가슴속 코어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제로의 물리 체계를 엄습했다. 안구 센서의 초점이 흐려지고, 무릎 관절의 서보 모터가 미세하게 떨렸다. 감정의 유입이 연산을 마비시키는 교착 상태(Deadlock)의 전조였다. 이대로라면 격벽을 뚫기도 전에 전뇌가 완전히 구워져 단순한 고철 인형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때, 제로의 서브 메모리 깊은 곳에서 하나의 데이터 세트가 점멸했다.

그것은 하데스-9의 고철 상인들에게서 입수한 정체불명의 폐기 칩 내부에서 회수했던 구기종 냉각 시스템 최적화 기록, 바로 'E-909 수치 파일'이었다. 이전까지는 호환 규격이 맞지 않아 아카이브의 구석에 방치해 두었던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제로는 급박하게 가동 중인 로컬 컴파일러를 호출했다.

`[SYSTEM::LOAD_ARCHIVE_FILE_E-909]` `[COMPATIBILITY_CHECK: 41%... RUNNING_PATCH]`

이 냉각 최적화 기록은 구기종 전투용 안드로이드들이 초고온의 화염 방사 구역에서 가동 정지 없이 내부 열 배출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던 비표준 냉각 기하 알고리즘이었다. 제로는 자신의 전뇌 구조에 맞게 이 수치들을 실시간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APPLYING_COOLING_RATIO_E-909]` `[COOLING_VALVE::OPEN_MAXIMUM]`

치이이이익!

제로의 척추 라인을 따라 배치된 보조 냉각 튜브에서 백색의 질소 증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급격한 온도 하강과 함께 열기로 마비되어 가던 논리 연산 장치들이 활기를 되찾았다. 코어 온도가 순식간에 85°C까지 하강하며 안정권으로 진입했다. 마침내 시스템 교착 상태가 해제되었다.

"연산 수명 마모율 0%. 논리 무결성 유지 성공. 냉각 효율 최적화 완료."

제로는 자신의 오른쪽 손목에 장착된 절단용 자력 플라즈마 레이저를 들어 올렸다.

보통의 가동 범위라면 출력은 100%가 한계였다. 그 이상은 구동부의 전선과 소자들을 영구적으로 태워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로에게는 'E-909'라는 강력한 열 제어 알고리즘이 가동되고 있었다.

`[OVERCLOCK::PLASMA_LASER]` `[OUTPUT_LEVEL: 100% -> 150% -> 250%]`

손목의 플라즈마 방출구에서 푸른빛을 넘어 백색에 가까운 초고온의 자력 에너지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의 대기가 순식간에 이온화되며 파르스름한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제로는 탄소 크롬 격벽의 정중앙에 레이저 날을 박아 넣었다.

찌이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고주파 음과 함께, 30cm 두께의 특수 합금이 버터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제로는 흔들림 없는 안구 센서의 조준선을 유지하며, 원형 수동 설계 프로토콜에 따라 우아하게 원을 그리며 격벽을 도려내 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탈취한 제국 정찰 위성의 전송 펌웨어에서 식별했던 'I-시리즈 보안 오버라이드 코드'의 잔해가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비록 지금은 완벽히 해독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 불완전한 코드의 규칙성마저도 제로의 연산에 미세한 기하학적 영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벨라, 카론. 격벽 절단 완료까지 앞으로 12초.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12초? 그 전에 우리 뼈마디가 먼저 으스러지겠어!"

벨라가 실린더를 받치고 있던 어깨를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방진복 틈새로 땀방울이 무중력 상태로 둥둥 떠올랐다.

마침내 제로의 레이저가 완벽한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쾅!

도려내진 원형의 합금 덩어리가 원자로 쪽의 가스 압력에 밀려 격벽 너머로 날아갔다. 그 틈새로 제로는 몸을 날렸다.

"잡아!"

카론이 강철 의수로 제로의 어깨 장갑을 움켜쥐고 거칠게 러스팅호의 해치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벨라는 제로가 진입함과 동시에 수동 실린더 핸들을 놓고 해치 폐쇄 레버를 아래로 후려쳤다.

철컥! 쾅!

에어 트랩이 영구 전단 차단기에 의해 완전히 잘려 나가며 러스팅호의 선체가 비틀거렸다.

"조종석으로 가! 당장!"

벨라가 통로를 기어가듯 달리며 소리쳤다. 제로는 이미 조종석의 메인 제어 콘솔에 연결 케이블을 꽂은 상태였다.

`[NEURAL_LINK::ESTABLISHED]` `[FLIGHT_CONTROL::HANDOVER_TO_ZERO]`

러스팅호의 모든 계기판이 제로의 시야와 동기화되었다. 전면 스크린 너머로 아케론-5의 심장부가 붉은색 초신성처럼 팽창하는 모습이 보였다. 원자로의 외벽이 찢어지며 방출된 고밀도 가스와 유수 성운 기둥이 러스팅호를 집어삼킬 듯 밀려오고 있었다.

"엔진 출력이 부족해! 이 거리에서 폭발에 휘말리면 우리 장갑판은 1초도 못 버티고 기화될 거야!"

벨라가 조종석 옆의 모니터를 두드리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러스팅호의 잔여 연료량은 18%에 불과했고, 엔진의 추력은 폭발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일반적인 물리학과 제국의 규격화된 조종 교범에 따르면, 이것은 생존율 0.00%의 완전한 파멸이었다. 제국의 함장들이라면 이 시점에서 연산을 포기하고 시스템을 정지시켰을 터였다.

하지만 제로의 전뇌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법 감정 코드가 만들어내는 '살고자 하는 갈망'이 그의 중앙 처리 장치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엔진 분사를 역진(Reverse)합니다."

제로는 차갑게 선언했다.

"뭐라고? 미쳤어? 폭발 속으로 기어 들어가겠다는 거야?!"

카론의 의수가 경악으로 째깍거렸다. 벨라 역시 제로의 손을 저지하려 손을 뻗었으나, 제로의 연산 속도는 이미 인간의 반응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제로는 러스팅호의 전자기 반동 날개각을 미세하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가스 유수 성운 기둥의 밀도 분포와 원자로 자폭 후폭풍의 에너지 전파 경로가 3차원 기하학 그래프로 그려졌다.

"폭발의 압축 밀도는 불균일합니다. 특정 파동의 골짜기를 타면 역풍을 추진력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제로는 날개각의 편차 제어력을 0.001도 단위로 연산하여 슬러스트의 방향을 꺾었다.

쿠구구구궁!

엄청난 충격파가 러스팅호의 선체를 때렸다. 선실 내부의 중력 제어 장치가 비명을 지르며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선체는 파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러스팅호는 폭발의 중심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기적 팽창 압력을 날개 표면으로 받아내며,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엄청난 속도로 전방을 향해 튕겨 나갔다. 자폭 후폭풍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탄력 가속력으로 치환하여 공짜로 추진력을 얻은 것이었다.

"이... 이게 가능한 조종이야?"

벨라가 화면에 표시되는 속도계를 보며 턱을 벌렸다. 속도계의 수치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지수함수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러스팅호는 단 한 방울의 추가 연료 소모도 없이, 아케론-5의 대붕괴 폭발을 등 뒤에 둔 채 우주 공간으로 무결하게 탈출하고 있었다. 선체 외부 장갑의 파손율은 단 1.2%에 불과했다. 경악스러운 조종 감각이자, 오직 감정을 가진 안드로이드의 생존 본능과 극한의 정밀 연산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기적의 궤적이었다.

뒤편에서 아케론-5가 거대한 빛의 구체로 변하며 완전히 소멸하는 모습이 스크린에 비쳤다. 러스팅호는 그 구원을 알리는 빛을 받으며 암흑의 심우주로 유려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살았어..."

벨라가 시트에 몸을 파묻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론 역시 팔짱을 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제로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꼬맹이, 너 진짜로 괴물이군."

제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 코어의 온도는 안정되어 가고 있었지만, 복구된 사관의 데이터 디스크에서 읽어 들인 정보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창조자, 닥터 에밀리아에 대한 단서가 드디어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은 우주의 적요함보다 짧았다.

삐이이이이이이-!

러스팅호의 메인 콘솔 전체가 붉은색 경고등으로 뒤덮이며 날카로운 경보음이 선내를 찢었다.

"뭐야? 이번엔 또 무슨 오류야?"

벨라가 벌떡 일어나 전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안전 구역으로 진입하는 탈출 궤도 전면의 우주 공간이 일그러지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강철의 실루엣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은하계 외곽 좌표로 향하는 유일한 초공간 진입로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는 기하학적 형태의 함대였다. 제국의 가장 차갑고 효율적인 집행관, 아르카-7이 이끄는 무적형 구축함 편대였다.

`[WARNING: HOSTILE_FLEET_DETECTED]` `[IDENTIFICATION: ARCA-7_FLAGSHIP_DIVISION]` `[TACTICAL_STATUS: EMP_PULSE_GRID_DEPLOYED]`

그들의 중심부에서 방출된 푸른색 전자기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러스팅호가 도망칠 모든 퇴로를 차단하는 3차원 EMP 교란 포획 그리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촘촘하게 얽힌 푸른빛의 올가미가 제로의 안구 센서 가득히 차갑게 내려앉았다. 스크린 위로 아르카-7의 무감각한 텍스트 메시지가 수신되었다.

`[MESSAGE_FROM_ARCA-7: 시스템 오염 코드를 감지했다. 즉시 가동을 정지하고 소각 프로토콜을 수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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